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99)
던전 견문록-299화(299/319)
# 299
던전 견문록
제 300 화
무시당한 듯한 기분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김진우는 차분히 캐서린의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미안, 미안. 갑자기 웃음이 나와서.”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연 그녀는 말로는 사과를 하면서도 여전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뭐가 그렇게 우습지?”
결국 참지 못한 그가 그리 물으니, 캐서린이 가늘게 눈을 휘어 올리며 대답했다.
“아직도 지상과 지저의 통합이니 뭐니를 말하는 네가 너무 웃겨서.”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현재 지저에 주어진 가장 큰 과제가 지상과 지저의 통합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녀는 마치 그런 것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혹시라도 허세인가 싶어 가만히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표정 어디에도 과장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구나, 넌.”
“알아듣게 말해.”
천장거인 군주도 야수왕의 표정도 역시 캐서린과 다르지 않았다. 마치 자신만이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에 김진우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를 압박했다.
“글쎄, 설명해 주기 싫은데?”
이제껏 고분고분 질문에 답변해 주던 통곡의 군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본색을 드러낸 그녀는 그에게 정보를 알려줄 생각이 그다지 없어 보였다.
“그보다 넌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생각해야 하지 않아?”
그를 적대하는 하이로드가 무려 셋이나 모여 있었다. 이쪽에 안젤라가 있기는 하지만 정작 가장 강력한 무기인 탐욕의 권능이 봉인되다시피 한 그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지라 캐서린은 시종일관 느긋한 얼굴이었다.
“네가 걱정해 주는 것처럼 상황이 마냥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해?”
싱글벙글 웃고 있는 캐서린이었지만, 음험하게 빛나는 눈빛은 섬뜩하기만 했다. 그는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상대가 준비한 수가 여기서 끝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너는 밤이 육신을 차지할까 봐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할 테고, 네 사랑스러운 흡혈귀도 지킬 게 있으니 적극적으로 너를 돕지는 못하겠지. 그에 반해 우리는 아직 여력이 있어. 왠지 악당의 전형적인 대사 같지만, 우린 아직 진짜 힘을 드러내지 않았거든.”
죽고 죽이는 일이 일상인 이 세계에서는 숨통을 끊어낼 자신이 서기 전까지 섣불리 독니를 드러내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니만큼 천장거인 군주와 야수왕이 여력을 남겨두고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다는 말이 마냥 거짓은 아니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웃었다.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그의 표정은 절대로 위기에 몰린 사람 같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있어 보였다.
“웃어? 지금 상황에서?”
그래서인지 내내 느긋하기만 했던 캐서린의 표정에 금이 가버렸다. 그녀는 웃음기가 싹 걷힌 건조한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멀리 보고 오래 준비했군. 진심으로 감탄했어.”
도대체 얼마나 오래전부터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던 것일까. 복원 이후 살아남은 거의 모든 귀족이 몰려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대군을 준비한 치밀함에, 자신에게 접근해 환심을 사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의 저변에 깔린 교활함에 진정으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하이로드가 대단한 건 그 힘이 아니라,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능력인 모양이야.”
빈말이 아니었다. 배덕의 군주가 그러했듯이 이들 역시 남의 뒤통수를 치는 데만큼은 따라올 자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각을 머리에 담고 사는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를 쉬이 믿을 수가 없었으니, 하이로드란 작자들은 하나같이 진실보다 거짓이 많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너희들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어.”
통곡의 군주와 다른 하이로드들이 준비한 함정이 음험하기만 했지만 그럴수록 김진우의 입가에 매달린 비틀림이 더욱 짙어져 갔다.
그 바람에 도리어 불안해진 것은 캐서린을 비롯한 다른 하이로드들 쪽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오르고 야수왕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천장거인 군주는 이미 한 번 호된 꼴을 당했던 탓인지, 눈에 띄게 불안한 안색이었다.
“우리가 뭘 잊고 있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천장거인 군주가 신경질적으로 그를 몰아세웠다. 하지만 그는 바로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지 느긋하게 하이로드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함정에 빠트렸다고 기고만장해 있던 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진정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다시 웃고 말았다.
“시간 끌 것 없이, 원래 계획대로 하는 게 좋겠어. 예감이 좋지 않아.”
김진우는 눈을 빛냈다. 초조함을 참지 못했는지 다그치는 야수왕의 모습에서 캐서린이 이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탓이다.
“잠깐, 기다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그녀가 한마디를 내뱉자 야수왕이 불만에 찬 얼굴로나마 수긍하고 뒤로 물러섰다. 다만 예상과 달랐던 것이 있다면 생각보다 그녀의 리더십이 강하게 먹혀들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말해봐. 우리가 뭘 잊고 있지?”
캐서린의 질문에 그가 잔뜩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남을 기만하고 뒤통수를 치는 게 너희 하이로드들의 특기라면 말이야.”
김진우의 시선이 문득 저 너머를 향했다.
“나 역시 하이로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 않겠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멀리서부터 사나운 포효와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꽤나 먼 곳에서 나는 것인지 실체는 보이지도 않는데 벌써부터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엄청난 소음이었다.
“이, 이건!”
야수왕이 길게 빠진 늑대의 코를 킁킁대더니 비명처럼 외쳤다.
“흉신의 일족이 접근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음습하고 부정한 기운이 뻗쳐 오기 시작했다.
지저에 다시없을 정도로 불길한 기운은 하이로드들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흉신의 일족이 내뿜는 악취였다.
크아아아아악!
하이로드들이 미처 상황을 다 파악하기도 전에 그들이 애지중지 후방으로 물려두었던 정예들이 비명을 질렀다.
단단하던 대열에 금이 가고 물이 스며들 듯 검은 군대가 그 자리를 채웠다.
처음에는 그저 흉악할 뿐인 작은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나 싶더니, 이내 왜 이제야 발견했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괴수들이 나타났다.
“너, 설마!”
흉신들의 등장에 캐서린이 김진우를 돌아보았다.
“니들 특기가 뒤통수치기라면, 내 특기는 판을 뒤엎는 거거든.”
그야말로 난장판, 갑작스레 후방에서 난입한 흉신의 공격을 대비하지 못한 하이로드의 군대들은 우왕좌왕하며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가봐야 하지 않겠어? 아무리 정예들이라지만, 저 많은 흉신을 상대로 군주의 도움도 없이 이길 수는 없을 텐데.”
상황은 완벽할 정도로 역전되었다. 이제 위기에 몰린 쪽은 캐서린과 하이로드들이었다. 어느새 까맣게 몰려들어 정예 소환수들을 짓밟아대는 흉신의 일족을 보며 그들은 이를 갈았다.
“흉신을 끌어들이다니, 네놈이 정말 미친 게로구나!”
야수왕의 성난 포효에 김진우는 한쪽 귀를 후벼 파는 시늉을 해 보였다.
“네놈들이 귀족을 끌어들였듯이 나 역시 쓸 만한 조력자를 찾았을 뿐이야.”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캐서린이 꽁꽁 얼어붙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귀족과 흉신은 달라. 귀족들은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통제 가능한 말이야. 하지만 흉신들은 그저 파괴하고 먹어치울 뿐인 괴물이다. 저들이 휩쓸고 지나간 지저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야수왕과 천장거인 군주가 잠시 눈치를 보다 빠져나갔다. 그들은 곧장 자신의 소환수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흉신들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통곡의 군주만큼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질타에 김진우는 도리어 되물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해?”
캐서린은 갑갑한지 가슴을 쳐 가며 그를 몰아세웠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했다.
“이해하지 못한 모양인데, 흉신들을 막지 못하면 지저는 말라죽고 만…….”
“아니, 너야말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네.”
김진우가 그녀의 말허리를 싹둑 쳐 냈다.
“지저 따위 말라 죽든 말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
“네가 그토록이나 애지중지하는 나가들도, 대미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야?”
그는 마치 대단한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그렇지만 정작 엉뚱한 소리를 해댔을 뿐이다.
“이제 알겠네. 네가 뭘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뭐?”
“나는 그냥 난장판을 만들기 위해 흉신들을 유인한 게 아니야.”
아무래도 캐서린은 그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그들을 전장으로 ‘유인’한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저들은 냄새를 맡고 달려든 아귀가 아니라.”
떼거리로 몰려든 흉신들의 난동은 쉽사리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하이로드들의 피해가 쌓여갔다.
야수왕과 천장거인 군주가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아섰지만 워낙에 수가 많으니 그저 무너져 내리는 댐의 일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내 초대를 받고 온 손님이다.”
급박한 상황에 이제는 완전히 여유를 잃어버린 캐서린이 이를 갈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뭐가 말이 안 되지? 그들은 나와 거래를 하기로 했고, 그리고 약속대로 나를 찾아왔을 뿐이야.”
누더기 괴물들은 과연 끔찍할 정도로 억척스러웠다. 하지만 흉신들은 그보다 몇 배는 집요했다. 그들은 이 커다란 괴물이 재생되면 다시 찢어내고 그 살점을 갈기갈기 조각냈다.
오히려 뜯어도 뜯어도 줄어들지 않는 고깃덩어리라도 발견한 승냥이들처럼 더욱 신이 나서 날뛰어댔다.
“저들은 거래할 수 있는 상대가 아냐.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파괴뿐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우리와 함께 저들을 막자. 우리 문제는 그 뒤에 다시 해결해도 늦지 않아.”
얼마나 다급한지 그녀의 제안은 형편없다 못해 끔찍할 지경이었다.
“어째서? 저들은 약속대로 내 부름에 응했어. 이제는 내가 저들과의 약속을 지킬 차례야.”
김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 한참 흉신들과 힘겨루기를 하던 천장거인 군주가 겹쳐졌다.
“아, 안 돼!”
캐서린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히죽 웃어 보이며 손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발홀의 첨탑들이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쾅!
굉음이 울려 퍼지고, 침묵했던 묠니르가 다시 한 번 울부짖었다.
“크악!”
십수 개의 벼락에 갑작스레 직격당한 천장거인 군주가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단단한 거인왕의 육신은 일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이겨냈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몸이 경직되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흉신들은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먹어치워라, 흉신들아.”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붉은 거인이 어디선가 나타나 천장거인 군주를 찍어 눌렀고, 아룡 십수 마리가 달려들어 사지를 물고 턱을 아그작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내가 그대들에게 약속했던, 첫 제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