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90)
던전 견문록-290화(290/319)
# 290
던전 견문록
제 291 화
천장거인 군주의 시선은 마치 오물이라도 바라보듯 불결하기만 했다.
“넌 하이로드 같은 게 아니야.”
자신의 패배를 조금이나마 되갚았다 생각한 것일까. 불신을 가득 담은 얼굴 너머로 언뜻 저열한 쾌감이 스쳐갔다. 그런 천장거인 군주를 보며 김진우는,
“킥.”
웃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충격이 너무 커서 미친 건가.”
예상과는 다른 그의 반응에 천장거인 군주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깟 하이로드가 뭐, 그리 고매한 존재라고.”
잔뜩 일그러진 그 얼굴을 보며 김진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놀려댔다.
뻐꾸기들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새끼는 곧 부화해 둥지의 원주인들을 밀어내고 떨어트려 곤죽을 만든다.
그리고 어미 새는 제 새끼를 죽인 끔찍한 놈에게 날개가 다 헤지도록 먹이를 실어 나른다.
하이로드의 행동은 뻐꾸기의 탁란(托卵)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이로드가 남긴 권능을 우리가 부화시켰듯이, 다른 존재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
그는 이미 제 안에 웅크린 어둠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데다가 그것이 결코 상서롭지 못한 무언가의 씨앗이라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새삼 자신의 몸에 다른 것이 깃들었다고 해서, 딱히 놀랄 이유는 없었다.
“네놈! 네놈이 그 안에 도사린 ‘괴물’의 정체를 안다면 그리 태평스럽게 지껄여 대지는 못할 것이다!”
“속단하지 마라. 멍청한 거인들의 왕이여.”
김진우의 노골적인 조롱에 천장거인 군주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내 안에 웅크린 괴물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네놈이 아직까지 살아서 입을 놀려댈 수 있는 이유다.”
하이로드의 권능을 흡수하기 직전, 그는 제 안에 웅크린 탐욕스러운 괴물이 웃는 것을 느꼈다.
악룡의 태를 뒤집어썼던 탓에 안갯속을 헤매듯 의식이 몽롱하기만 했지만 소리 없이 히죽거리는 무언가의 불길함이 하도 섬뜩해 그는 다 잡은 먹잇감을 도로 뱉어내야 했다.
“아니야! 네놈은 모른다! 네놈의 안에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잠들어 있는…….”
물론 처음부터 그 정체를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캐서린의 경고와 천장거인 군주의 폭로를 통해 그는 마침내 괴물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밤.”
현실을 부정하듯 악에 받친 천장거인 군주의 말을 김진우가 툭, 하고 잘라냈다.
“네놈을 비롯한 하이로드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밤’이 내 안에 있겠지.”
듣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를 내는 거한을 바라보며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내 속에 들어 있는 것이 하이로드의 파편이든, 그도 아니면 끔찍한 괴물의 씨앗이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천장거인 군주가 질린 듯한 얼굴로 말했다.
“네놈은 정상이 아니군. 완전히 미쳤어.”
김진우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지저는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니까.”
김진우의 안에 웅크린 불길함에 압도당한 것인지, 천장거인 군주는 선선히 자신이 아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그가 얻은 소득은 많지 않았다.
애초에 외눈박이 군주와 천장거인 군주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고, 차라리 앙숙에 가까웠다. 두 군주는 서로의 비밀에 접근할 만한 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무지함 속에서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외눈박이 군주는 마냥 부활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던 다른 군주들과는 달라. 그는 배덕의 군주처럼 무언가 사명이 있었다.”
그렇기에 주인이 사라진 지 그리 오래되었음에도 파수꾼들이 하나의 목적을 갖고 지금껏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게 뭔지를 알 수 없다는 게 문젠가.”
결국은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라, 의문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괜찮을까요?”
앞뒤 다 자른 도미니크의 말이었지만 김진우는 단번에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제 주인의 몸에 깃든 ‘밤’을 우려하고 있었다.
“어차피 파편에 불과한 몸, 그 안에 군식구 하나가 늘었다고 놀랄 것도 없지.”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우려를 그다지 귀담아듣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비 꼬여온 인생만큼이나 다른 이의 계획을 망치는 데 탁월한 소질이 있는 그로서는 멋대로 남의 인생에 관여한 파렴치한들의 계획 따위 엉망진창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절대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테니까.”
방랑이 원하는 것이 지상과 지저의 완전한 하나 됨이라면 위시 스톤을 찾아 마지막 복원 과정을 막으면 된다.
그리고 밤이 원하는 것이 완성된 하이로드의 권능이라면, 그는 지저의 모든 귀족을 먹어치울지언정 더 이상의 권능을 탐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굳이 다른 하이로드들의 힘을 흡수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자체로 지저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으니까.
김진우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거짓과 진실을 뒤섞어 자신을 기만하는 이들에게 더 이상 농락당하지 않기 위해서 선택을 해야 할 때였다.
“둘 다 너무 위험해요.”
도미니크를 비롯한 소환수들은 그에게 다른 방법을 찾자 말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없어. 지저가 완전히 하나가 된 뒤에 움직이면 시간에 맞출 수 없을 거야.”
지저가 완벽해질수록 그에게는 선택권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무리하게나마 선택을 해야만 했다.
“진리의 왕좌는 너무 위험해요. 과연 이번에도 외눈박이 군주의 때와 똑같이 눈 하나를 대가로 가져갈 거란 법도 없고, 설령 운이 좋아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진리의 왕좌가 꼭 주인님이 바라는 진실을 보여줄 거라고도 장담할 수 없어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백오의 정보를 믿어보는 게 나을 거예요.”
도미니크는 수동적으로 진리의 왕좌가 던져 주는 진실을 받아먹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스스로 움직여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택하라 조언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다.”
김진우는 그런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 전에 위시 스톤을 먼저 손에 넣어야겠지.”
위시 스톤을 통해 제 살 길을 모색했던 타락의 여왕은 아직도 소식이 없었고, 그 다리가 되어야 할 미미르 역시 며칠째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안젤라, 아무래도 그 흉신이라는 것들 때문에 미미르의 걸음이 늦어지는 모양이다. 네가 마중을 나가줘야겠다.”
“얄미운 놈이지만,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기꺼이.”
“만약 상황이 위급하다면 다른 자들은 버려도 좋다. 어차피 필요한 것은 미미르뿐이니까.”
안젤라는 지체 없이 경계의 문을 열었고 그 너머로 사라졌다.
“도미니크,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다른 이들을 견제할 방법을 찾아라.”
“네, 주인님.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릭샤샤는 조금 더 수고를 해줘야겠어. 언더 엘프들을 보내 탐색을 계속하라. 과연 지저가 어디까지 확장된 것인지 알아야겠다.”
“명대로 따르겠나이다.”
그의 지시를 따라 소환수들이 자리를 비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탐색을 위해 나섰던 릭샤샤가 이른 귀환을 했다.
그렇게 돌아온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는데, 각기 종족이 다른 지저의 소환수들과 함께였다.
“지저의 귀족들이 왕께 몸을 의탁하고자 사절을 보냈나이다!”
아무래도 흉신의 난동이 생각보다 더욱 극심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강대한 공작급 미궁조차도 하루 만에 먹어치워 버린 괴물들이 떼로 날뛰어대고 있으니, 귀족들의 애가 달만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충성을 대가로 자신들을 비호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당연하게도 김진우는 그 요구를 모조리 들어주었다.
“교활한 귀족 놈들은 이 위기가 지나고 나면 어떻게든 다시 핑계를 대고 제 살 길을 찾을 생각이겠지.”
“하지만 그들은 이번만큼은 약삭빠른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게 되겠죠. 주인님은 저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으실 테니까요.”
김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입가에 매달린 비틀린 웃음을 보건대 절대로 귀족들의 끝이 좋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그가 손님을 맞는 사이 미미르를 마중 갔던 안젤라가 돌아왔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임프를 내팽개치다시피 그의 앞으로 내던지고는 상황을 보고했다.
“주인님의 짐작대로 흉신이라는 놈들이 날뛰어 대는 통에 좀체 길을 나서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그녀는 자신이 찾아갔을 때 이미 블랙 머천트의 구성원 중 태반이 흉신에게 당한 상태였다며, 일단 급한 대로 미미르를 먼저 찾아왔노라 말했다.
“구, 군주님! 저만 이렇게 데려오시면 제 수하들은 어찌하란 말씀이십니까요.”
과거의 위세는 어디 갔는지, 진창을 구르다 온 듯 엉망진창의 꼴을 한 미미르는 그의 발치에 매달려 애원했다.
“용병들은 몰라도 제 일족만큼은!”
창고를 빼앗기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들어온 세력마저 잃게 생긴 판국이라 미미르의 태도는 차라리 필사적이었다.
“따로 인원을 추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그대는 그대의 목숨이라도 건진 것으로 만족하라.”
하지만 김진우는 그런 미미르의 애원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게 이제껏 수도 없이 타인을 이용해 먹으며 살아온 자가 응당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부디! 제 일족만이라도 거두어주시는 아량을 베풀어주십시오! 시키는 거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음흉한 임프에게도 동족애라는 것이 있었던 것일까. 전에 없이 비굴한 자세로 매달리는 것을 보며 그는 작은 변덕을 부렸다.
“좋다. 그대의 청을 들어주지. 하지만 모두를 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그 말씀은?”
“그대가 살릴 자를 선택하라. 열 명 정도면 훗날을 도모하기에 적지 않으리라.”
“구, 군주님! 아니, 주인님! 조금만 더 여유를!”
미미르는 절규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지금 지저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든 흉신들은 하이로드가 아닌 이상 상대하기 힘든 괴물이었고, 그는 음흉한 임프의 일족을 위해 제 수하들을 위험으로 내몰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제껏 타인에게 선택을 강요하며 그 결과를 관음하던 성질 고약한 임프가 거꾸로 선택을 강요받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제법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그것 참 곤란하겠군, 제 스스로 죽일 자와 살릴 자를 구분해야 한다니.”
망연자실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은 미미르를 보며 그는 마음껏 비웃어 주었다.
작은 임프가 생전 처음 일족의 생명과 그 무게에 고뇌하고 있는 사이, 김진우는 수하들을 불러 은밀히 지시했다.
“흉신들은 블랙 머천트의 재물에 그다지 관심이 없을 테지. 그대들은 일이 끝나고 난 뒤 조용히 임프들이 흘린 재물을 수습하라.”
“하지만 언더 엘프들만으로 그 많은 것을 전부 가져오진 못할 거예요. 지금 저 밖은 말 그대로 지옥과 다름이 없다고요.”
안젤라의 말에 릭샤샤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죽음을 각오하고도 명을 완전히 이행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으니 그게 못내 한스러웠던 모양이다.
“가기 전에 먼저 야수왕을 찾아라. 그리고 블랙 머천트가 부리던 수많은 수인 노예의 존재를 알려주어라. 그리하면 그가 움직일 것이다.”
야수왕은 제 권능에 종속될 수인들의 존재가 절실할 것이다. 그런 그라면 흉신으로부터 수인들을 구해내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리라.
“야수왕과 수인들의 행렬을 쫓다 적당한 때를 보아 걸음을 돌리면 되겠지.”
“명대로 하겠나이다.”
토굴꾼으로 보내왔던 시기가 있었던 탓인지, 지저의 노예들에게만큼은 꽤나 관용을 베풀어왔던 그는 교활한 임프의 죄에 휘말려 애꿎은 수인들이 개죽음 당하지를 바라지 않았다.
“당장 움직여라.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야.”
그렇게 각자의 임무를 띠고 소환수들이 온 지저로 흩어졌다. 급변하는 흐름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던 대미궁이 마침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