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94)
던전 견문록-294화(294/319)
# 294
던전 견문록
제 295 화
“그런데 말이야.”
다만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네가 얻는 게 뭐지?”
구구절절이 이어진 이야기는 모두가 하나같이 거창하다. 그래서 와 닿지 않았다.
듣기 좋은 소리를 지껄이는 이들일수록, 대의를 위한답시고 자신을 포장하는 이들일수록 막상 그 속을 까보면 징그러울 정도로 시꺼멓게 마련이다.
그가 지저에서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뼈에 새겨온 진실이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하이로드라는 것들이 그렇게 이타적이지만은 않더라고.”
애초에 지저라는 것이 누군가를 죽이고 다른 이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도 정점에 오른 하이로드가 마냥 선할 거라 믿는 것은 실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보보마다 피가 흐르고 한 맺힌 죽음만이 남는 군주의 길, 그것이 그가 걸어온 길이었으며 군주의 정체성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지저의 멸망이니 뭐니, 거창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뭔데?”
비아냥도 아니고 추궁도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의문일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과거의 원망 따위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추억팔이는 그만두자는 말이야.”
그녀는 다시 만난 이후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황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줄곧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유가 있었으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너는 이제 더는 여리지도 순수하지도 않구나.”
“네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만약 김진우가 평범한 던전 베이비로 남았다면, 이렇게까지 닳고 닳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여동생 현지의 결혼 자금을 충당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평생 동안 다시 지저를 찾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지금 이렇게 지저의 비사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것은 그 스스로가 이곳에 지킬 것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포장하지 말고, 솔직해지자고.”
더 이상 과거에 대한 고민도 혼란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음성은 차라리 음험하기까지 했다.
“하이로드 대 하이로드로 말이야.”
그렇게 한마디를 내뱉은 그는 차분히 상대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내내 마주 보던 시선을 내리깐 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상처를 받은 것 같기도 하고 할 말을 찾지 못해 말을 고르는 듯도 하다.
어깨를 작게 들썩이는 것을 보면 또 서러움이 복받쳐 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지간한 이였다면 그 애달픈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과거를 잊고 냉큼 달려가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짙게 그림자 깔려 표정을 알 수 없는 그 얼굴을 경계했다.
소리 없이 떨리는 어깨의 들썩임이 그런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녀의 주변에 몰아치기 시작한 심상치 않은 공기가 그 증거였다.
“놀랍구나.”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미소는 전과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단지 입꼬리가 아주 조금 더 올라갔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맑은 눈빛과 미소에 떠오른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그가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권태로움이었다.
“너는 어느새 그들을 전부 네 것으로 만들었구나.”
만들어낸 듯한 미소도, 고저 없는 음성도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영혼이 거세된 듯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가 섬뜩하기만 했다.
“아니, 이 경우에는 달리 말해야겠지.”
산뜻하니 살랑거리던 바람이 칼날처럼 일어나 사방을 할퀴어댔고 그녀의 하얀 옷자락이 요사스럽게 펄럭였다. 하얀 얼굴에 언뜻 귀기마저 보일 지경이었다.
“밤이 방랑을 집어삼키고, 그런 밤이 너에게 먹혔으니, 지룡이라고 배길 재간이 있을 리가 없을 터. 너는 더 이상 방랑도, 지룡도, 밤도 아니노라.”
내내 보아왔던 그녀의 미소가 처음 본 듯 생경하기만 했다.
“너야말로 고대 이래로 새로 태어난 유일한 하이로드일지니.”
그녀, 배덕의 군주가 선언했다.
“약속된 예언의 군주, 열한 번째 군주로다.”
진혈의 군주가 언젠가 말했던 예언이 다시금 찬탈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김진우는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더 이상 감정에 호소하고 대의로 포장하는 위선을 보이지 않았다.
“예언이 뭐지?”
“지저의 신비가 지저를 아우르듯이 지상에도 지상을 지탱하는 법칙이 있었고, 그 법칙은 우리의 존재를 가납치 아니했으니, 그것이야말로 과거 지저와 지상의 통합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란다.”
결국은 지상의 법칙을 눈속임할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말이었다.
“그게 나, 아니, 지저에서 나고 자란 지저인들이란 말이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 모두가 가능했다면 이렇듯 내가 구태의연하게 너를 설득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
“왜, 하필 나지?”
예언의 대상이 오직 자신에게만 한정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옛 군주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상인이되 또한 지저에 속해 있는 존재였고, 그런 것이라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통곡의 군주와 야수왕, 캐서린이 있었다.
“그들의 그릇은 너무 작고 보잘것없단다. 비록 군주의 권능을 깨닫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들이 품을 수 있는 최대한이니까.”
“지룡이고 방랑이고 뭐고 간에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내 위장이 다른 이들보다 크니 그나마 쓸 만하다는 말 같은데.”
“네 표현은 지나치게 투박하고 과격하지만 핵심을 비껴가는 법이 없구나.”
김진우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핀잔을 무시했다.
“그럼 이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먼저 위시 스톤을 손에 넣으려무나. 그리하면 저절로 알게 될 거란다.”
“태평하네. 나는 조금도 그 망상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말이지.”
배덕의 군주는 웃었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모든 의문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를 믿어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날 터, 그리고 그 때는 네 생각보다 금방 다가 올 거란다.”
“하나만 더 묻지.”
김진우는 여전히 마뜩잖은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며 물었다.
“왜 하필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거지? 어차피 속 시원하게 말해줄 것도 아니면서. 과거야 어찌 됐건 간에 우리가 같이 옛날이야기 하면서 하하호호 할 사이도 아니잖아?”
“나를 원망하는 거니?”
무미건조한 얼굴에 떠오른 온기가 신기루처럼 허망하기만 했다. 왜 그때는 저 미소 뒤에 감춰진 공허함을 몰랐던 것인지 새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그는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 또한 너와 같단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껄여댔다.
“내가 그 당시에 너에게 보였던 애정은 거짓이 아니었단다. 나는 너를 진정으로 아꼈고, 그때만큼은 진실로 연민했단다.”
“이제 와서 같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
뻔뻔함에 그는 이를 갈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미안하지 않구나.”
건조한 얼굴만큼이나 메마른 음성이었다.
“만약 내가 인간이었다면, 아니, 차라리 지저의 귀족이었다면, 지금의 너를 보며 조금은 불편했을까.”
그녀는 텅 빈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그 이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혼자였고, 또 너무도 오래 홀로 타락의 시절을 버텨야 했단다.”
그녀가 잃어버린 이름은 자애, 진실을 알기 전 그가 생각했던 소희라는 소녀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거야. 지금의 나는 너를 보며 조금도 심장이 뛰지 않는단다.”
예전의 그였다면 실로 피가 거꾸로 솟구칠 만큼 뻔뻔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망을 토해내는 대신 차갑게 대꾸했다.
“핑계 대지 마.”
그는 그녀의 메마른 눈만큼이나 건조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 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 같지도 않은 넋두리는 집어치워. 너 때문에 죽어간 수많은 던전 베이비가 울고, 귀족들이 울어. 넌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은 존재였을 뿐이야.”
그의 음성에는 한 치의 미혹도 느껴지지 않는 냉담함이 있었다.
“하나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런 그를 보며 그녀가 웃어 보였다.
“언젠가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그때 너는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겠지.”
“헛소리하지 마. 난 너처럼…….”
“부정하지 말렴.”
그녀는 떼쓰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네 입으로 얘기했듯이 군주란 원래 그런 존재니까.”
그의 음성만큼이나 그녀의 목소리 역시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는 왠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아직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어.”
김진우는 조금 궁색하지만 말을 돌렸고, 그녀는 구태여 그의 궁색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 내 앞을 막아선 거지?”
외눈박이 군주가 말했던 대로라면 심층에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배덕의 군주는 그가 심층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도 공교로웠다.
“그저 우선순위를 말해주려 했던 것뿐이란다.”
“마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가 이곳에 온 건, 아마도 외눈박이 군주가 입을 나불댄 탓이겠지. 예전부터 그는 수다쟁이였단다. 그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눈 하나를 잃고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거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외눈박이 군주가 백오를 통해 남긴 전언 때문에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돌아가렴. 너는 아직 지저수(地底樹)와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단다.”
“지저수?”
난생처음 듣는 이름에 그가 눈살을 찌푸리니 그녀가 짐짓 염려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역시 전승이 끊긴 것은 파수꾼의 의무뿐이 아니었구나.”
그녀는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는 투로 웃어 보였다.
“파수꾼이 지키는 것은 지저가 아니란다.”
미미르는 늘 말했다, 파수꾼이야말로 지저의 진정한 수호자라고. 그런데 지금 찬탈자는 또 그게 진실이 아니란다.
“음.”
왠지 모르게 간과할 수 없는 그 울림에 그가 낮게 침음을 내뱉으니, 그녀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들이 수호하는 것은 지저와 지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연결 고리이자, 이 어두운 세계 전체를 관장하는 신비의 집행자, 지저수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