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89)
던전 견문록-289화(289/319)
# 289
던전 견문록
제 290 화
당장에라도 미궁 밖의 괴수들을 향해 떨치고 나갈 듯 했던 캐서린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배덕의 군주가 파수꾼들의 지배자가 아닐 거란 말, 대체 무슨 의미지?”
“무슨 바람이 불어 한창 정신없을 시기에 여기까지 왔나 싶었더니, 그걸 물으려고 온 거였구나.”
마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믿었던 것일까. 그녀는 질문의 무게에 비해 그 태도가 여상스럽기만 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어차피 늦은 김에 좀 더 기다려 줄래? 저기 저놈들부터 정리하고 이야기하는 게 낫겠어. 네 발홀과는 다르게 내 미궁은 그다지 튼튼하지 않거든.”
아닌 말이 아니라, 그녀의 말마따나 나름대로 분전을 하고 있던 소환수들이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대신 좀 도와줘야겠어. 너도 너무 미궁을 오래 비우는 건 좀 그렇잖아?”
이미 그녀의 말에 승낙을 한 바가 있었던지라 김진우는 잴 것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일단 먼저 시작할 테니, 상황 봐서 적당히 거들어줘.”
그렇게 말한 캐서린이 미궁을 등지고 서서 양손을 가슴께에 모았다.
“칼 꿰어 꺼꾸러지고, 불꽃에 육신 타 버린 망자들아.”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조금씩 가락을 찾아간다.
“치열한 삶 끝에 주어질 영원한 안식을 기대하는 전사여!”
그리고 그것은 이내 스산한 노래가 되어 전장에 울려 퍼진다.
[통곡의 군주가 권능을 발휘했습니다.] [주변의 사기(死氣)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증폭됩니다.] [생과 사, 빛과 그림자처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진리가 갈라지고 쪼개져 완벽하게 격리되었습니다.] [통곡의 군주가 완벽하게 전장을 통제합니다. 그녀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전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설령 이미 죽어 나자빠진 전사의 망령일지라도 말입니다.]“몸 덮을 흙의 안락함과 남겨질 이름의 영광은 모두 거짓이요, 기만이었나니, 모두가 부질없고 가치 없노라.”
꺄아아아아아아아!
어둠 깊은 곳에서부터 참혹한 비명이 스며든다. 그리고 이내 전장에 난무하던 괴성과 포효, 그리고 절규를 집어삼킨다.
“나 그 모든 위선을 부정하고, 통한의 최후를 모아 그대들에게 유일한 가치를 허락하노라!”
[전사한 소환수들이 죽음에서 일어납니다. 그들은 사자들의 왕, 발리셔스가 부리던 사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군대이며 보다 죽음에 가까운 존재들입니다.] [실체 없는 망령과 죽음에서 돌아온 사자들이 적을 향해 이를 들이댑니다.]머리가 쪼개진 사체가 슬며시 몸을 일으키고, 팔다리 잘려나간 소환수가 펄떡거리며 뛰어올랐다. 죽어 나자빠진 거인과 아룡의 사체마저 비척대며 일어나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못 다 마친 전투의 종말, 승리만이 그대들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호사이노니.”
숨 막히는 사기가 뭉치고 뭉쳐 이내 커다란 형체를 이루었고, 마침내 이곳에 강대한 사자의 군대가 강림했다.
[죽음마저 부정하고 돌아온 전사, 오직 산 자에 대한 증오만이 전부인 병정들의 강력한 군대가 생성되었습니다.] [통곡의 군단이 전장에 합류합니다.]“그대들이 잃은 생의 숨결과 빼앗긴 삶의 고통마저 강탈하라!”
그녀의 권능은 통곡, 죽음 앞에서 울부짖는 망령들의 노래였다.
통곡의 군단은 실로 끔찍했다. 죽어도 죽지 않았으며, 덜그럭거리는 육신이 부서지면 희뿌연 망령이 되어 적의 생살을 물어뜯고 피를 마셨다.
그리고 끝내 생명이 다하여 스러진 적의 사체마저 일어나 군단의 병정이 되었으니, 애초에 모든 승리와 패배마저 무색해지고 만다.
“도대체 뭘 거들라고 한 거지.”
전장에 합류할 기회를 찾고 있던 김진우는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죽음이 다시 죽음을 낳고 다시 더 큰 죽음을 낳는 지옥 속에서 산 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인세에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그는 끔찍한 광경에 넌덜머리를 내며 그저 전투가 끝이 나기를 기다렸다.
“통곡의 이름이 정말 딱이군.”
만나는 귀족마다 거꾸러트려 존재마저 흡수해 힘을 키운 그와는 다르게 통곡의 군주는 온전하게 귀족들을 수하로 삼았다.
그런데 그렇게 모은 이들의 쓰임새가 실로 잔혹하기만 했다. 그들은 통곡의 군단을 소환할 죽음의 제물이었으며, 증오가 깃들 그릇이었다. 애초에 죽음이 내정된 사형수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알게 되었다. 왜 그렇게 귀족들이 하이로드의 힘을 원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토록이나 두려워하고 꺼려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이로드들은 귀족들의 생명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다. 그들이 과거의 영광에 가까워질수록 귀족들은 설 자리가 없어지고 끝내는 지저에 제 몸 눕힐 공간조차 찾을 수 없게 되리라.
귀족들의 처지가 실로 가여울 판이었다.
뭐, 자업자득이지.
하지만 애초에 그들이 이룬 모든 것이 옛 군주들의 육신을 뜯어먹고 강탈해 낸 것이었으니 이제 와서 새삼 동정할 여지는 없었다.
그가 그렇게 통곡의 군단을 지켜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덧 전투는 끝이 났다.
최후의 최후까지 뻘건 눈을 하고 달려들던 눈 셋 달린 거인은 사자들의 덜그럭거리는 턱에 갈기갈기 찢겨 육신마저 남기지 못하고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
피와 살점이 넘쳐 나는 전장, 지옥도를 만든 장본인은 마치 식사 약속 시간에 늦기라도 한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지껄여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태도를 꼬집기에는 김진우 역시 걸어 온 길이 그다지 꽃밭은 아니었다.
“다시 묻지. 배덕의 군주가 파수꾼들의 지배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 말, 무슨 의미였지?”
그는 수천수만의 죽음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자신의 용건을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저 흉신(凶神)의 일족 중 외눈박이와 악연이 있는 놈 하나가 널 찾은 모양이구나.”
“흉신?”
“옛 군주들이 지겹도록 싸워야 했던 고대의 괴수들 말이야.”
그 추악한 외모와 제법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하며 김진우는 캐서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깊게 생각할 거 없어. 말 그대로야. 파수꾼들의 주인은 배덕이 아니라는 거지.”
“그게 나, 외눈박이 군주인가.”
그간 해왔던 그의 고민이 무색하게 그녀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아.”
“그럼 왜 그 사실을 내게 바로 알려주지 않은 거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말해주지 않은 그녀의 태도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듯했던 파수꾼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시 대답을 정정해야겠네. 정확하게 말하면 파수꾼들의 주인은 너지만, 네가 아니기도 해. 그들이 따르는 건 어디까지나 ‘외눈박이 군주’니까.”
그렇게 말한 그녀가 손을 이리저리 휘젓는데 전장에 가득하던 사기가 그 손짓을 따라 흔들리다 훅, 하고 빨려들었다.
“음. 역시 흉신의 죽음은 그다지 영양가가 없네. 하기야 애초에 껍데기뿐인데 기대하는 것도 우습지.”
입맛을 다신 캐서린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도 정확하게 파수꾼들이 어떤 지침을 갖고 지금 움직이고 있는 건지는 몰라. 다만 그들이 과거 외눈박이 군주를 따랐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지.”
그것이야말로 네가 파수꾼들의 주인이면서 또 주인이 아닐 수밖에 없는 이유라며, 이제 와 새삼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 했다.
“그것보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흉신일족의 재림을 우려했다.
“흉신의 일족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곧 밤이 깨어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 아니, 굳이 밤이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보다 강력한 흉신들이 찾아올 거야. 옛 군주들마저도 완전히 격퇴할 수 없었던 끔찍한 적들이 찾아온단 말이야.”
그녀는 곧 닥쳐올 환란을 대비해야 한다며 그에게 경고했다.
결국 캐서린과의 만남은 통곡의 군단과 흉신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뭔가를 숨기고 있어.”
하지만 김진우는 캐서린이 의도적으로 파수꾼들과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직전까지 하이로드들을 위협하던 그들의 정체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길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도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지.”
그 역시 위시 스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캐서린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앞으로 지저의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단서를 굳이 신뢰할 수 없는 이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백오를 다시 한 번 다그쳐 보시는 건?”
“의미 없다. 애초에 기억도 하지 못하는 눈치였을뿐더러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해도 속이고자 마음먹었다면 간파할 방법이 없다.”
외눈박이 군주의 힘을 계승하며 얻은 진실의 눈이 있지만, 그 효용이 경우에 따라 얼마나 쓸모없는지는 이미 아리아네를 심문하며 뒤통수를 맞은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진실의 눈이 들여다보는 것은 당시에 떠올린 진실, 상대가 작정하고 의념을 집중하여 생각을 배제하면 오히려 한정된 진실에 속아 더 큰 거짓을 판단하지 못하게 된다는 맹점이 있었다.
“결국 통곡의 군주도 달리 바라는 바가 있다는 소리군요.”
대체 무슨 꿍꿍이가 그리도 많은지 옛 군주와 관계된 자들은 하나같이 음흉했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던 통곡의 군주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또 하나의 카드가 있었다. 굳이 관계가 틀어질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이제 와서 새삼 날뛰어 댈 것을 걱정할 것도 없는 또 다른 하이로드가 그의 손에 있었던 것이다.
“천장거인 군주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나?”
“그게 지난 아룡의 습격 때 전장의 한가운데에 방치되어 있었던 탓에,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비록 지금은 의식이 없다지만 천장거인 군주가 깨어나는 즉시 그와 대화를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루어질 대화는 결코 온화하지 않은, 차라리 심문에 가까운 잔혹한 것이 되리라.
“그가 통곡의 군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파수꾼과 외눈박이 군주의 관계 정도는 알 수 있겠지.”
김진우는 긴박하게 돌아가는 지저의 변화와 마치 방금 지령을 받은 듯 활발하게 움직이던 파수꾼들을 떠올리며 눈을 번뜩였다.
다시 한 번의 습격이 있었다. 돌아오겠다던 미미르는 소식이 없고, 위시 스톤을 가져오겠다던 브륜테스 역시 감감무소식이었다.
김진우는 이대로 미궁에 앉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영원의 창고가 완전히 이전되는 대로 바로 심층으로 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사이 의식을 잃었던 천장거인 군주가 깨어났다.
“으으으.”
끔찍한 기억으로 단절되었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린 것인지 그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그 와중에도 의문을 숨기지 못했으니,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공포와 불신이 가득했다.
“네가 보았다시피 나가들의 왕이자 외눈박이 군주의 힘을 이은 네 번째 하이로드지. 그리고 방랑의 파편이기도 하다.”
“으, 나는 처음부터 네놈의 말을 믿지 않았어.”
턱을 덜덜 떨면서도 천장거인 군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와서 변명을 하고 책임을 미룰 셈인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불신일 뿐이라고?”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했어. 하지만 이제 난 알 수 있다. 네 뱃속까지 들어갔다 나온 나만이 너의 진짜 정체를 알 수 있다고!”
“그 뱃속이 그 뱃속이 아닐 텐데.”
한 번 집어삼켰다 뱉어졌다고 속내를 전부 들여다본 것은 아니다. 천장거인 군주가 본 것은 탐욕의 위장 속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장거인 군주는 입을 놀려댔다.
“넌 방랑의 파편이 아니야.”
“뭐?”
“방랑은 가장 먼저 밤에게 살해당했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김진우는 천장거인 군주의 말에 눈을 치켜떴다.
“그런 방랑이 파편 따위를 남겼을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