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97)
던전 견문록-297화(297/319)
# 297
던전 견문록
제 298 화
미궁 밖으로 나선 김진우를 반긴 것은 사방을 포위하다시피 에워싼 대군이었다. 기기묘묘한 생김새의 짐승들과 거인들이 내뿜는 노린내가 한참 떨어진 곳까지 가득 차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군.”
먼발치에 보이는 낯익은 얼굴, 야수왕과 천장거인 군주를 본 순간, 그는 이들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일을 벌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묠니르는?”
그의 질문에 모리건이 곧장 대답해 왔다.
“아슬아슬하게 사거리가 닿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저들을 어찌해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따로 쓸모가 있을까, 천장거인 군주를 살려둔 것이 화근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묠니르에게 집중 포격을 당했던 저 교활한 거인들의 왕은 교묘할 정도로 발홀의 방어 설비의 사정거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저들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 이상 이쪽에서 먼저 손을 쓸 방법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상하군요. 수는 저들이 많지만 이겨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요.”
도미니크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거리를 잡았다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저들도 결국 묠니르의 사정거리 내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묠니르는 이 정도의 병력 차 정도는 가뿐히 만회할 만한 저력이 있는 결전 병기였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하이로드들이 이렇듯 무모한 싸움을 걸어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물며 천장거인 군주는 이미 한 번 그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겪지 않았던가. 지금에 와서야 그 일방적인 싸움이 어느 정도는 의도되었음을 알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한들 힘의 우열이 역전될 가능성은 만무했다.
“안젤라, 저 둘은 내가 맡을 테니, 지금은 자리를 지켜줘.”
김진우는 직감적으로 저들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홀로 하이로드들을 상대하기로 결정 내리고는 안젤라에게 만약을 대비하라 지시했다.
“빤히 의도가 보이지만, 그래도 묻도록 하지. 여기까지 온 용건은?”
김진우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소리치자, 두 하이로드가 움찔 놀라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물러났던 야수왕이 도로 앞으로 나서며 소리 질러 대답했다.
“위시 스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하이로드들이 바라는 건 그가 이제 막 입수한 위시 스톤이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그때는 네가 위시 스톤을 갖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거든.”
어쩐지 하이로드가 셋씩이나 몰려와서 너무나 쉽게 물러난다 싶더니, 지들 딴에는 확인과정이었던 모양이다.
“일부러 져 준 줄도 모르고, 기고만장해서는. 아주 꼴불견이더군.”
이제라도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일까. 코웃음을 치는 천장거인 군주가 우습기만 했다.
“연기력이 좋군. 꼬리 만 개처럼 설설 기는 꼴이 하도 그럴싸해서 정말인 줄 알았지 뭐야.”
피식, 실소를 머금고 내뱉은 한마디에 노골적인 조롱이 담겨 있다. 천장거인 군주가 와락 인상을 찡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너 이 새끼…….”
“그만.”
발끈해서 앞으로 나선 천장거인 군주를 야수왕이 제지했다.
“그리도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다면, 나중에 따로 설욕의 기회를 주도록 하지. 정말 그걸 원하는가?”
냉소적인 한마디에 천장거인 군주의 얼굴이 누르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말과는 달리, 다시 그와 단기 결전을 벌이기에는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내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니까.”
끝까지 한마디를 내뱉어 보지만, 그럴수록 꼬락서니만 우스워질 뿐이었다.
“그럼 쓸데없이 나서지 마라. 괜히 그를 자극해서 우리에게 좋을 게 없다.”
냉철한 야수왕의 말에 결국 천장거인 군주가 입을 다물고는 뒤로 물러섰다.
“긴말하지 않겠다. 위시 스톤을 우리에게 넘겨라.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도 굳이 너와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야수왕이 대충 상황이 정리된 듯싶자 다시 한 번 용건을 밝혔다.
“그렇게 원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네놈들이 위시 스톤을 찾지 그랬나.”
“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솔직히 말하면 너와 적대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만남에서 보였던 전향의 의지가 마냥 거짓은 아니었던 것인지, 야수왕은 할 수만 있다면 전투를 피하고 싶은 눈치였다.
“위시 스톤이라. 좋아. 넘기도록 하지.”
“주인님!”
김진우의 말에 소환수들이 기겁을 했다.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군. 이걸로 쓸데없는 상잔을 피할 수 있게 됐어.”
“단.”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야수왕의 말을 단번에 잘라낸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대가?”
“위시 스톤 같은 보물을, 설마 공짜로 받아 갈 생각은 아니었겠지.”
이건 또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야수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말해라. 수용 가능한 범위라면 뭐든 들어주겠다.”
“위시 스톤을 대체할 만한 보물을 내놓는다면, 나도 그대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다.”
야수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은가.”
지저에 단 하나뿐인 염원의 결정체, 그런 보물을 대체할 만한 물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있어.”
조롱당했다는 사실에 인상을 차갑게 굳힌 야수왕을 보며 김진우가 활짝 웃어 보였다.
“하이로드의 목숨 정도라면, 어느 정도 균형이 맞을 텐데.”
그의 말에 식어가던 전장의 분위기가 다시금 험악해졌다.
“어쩔 수 없군.”
야수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을 가득 메운 짐승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거인들 역시 도끼며 철퇴며 온갖 흉악한 병기를 치켜들고 함성을 질렀다.
“모리건, 백오에게 전하라. 지금부터 발홀과 미궁에 접근하는 놈들에게 가차 없이 벼락을 꽂아주라고.”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넌 에인헤리들을 이끌고 묠니르의 화망으로 걸러내지 못한 적을 처리하라.”
“맡겨만 주세요.”
“나가들은 모두 대기한다. 이번 전투는 에인헤리들만으로 치른다.”
과연 에인헤리들만으로 무려 둘씩이나 되는 하이로드의 대군을 상대할 수 있을지, 여기저기서 우려가 새어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한 번 호된 꼴을 당한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돌아왔으니 나름대로 준비한 수가 있을 거야. 나가들이 나서는 건 저들이 숨겨둔 패를 꺼내 든 이후다.”
어렵긴 하겠지만 묠니르의 보조와 대미궁의 방어 설비가 있는 한 일방적으로 밀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김진우의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야수왕과 천장거인 군주는 아무래도 처음부터 자신들이 나설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손짓에 짐승들과 거인들이 쫙, 하고 갈라지더니 그 뒤로 끝도 없는 크리쳐 대군이 밀려들었다.
“공작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수십은 됨 직한 공작과 또 그만큼이나 많은 크리쳐의 군대를 본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묠니르는 분명 막강한 무기였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몇 번 발사하고 나면 반드시 재충전을 해야 했다.
거인과 짐승들이라면 몰라도 적들이 귀족과 군대를 총알받이로 내세웠으니, 지금은 화력의 공백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묠니르의 화력을 낭비하지 말라. 공작들과 그 군대는 발홀과 대미궁의 자체 방어력에 맡기겠다.”
그의 지시가 끝나기 무섭게 적진의 군기가 높게 치솟았다.
“모두 전투 준비!”
적들은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발홀의 성벽은 그들에게 단 한 걸음도 허락하지 않았고, 대미궁 역시 몰려드는 족족 적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여전히 적들의 수는 전혀 줄지 않았다. 마치 복원 이후 살아남은 지저의 모든 귀족이 이곳에 몰려든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대체 뭘 기다리는 거지?”
김진우는 배짱 좋게 달려들었던 이름 모를 공작 몇을 순식간에 짓뭉개고는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보낸 병력이 별 활약을 못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로드들은 시종일관 느긋해 보였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묠니르가 재충전에 들어간 사이에 병력을 쏟아붓고 곧장 승부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단지 넘치는 병력을 밀어 넣고는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결국 공작들의 군대가 아무리 많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대미궁은 수많은 적을 먹어치웠음에도 여전히 굶주린 상태였고, 발홀의 성벽은 귀족들이 넘기에는 너무나도 강건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방어, 지금은 그저 바글바글 몰려드는 적들의 모습에 다소 기가 질릴 뿐이었다.
“뭔가 있어. 지금의 상황을 역전시키고, 전황을 단번에 압도할 만한 뭔가가 있는 게 틀림이 없어.”
“하지만 성벽이 무너지고 대미궁이 한계에 달한다고 해도, 결국 중요한 건 하이로드 간의 승부예요. 그리고 저들이 주인님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멀리서 대기하라고 했더니 손이 근질거렸는지 슬며시 다가온 안젤라가 그의 말에 대꾸했다.
“굳이 제가 나서지 않더라도 저들과 주인님의 격은 좁혀질 수 없어요.”
“그렇다고 저들이 물러날 생각이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야.”
그게 이상했다. 저들은 별 성과도 없이 꾸준히 병력을 밀어 넣고만 있었다. 그 지독스러울 정도로 비효율적인 행동에 그는 머리가 아파왔다.
“설마 막무가내로 달려들다 보면 길이 열릴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안젤라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비록 못난 꼴을 보이기는 했지만 저들도 아수라장을 헤치고 하이로드에 오른 강자들이다. 그렇게 생각 없이 움직였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학살을 얼마나 이어갔을까. 사방에 가득 찬 시체들 탓에 이제 적들은 성과 미궁에 접근하는 것조차 힘겨워 하고 있었다.
“어쩌면 시체로 성을 쌓아 발홀에 오르려는 게 아닐까요?”
얼마나 많았는지 안젤라가 높게 쌓인 시체들의 산을 보며 그리 말했을 정도였다.
“음?”
다시 또 시간이 흐르고 주변에 시체가 더욱 늘어났을 때였다. 가만히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안젤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주인님, 사기(死氣)가!”
그녀의 경고에 김진우의 표정이 변했다.
어느새 변해 버린 전장의 공기가 끈적끈적하게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공작의 병사들은 마치 등을 떠밀린 것처럼 사지로 머리를 들이밀었고, 그대로 살해당했다.
실로 이상한 건 그렇게 죽어 나자빠지는 이들 중에 비명을 지르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약에 취한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다가와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다. 더 이상은 전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적들은 장렬한 전사 대신 이해할 수 없는 자살을 선택했고, 그렇게 죽어버린 이들의 사기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한곳에 뭉쳐 가기 시작했다.
왜 이제야 알아챈 것일까. 이 정도쯤 되면 눈치를 챘어도 진즉에 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안젤라가 경고를 해주기 전까지 기묘하게 돌아가는 전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미 수만이 넘는 소환수들이 전사한 이곳은 그야말로 저승으로 통하는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산 자의 생명이 꺼지고 그 자리에 음습한 한기가 차오르니 사방 온 세상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다. 이런 곳에서 사기의 유동을 빨리 알아채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그나마 안젤라가 반쯤은 죽음에 몸을 걸친 흡혈귀였기에 그 움직임을 민감하게 잡아낸 것이었다.
“이 기운,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김진우가 적진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천장거인 군주도 야수왕도 아니었다.
“캐서린!”
언제 나타난 것인지 적진 한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여인이 그를 보며 음험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