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91)
던전 견문록-291화(291/319)
# 291
던전 견문록
제 292 화
103. 약속의 땅
타락의 여왕, 브륜테스를 발견한 것은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흉신들을 피해 오고 가는 사절들을 염탐하던 그녀는 수탐에 나섰던 언더 엘프 순찰자들에게 발견되었다.
“달리 명받은 바가 없어 은밀히 감시자를 붙여놓고 지켜보고 있나이다. 명만 내려주신다면 냉큼 왕 앞에 저 교활한 모리배를 대령하겠나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비록 제 기반을 거진 다 잃은 브륜테스지만 그래도 백작씩이나 되는 존재의 신병을 마치 제 손에 쥔 것처럼 이야기하는 릭샤샤의 태도가 자못 이채로웠다.
“피해가 생기지 않겠어?”
“비록 미천하고 우둔한 일족이지만, 왕의 은덕으로 제 몫은 할 수 있게 되었나이다. 지금이라면 백작이라 한들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나이다.”
그러고 보니 릭샤샤의 존재감이 전과는 달라보였다. 하기야 다른 소환수들이 성장하는 동안 언더 엘프들이라고 놀고만 있으란 법은 없었으니, 그 성장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럼 믿고 맡기마.”
“미천한 종이 왕의 의중을 제대로 알지 못하나이다. 왕께서 브륜테스의 어디까지 원하시는지 알려주시길 바라나이다.”
“죽지만 않으면 되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릭샤샤가 언더 엘프 두엇을 이끌고 대미궁을 나섰다.
“모리건, 헤임달과 함께 은밀히 릭샤샤의 뒤를 따라, 만약의 일을 대비하라.”
그런데 웬일인지 모리건이 그의 명령에도 자리를 떠날 생각을 않았다.
“주인님께서는 아직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시지 못하셨군요.”
어지간해서는 다른 이를 인정하는 법이 없던 모리건이 의외의 말을 했다.
“지금의 그녀라면 백작 정도는 홀로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가 깨달은 영매의 능력과 지저령은 꽤 쓸 만하거든요.”
그간 너무 무심했던 모양이다. 제 주인에게 인정받는 것만이 오직 유일한 가치인 우직한 수하의 속도 모르고 바깥의 일을 살핀다는 핑계로 그 노력과 성장을 몰라봤으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그 사실을 깨달은 김진우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만큼 노력했던가.”
“노력도 노력이지만 언더 엘프 일족이 지닌 잠재력이 주인님과 제 예상 이상으로 대단했던 것이겠지요. 만약 주인님께서 원하신 것이 살아 있는 브륜테스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수하를 대동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모리건은 진 나가로 진화한 나가들이라 할지언정 지금의 언더 엘프들을 쉽사리 이겨낼 수는 없을 거라며 거듭 릭샤샤와 그 일족의 성장을 강조했다.
“주인님께서 그녀의 성장을 몰라보셨던 것도 당연합니다. 주인님은 빠른 시간 동안 너무 강해지셨거든요. 설령 그녀가 공작의 강함을 손에 넣었더라도 쉽게 발견하지는 못하셨을 거예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가 이룬 것에 비하면 릭샤샤의 성장은 차라리 정체에 가깝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이리도 기꺼운 것은 노예의 굴레를 벗어난 그녀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군. 덕분에 좋은 걸 알았다.”
생각지도 못한 조언 덕분에 김진우는 심층으로 향해도 미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란 확신을 얻었다.
자연스럽게 온통 미궁 밖으로 쏠렸던 관심이 다시 미궁 내부와 밖을 향해 균형 있게 분배되었고, 그는 다소 초조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모리건의 말은 사실이었다. 릭샤샤는 정말로 브륜테스를 생포해 왔다. 다소 지친 기색이 역력하긴 했으나 큰 상처도 없는 모습이 건재하기만 했다.
“반항이 심해 부득이하게 두 손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나이다.”
그에 반해 브륜테스의 몰골은 처참했다. 그녀는 양손을 잘린 채 볼품없이 바닥을 기고 있었는데, 한때 당당한 심층의 지배자였던 백작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안됐군요. 브륜테스는 지저에서도 이름 높은 마법사였죠. 두 손이 잘린 이상 앞으로는 제대로 된 마법을 부릴 수 없을 겁니다.”
말과는 달리 대미궁의 소환수들은 연민의 기색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김진우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정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그는 냉담하게 브륜테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투항의 의사를 밝혔는데, 어찌 이리 가혹하게 구신다는 말입니까!”
고통과 상실감으로 엉망진창이 된 음성, 신음인지 비명일지 모를 브륜테스의 항의에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네가 말한 것은 거래였지, 투항이 아니었어. 그리고 너는 나와 거래를 할 자격이 없다.”
거래라는 것도 격이 맞아야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살 길을 찾고자 했다면 거래를 제안할 게 아니라 위시 스톤을 바치고 선처를 바랐어야 했다.
하지만 브륜테스는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주제넘은 제안을 한 덕분에 비참한 꼴이 되었다.
“단지 살아남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었다면, 지저 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살아갔어도 그만, 지상과 연결 고리를 만들어둔 그대라면 지상 역시 도피처로는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나에게 그런 가당찮은 거래를 제안한 것은, 따로 바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김진우는 그녀가 바란 그 무언가가 하이로드의 권능이 아닐까 짐작했다. 실제로 추궁해 본 결과, 자신의 짐작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한 욕심은 언제나 화를 부른다. 브륜테스의 꼴이 딱 그 짝이었다.
“멍청하군. 애초부터 제 것이 될 수 없는 힘인 것을.”
진혈의 군주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 스스로 하이로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배덕의 군주는 오직 지저에서 나고 자란 던전 베이비들에게만 씨앗을 심어두었으니까.
“위시 스톤을 구해드릴 테니, 부디 저에게 기회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브륜테스를 본 김진우가 짧게 혀를 찼다.
“지저의 현자라 자칭하더니 멍청하기 그지없군.”
그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타락의 여왕을 노려보았다.
“위시 스톤은 당연히 나에게 바쳐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대는 그 알량한 돌덩이를 믿을 게 아니라 간곡히 청하고 또 청해 나의 변덕에 기대야 할 것이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위시 스톤을 얻어낼 작정이었다. 그런 그이니만큼 그녀가 제시하는 조건은 당연히 취해야 할 소득에 불과했다. 애당초 거래가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예전이라면 모를까. 흉신들이 난동을 부려대는 지저에서 제 기반을 잃은 백작이 제대로 위시 스톤을 찾아올 능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모든 제안은 가치 없었다.
“빌어라. 빌고 또 빌어라.”
그의 무자비함을 너무도 늦게 깨달았던 미미르는 결국 제 기반을 잃고 나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었다.
지금이라면 그는 브륜테스를 거두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리하면 내 작은 변덕이 그대를 살리고, 잘려나간 두 손이 붙는 기적을 불러올지도 모르리라.”
애초에 이런 상황을 노린 것인지 릭샤샤가 브륜테스의 잘린 두 팔을 바쳤고,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양팔을 내밀며 그녀에게 굴종을 강요했다.
“시키시는 대로! 시키시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두 손만 있으면 수인을 맺어 강대한 주문을 외울 수 있다. 다시 찾은 희망에 브륜테스가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처지가 비참하게 되긴 했지만 결국 브륜테스는 잘려나간 양팔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가 사제들이 달라붙어 하루를 꼬박 공들인 결과 뻣뻣하게 움직이는 팔이나마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두 팔을 찾았다고 해서 그녀는 섣불리 배신을 꿈꿀 수 없었다. 자신을 꺾은 돌연변이 언더 엘프가 아니라 해도 대미궁에 너무나 많은 강자가 우글거렸던 탓이다.
하이로드의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흡혈귀, 어지간한 백작들 따위는 눈 아래로 보는 고대의 영웅급 소환수들, 전에는 본 적 없던 강대한 기세의 나가들까지. 어느 하나 쉽게 볼 만한 상대가 없었다.
그녀는 교활한 만큼 의지가 약했으며, 포기가 빨랐다. 결국 차라리 김진우에게 빌붙어 살아남는 것을 선택했다.
“좋아. 안젤라가 브륜테스가 위시 스톤을 인수 받는 것을 돕도록 해. 너라면 그녀가 다른 수작을 부리더라도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가혹했지만, 이 자리에 모인 어느 누구도 브륜테스의 자존심을 생각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본인마저도 그것을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만약 다른 수작을 부린다면, 진짜 고통이 뭔지 보여주도록 할게요. 그간 주인님께 많이 배웠거든요.”
차라리 배신이 기대된다며 즐겁게 웃어 보이는 안젤라를 보며 브륜테스가 하얗게 질렸다. 슬슬 자신이 어떤 자들을 상대로 배포를 부린 것인지 감이 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요. 윤희. 주인님께서는 윤희를 원하시죠?”
“그녀에게 들을 것이 많아.”
“성질 같아서는 이면 층의 미아로 던져 주고 싶지만, 주인님이 원하시니.”
어쩌면 윤희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그녀를 생포해올 것을 주문했다. 안젤라는 정말로 그녀가 위시 스톤의 운송을 맡았다면 반드시 잡아오겠노라며 브륜테스와 함께 떠났다.
“그래도 안젤라가 함께라면 조금은 도움이 될 텐데.”
도미니크는 곧 심층으로 향할 주인에게 힘을 더해주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한사코 그녀의 말을 거부했다.
“심층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오직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일 거라는 예감이 들어. 다른 이들은 방해가 될 뿐이야.”
시기가 무르익은 것일까. 그는 전에 없이 오감을 넘어선 육감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고, 그 모든 것이 혼자 심층으로 향할 것을 강요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지.”
“언제든 주인님의 소환에 응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을게요.”
몇 번이나 주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도미니크의 모습에 그가 웃어 보였다.
“그럼 다녀오지.”
그렇게 말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궁을 나섰다. 그런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오직 필멸의 창,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뿐이었다.
지저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하는 길은 절대로 순탄하지 않았다. 변해 버린 지저의 지형이야 곳곳에서 나타난 언더 엘프 순찰자들 덕에 헤쳐 나갈 수 있었다지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흉신들 탓에 걸음이 더디기만 했다.
“옛 군주가 물려준 것은 권능뿐이 아닌 모양이다.”
미처 청산하지 못한 원과 한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할 뿐이나이다.”
릭샤샤는 자신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며 이내 이별을 기약했다.
“덕분에 그나마 길을 헤매지 않았어. 수고했다, 릭샤샤.”
작은 치하의 말에 당치도 않다고 하면서도 기쁜 낯을 숨기지 못했던 릭샤샤마저 떠나고 그는 오랜만에 홀로 지저의 어두컴컴한 통로를 걸었다.
수많은 흉신들이 외눈박이 군주와의 원한을 내세우며 달려들었다가 탐욕의 권능에 불멸을 잃고 소멸당했다.
“음.”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통로, 그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 어둠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과연 이곳이 심층으로 향하는 올바른 통로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더 엘프들이 부지런히 탐색한 결과 위로 올라가는 통로 하나를 제외하고는 이곳이 유일하게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길이었다.
저 불길한 어둠을 넘은 무수한 언더 엘프들이 귀환조차 하지 못한 채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사실이 꺼림칙했지만, 이제 와서 걸음을 돌릴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무거운 한 걸음을 내디뎠고, 새까만 어둠이 이내 그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