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93)
던전 견문록-293화(293/319)
# 293
던전 견문록
제 294 화
시간의 흐름마저 빗겨간 듯,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소희는 전혀 성장하지 않은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얼마나 오늘을 기다려왔는지 몰라.”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나의 작은 진우.”
고된 일과가 끝나고 좁은 토굴에 고단한 몸 부대껴 뉘여 겨우 눈을 감았을 때, 그때 소녀가 불러주었던 자장가처럼 달콤한 음성이었다. 당시에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그에게 허락된 위안이요, 안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온기 속에서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거짓 위에 쌓아 올린 기만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던 탓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했던 그녀와의 재회에 이토록이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마주하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었다. 깨어지고 조각 나 베어버릴 듯 날카롭게 변해 버린 추억과 그리움이 가슴 언저리를 마구 할퀴어댔다.
수십 자루의 송곳이 심장을 꿰뚫어 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냉담하기만 했다. 고작 그 정도의 상처로 아파하기에는 그가 걸어온 길이 너무나 험난했던 것이다.
이깟 아픔에 소리쳐 울기에는 너무나 상처가 많았다. 그는 이미 만신창이였고 너덜너덜한 넝마였다.
“어째서.”
원망을 토해내는 대신 차갑게 추궁했다.
“나였지? 왜 하필 나였던 거지?”
그대로 내버려 두면 토굴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버렸을 하찮은 인생을 왜 그렇게 쥐고 흔들어야만 했는지, 그는 진심으로 알고 싶어졌다.
그런 그를 보며 그녀가 지독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마치 잠자리에 들려줄 동화를 골라내는 누이의 그것처럼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래. 먼저 네 질문부터 대한 답부터 들려주는 게 좋겠구나. 왜 하필 너여야만 했는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그녀는 선선히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단다. 나는 그저 씨앗을 뿌렸을 뿐, 그 씨앗이 어떤 싹을 틔울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차라리 듣지 않느니만 못한 대답이었다. 그건 그가 상상했던 모든 가정보다 몇 배는 질이 나쁜 농담이었다. 스스로의 존재마저 부정당해야 했던 자신의 모든 고난이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던 것이다.
“그래도 네가 아예 특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어. 너는 지저에서 나고 자랐으면서 유일하게 볕 따스한 지상을 그리워했던 아이였지. 아니, 다른 아이들 중에도 너와 같은 아이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아이들은 싹을 채 틔우기도 전에 져 버리고 말았단다.”
지상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보살핌을 받았던 아이들은 그 보호자가 죽을 때 모두 견디지 못하고 죽었노라며 그녀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 안타까움은 아끼던 물건을 잃었을 때 표하는 유감과 다르지 않았으니, 실로 냉혹할 뿐이었다.
“운 좋게 싹을 틔운 아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상태가 좋지 않았어. 그들은 이미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거든. 그리고 내게 필요한 것은 ‘인간’이었지 출신도 모호한 짐승이 아니었단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야수왕을 비롯한 다른 하이로드들은 지상과 지저에 구분을 두지 않았다.
애초부터 지저에서 나고 자란 존재이기에 지상의 따스함보다는 지저의 냉기에 어울리는 존재가 된 것이다.
“많은 씨앗이 싹도 틔우지 못한 채 죽어버렸어. 그래도 꽤나 많은 수의 아이들이 살아남았지. 그리고 나는 그들을 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단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모두 지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지저를 찾았다.
그렇게 돌아온 아이들은 토굴꾼이라는 허름한 이름표 대신 탐색자라는 꽤나 거창한 명찰을 달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늦게 돌아온 것이 바로 너였어.”
김진우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여동생 현지의 예단비를 구하기 위해 내키지 않은 지저행을 결정했던 그날, 그는 필사적으로 외면했던 지저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가의 미궁을 얻게 되었다.
“덕분에 애꿎은 아눌락스의 수하들만 고생해야 했단다. 너의 관리는 거미들의 책임이었으니까.”
왜 심층에서나 볼 수 있는 지옥거미들이 상층까지 기어 올라와 그 난동을 피워댔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그의 흔적을 따라 상층까지 거미들을 보낸 것이었다.
“원래 너에게 주어져야 했던 건 지룡, 차가운 서리의 땅을 지배하던 지저룡의 자리였단다.”
잇따라 밝혀지는 진실, 행방을 알 수 없었던 마지막 하이로드의 권능이 처음부터 자신과 함께했음을 깨달았지만 그는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던 나가의 미궁마저도 누군가의 안배라는 사실을 알았던 탓이었다.
허탈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의문이 더욱 컸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지룡의 권능이 주어졌었다면, 어째서 지룡의 힘은 깨어나지 않고 엉뚱한 광휘 군주와 외눈박이 군주의 권능을 먼저 얻게 된 것일까.
그녀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너무 시간을 지체했던 모양이야.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였지만, 모든 것을 두루 살펴보기에 지저는 너무 넓었거든. 증오스러운 협잡꾼들이 흩어진 권능에 대한 단서를 찾고 말았지. 그 사실을 알고 손을 써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귀족들을 통해 광휘와 외눈박이의 권능과 접촉하고 난 후였어.”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권능을 지저인을 통해 얻어내고자 했다. 그 결과가 바로 그의 각성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각성은 평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즈음 해서야 난 네 속에 깃든 무언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단다. 그리고 네가 방랑의 파편이라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지.”
그녀는 그가 방랑과 외눈박이 광휘마저 집어삼켰음에도 그들의 힘을 잇는 대신 엉뚱한 권능을 얻었다는 사실에 한탄했다.
그 바람에 당연히 이어졌어야 할 권능의 계보가 이름뿐인 계승으로 남았노라며 안타까워했다.
“네 안의 무언가가 깨어난 건 내가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도 훨씬 전이었을 거야. 네게 주어졌던 지룡의 권능이 그저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의 힘은 한참 전에 그것의 양분이 되었겠지.”
그는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일개 미궁의 주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강력했던 힘, 나가라자의 권능이 왜 그리도 탐욕스럽고 음험했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또한 어째서 스스로가 천장거인 군주의 권능을 흡수하기를 주저했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이었어.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 그 끔찍한 괴물이 설마 일개 인간의 몸에 숨어들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녀는 그때만큼은 천진난만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혐오와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린 소녀가 품기에는 너무나 깊고 깊은 증오, 그래서 더욱 섬뜩하게만 와 닿는 눈빛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네가 방랑의 파편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말았단다. 만약 처음부터 알았다면 나는 아마 너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러한 시선은 찰나에 불과했을 뿐, 그녀는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어. 너는 놀랍게도 그 괴물을 잘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
그는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근원을 알 수 없는 악의에 오염되고 잠식될 뻔했지만, 그는 이겨냈다.
게다가 근래 들어서는 그 탐욕스러운 괴물의 식사마저 제 스스로의 의지로 저지해 낸 바가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뒤늦게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위화감의 정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왜, 나에게 이런 사실들을 알려주지?”
지저의 비사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알려주었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지 않은 이상 이리도 순순히 모든 것을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그녀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댔다.
“시간? 무슨 시간을 말하는 거지?”
께름칙한 기분에 물으니, 그녀가 대답했다.
“지저는 곧 멸망할 거야.”
진리의 왕좌를 통해 보았던 고대의 비밀, 그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직접 들으니 그 무게가 남달랐다.
“패배가 예견된 전쟁. 지저는 곧 닥쳐올 전쟁을 절대로 이겨낼 수 없어.”
“그깟 전쟁이라면 하이로드들만으로 억제할 수 있을 텐데?”
어지간한 공작들 따위는 눈 아래로 보는 하이로드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지저에 일어나는 모든 분쟁을 막아낼 수 있다.
비록 그 수가 과거만 못하다지만 당장 야수왕과 통곡의 군주, 그리고 자신이 나선다면 전쟁을 막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지저의 멸망은 내부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랬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지저에 멸망을 가져오는 존재는 군주의 위엄이 통하지 않는 존재란다.”
“음.”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이로드마저 손댈 수 없는 존재라면, 오직 ‘밤’만이 유일했다. 그리고 그 ‘밤’은 지금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밤이 깨어날지 모른다는 소리는 그것만으로도 그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설마…….”
다행일까 불행일까. 이번에도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지저를 멸망시키는 건, 바로 지상인이야.”
뒤통수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지상이 지저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게 지저가 자초한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지상과의 전쟁에서 패퇴할 것이 정해져 있다니 차라리 황당할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지저가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지저가 지상과 하나의 세계라 지상인들이 믿었기 때문이지. 그들은 자신들이 발 딛고 선 대지가 붕괴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거든.”
그녀는 지상과 지저가 맞닿은 세계이면서 사실은 별개의 세상이라 말했다.
“내가 그렇게 믿게 만들어왔어. 경계를 가리고 게이트를 평범한 통로인 양 생각하게 만들었지. 하지만 그것도 한계야.”
놀랍게도 무수히 많은 지저의 존재가 이미 지상에서 활동 중이며, 그렇게 진출한 이들이 지상인들의 탐욕을 자극하고 또 서로를 상잔시킴으로써 지나치게 지저를 향해 이목이 쏠리는 것을 막아왔다는 것이었다.
김진우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일견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야기였지만 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지저가 제 스스로 전쟁의 빌미를 지상에 주었다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강대했던 옛 군주들이 맞서 싸울 생각조차 못하고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던 상대가 지상이라는 것은 왠지 모르게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물론 그녀의 말이 전부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풀어낸 진실 너머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작은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