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92)
던전 견문록-292화(292/319)
# 292
던전 견문록
제 293 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버린 지저의 심층에서, 김진우는 달려드는 흉신들과 드잡이 질을 하느라 시간의 흐름마저 잊고 말았다.
“후우.”
그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거인의 사체가 먼지처럼 흩어지는 것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결에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기력이 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탐욕의 권능이 있고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흉신들이 있는 이상 육신이 지치는 일은 없었다.
지친 것은 정신 쪽이었다. 익숙하던 층을 떠나 길을 헤매는 것도 고욕이고, 무슨 원한이 그리도 깊은지 먼 곳에서 자신의 기척을 찾아 달려드는 흉신들과 싸우는 것도 고되기만 하다.
마치 과거로 돌아가 홀로 지저를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약해진 것일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짙은 피로를 느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지저 전체가 내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든 길을 막아보겠다고 달려드는 흉신들의 존재가 그러했고, 어지간해서는 길을 잃는 법이 없는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변화하는 지형지물이 그러했다.
마치 온 지저가 힘을 다해 길을 막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그러한 압박이 강해질수록 더욱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서둘렀다.
지저 역시 지상과 하나 됨을 원하고 있다면, 자신의 지금 행보야말로 지저가 원하지 않고 옛 군주들이 원하지 않는 한 걸음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예감이 확신이 된 것은 이제껏 만났던 그 어떤 흉신보다 강대한 기운을 품은 거인과 조우했을 때였다.
피를 뒤집어 쓴 듯 붉은 피부를 한 거인은 다른 흉신들과는 달리 대뜸 달려드는 대신 대화를 시도했다.
“별종이군. 내가 밉지 않은가?”
[먼발치에서 그대를 지켜보았노라. 그리고 마침내 확신하게 되었노라.]거인은 그가 불멸의 흉신들에게 내려준 소멸을 지켜본 결과, 다른 하이로드들과 다른 존재임을 확신했노라 말했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도다.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도다. 나는 그대와 적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느꼈노라.]머릿속에 울려대는 거인의 탁한 음성을 들으며 그가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그대의 안에 웅크린 ‘마(魔)’를 보았고, 악의를 느꼈노라. 그리하여 결정을 내리기를 우리들은 더 이상 그대의 앞을 막지 않기로 결정했노라.]“우리?”
[나는 흉신 중의 흉신, 태초부터 정해진 군주들의 대적자, 그리고 나와 같은 이들이 그리 결정했으니 더 이상 그대의 앞길을 막는 일족은 없으리라.]아무래도 흉신 중에서도 제법 위치가 있는 놈이었던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한 흉신의 말에 김진우는 ‘그것 참 잘됐군.’ 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이내 시큰둥했던 표정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기왕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면, 조금 더 선심을 쓰는 건 어때?”
일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붉은 거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대화할 기회가 없어 말하지 못했는데, 나의 목적은 그대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알 수 없는 말을 하는구나.]거인은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런 거인을 향해 그가 은근하게 제안했다.
“날 좀 도와달라는 말이야.”
붉은 거인의 말은 정말이었다. 이제껏 악다구니를 쓰고 달려들었던 것이 무색하게 흉신들은 더 이상 그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조용히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변해 버린 지저는 적막 그 자체였다. 어둠에 숨어 목을 울려대는 크리쳐들도 없었고, 방문자를 경계하는 미궁도 없었다.
흉신에게 전부 멸망당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층이 원래 이러했던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이 침묵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차라리 흉신들과 정신없이 싸웠을 때가 나았으려나.
그는 조용한 통로에 울려 퍼지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걷고 또 걷는다. 그리고 통로를 찾아 어둠에 몸을 내던진다. 그렇게 얼마나 지저의 심처를 향해 걸었을까. 그는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의 통로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오지 마라. 오지 마라. 결코 이곳을 넘어서는 안 된다.
통로는 온몸으로 그러한 말을 하고 있었다. 흉신이라는 위협을 강제로 배제당한 지저가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더욱더 진해진 불길함은 발가벗겨진 지저가 토해내는 신음에 불과했으니, 그는 잠시 숨을 고르는 것으로 그 불길함을 떨쳐 냈다.
“미안하군. 그 경고, 들어줄 수 없거든.”
마치 살아 있는 무언가와 대화라도 나누듯 한마디를 뱉어낸 그는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벌써 몇 번이나 느껴왔던, 온몸을 찍어 누르는 압박감과 부유감이 지나고 완전히 어둠에 파묻혔던 그의 몸이 통로 너머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그렇게 통로를 넘은 그의 눈앞에 이제껏 보아왔던 지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검푸른 물을 가득 담은 호수, 칼로 잘라낸 듯 까마득한 절벽, 그리고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숲까지. 도저히 이곳이 지저라고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건 대체…….”
그를 더욱 놀라겐 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마치 밤하늘을 보듯 까맣게 펼쳐진 지저의 허공에 떠오른 하나의 빛 덩이였다. 그건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차갑게 식은 만월이었다.
실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 누가 여기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이곳이 지저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에게는 한가하게 경치를 구경할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푸른 만월에 창백하게 질린 풍경 너머로 언뜻 낯익은 그림자를 발견했던 탓이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결에 흩날리는 새하얀 옷자락을 본 그가 찢어질 듯이 눈을 부릅떴다.
쾅!
생각 이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을 차린 순간 그는 이미 대지를 박차고 그림자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적도 금세 쫓을 수 있었던 기민한 발걸음이 어쩐 일인지 굼뜨기만 했다.
“빌어먹을!”
아무리 달려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 갑갑함에 애꿎은 이만 갈아댔다.
“으아아아아아!”
결국 그는 새하얀 옷자락이 숲에 짙게 깔린 그림자 속으로 숨어드는 것을 보아야 했다.
숲은 그렇게, 그가 그토록이나 애타게 쫓던 그림자를 집어삼키고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평하기만 했다.
“어째서! 어째서!”
스스로의 무력함에 몇 번이나 힘주어 쥔 주먹으로 허벅지를 내려쳤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한 번 사라진 그녀의 그림자가 다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꼴사납군.”
뒤늦게 숨을 돌린 그가 쓰게 웃었다. 다시 그녀를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건만, 단지 옷자락을 본 것만으로도 눈이 돌아갔다.
지금도 열이 가시지 않아 화끈거리는 눈자위를 어루만지며 스스로를 자조했다.
“어쨌건 여기가 가장 깊은 심층인 건 분명하군.”
가장 깊은 지저는 한때 옛 군주들 중 하나였지만, 이후로 오롯이 하나뿐인 왕으로 군림해 온 찬탈자에게만 허락된 곳이었다.
그런 그녀가 먼발치에서나마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그가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후우…….”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녀의 밝음은 거짓 위에 세워진 기만의 촛불이었고, 손끝을 감아쥐던 따스함은 목적을 숨긴 자의 음습한 숨결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적이었다.
지저에서만 통용되는 명료한 이분법, 적과 나를 구분하는 그 단순한 법칙이 지금만큼은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고 뒤늦게 자신이 숲의 한가운데에 들어서 있음을 깨달았다.
솨아아아아.
바람결에 나무가 흔들린다. 그리고 이리저리 어지러이 흔들리던 앙상한 가지들이 손 뻗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완전 제멋대로군.”
이제는 완전히 평소의 오만한 모습을 되찾은 그가 숲이 만들어낸 길을 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지금은 장단에 맞춰주마. 하지만 이후에는 내 뜻대로 하리라.
그는 하얀 옷자락이 사라진 어딘가를 가리키는 숲의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숲은 멀리서 보았던 것보다 몇 배는 광활했다. 걷고 또 걸어도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검은 초목의 수해(樹海)를 따라 김진우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사람 지치게 만드는군.”
아무도 없는 숲은 그야말로 나무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흔한 야생 크리쳐들마저도 보이지 않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숲이 결코 조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숲은 바람결에 앙상한 가지를 부딪쳐 대며 계속해서 속삭였고,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소리에 그는 정말로 질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조금씩 고조되어 가는 불길함 때문이었다.
그는 숨을 골랐다. 압박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마치 등 뒤를 떠밀 듯 농밀해져만 가는 어둠은 그토록이나 익숙했던 지저의 어둠과는 달랐고, 창백한 달빛을 머금은 보다 차갑고 생경한 것이었다. 그 푸르스름함에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겁에 질려 달음박질을 하지도, 숲 밖으로 나서기 위해 팔짝팔짝 뛰어대지도 않았다.
온 지저가 자신을 부정하고 숨 쉬는 공기마저도 목 안에서 목젖을 움켜잡듯 거칠게 오고 갔지만, 그는 그 모든 불쾌함을 견뎌냈다.
이곳이 만약 그녀의 미궁이라면, 반드시 함정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서두를수록 그녀가 준비한 올가미는 목을 조여오리라.
언제든 권능을 끌어올릴 준비를 한 채,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숲을 벗어날 때까지 그 어떤 위협과도 만나지 않았다. 그저 음산한 분위기만이 전부였던 것처럼 숲은 끝이 났다.
내내 길을 안내하던 나무들은 자신의 일을 마치자 우두커니 그를 배웅했고, 이번에는 숲 대신 호수가 그를 안내해 주었다.
잔잔하던 호수의 표면이 한 방향으로 파도쳤다. 다시 그 출렁임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호수가 끝이 났을 때, 그는 그토록이나 재회하기를 고대해 왔던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찬탈자.”
이미 한 번 분노를 토해냈던 탓일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제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갑고 음습한 으르렁거림이었다.
“더 이상 전처럼 불러주지 않는구나.”
그녀는 마치 어제 헤어진 것처럼 여상스러운 얼굴로, 그러나 애잔함을 담아 대답했다.
“안녕, 나의 작은 진우.”
새하얀 옷자락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가운데 그는 마침내 그녀와 재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