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00)
던전 견문록-300화(300/319)
# 300
던전 견문록
제 301 화
천장거인 군주는 이내 흉신들에게 파묻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저 억센 거인의 숨통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이 정도로 끝이 날 거라면 하이로드의 위엄이 무색해지고 만다.
김진우는 흉신들이 천장거인 군주를 제압한 것 정도로 만족을 하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음.”
그런데 한창 분투 중이던 야수왕의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끄응. 여전히 상황 판단이 빠른 놈이군.”
아무래도 상황이 불리해지자 발 빠르게 몸을 빼낸 모양이었다. 그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 많던 야수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난 뒤였다.
운 나쁘게 뒤처진 몇몇만이 절망적인 전장에서 좌충우돌 용을 써댈 뿐이었다.
아쉬웠지만 김진우는 이내 야수왕에 대한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전장을 정리해야 할 때였다.
-안젤라, 적당히 상황을 봐서 캐서린의 뒤를 잡아줘.
방금 전에야 수적으로 열세였던지라, 혹시 모를 빈집털이를 경계해야 했지만 천장거인 군주가 제압되고 야수왕이 도망친 지금 더 는 꺼릴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안젤라에게 은밀히 지시를 내렸고,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캐서린의 뒤에서 나타나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큭!”
볼품없이 내지른 비명, 하얗게 노출된 목에 안젤라가 고개를 파묻었다.
“움직이지 마. 숨도 조심해서 쉬는 게 좋을 거야. 혹시라도 작은 상처라도 났다간 내가 참지 못할 거 같거든.”
하이로드의 생혈을 앞에 두고 잔뜩 들뜬 흡혈귀의 경고에 캐서린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녀 스스로도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음을 깨달았는지 더 이상 저항의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만약 준비한 패가 있다면, 지금 꺼내는 게 좋지 않을까? 더 이상은 기회가 없을 테니까.”
김진우의 말에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그들이 준비한 패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천장거인 군주와 야수왕이 전부 건재하다면 몰라도 그녀 혼자서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무리였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캐서린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다 잡은 물고기라도 방심하기에는 상대가 만만찮게 음흉하다. 숨통을 끊는 그 순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그를 보며 캐서린이 마침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졌어, 완벽하게.”
하지만 말과는 달리 어떻게 보아도 패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승리를 놓쳐 버린 패장의 음울한 눈빛도, 승자의 처분을 기다리는 조급함과 애처로움도, 그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극렬하게 저항하던 누더기 괴물들이 더 이상의 재생을 포기하고, 흉신들의 공격에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사납게 턱을 아그작거리던 흉신은 당연히 되살아날 거라 생각했던 괴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소환자가 저항을 포기한 마당에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흉신들은 마지막 단말마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기까지 누더기 괴물들의 잔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김진우는 위기를 극복하고 또 한 번의 승리를 일구어낼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으레 그래 왔듯이 전장 정리는 적의 사체를 분류하여 쓸 만한 것을 거두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야! 이런 재료들이라면 사자의 군대가 아니라, 사신(死神)의 군대라도 만들 수 있겠습니다!”
가장 신이 난 것은 발리셔스를 비롯한 나가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전사한 거인과 야수들의 시체를 보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아무래도 강인한 고대 소환수들의 시체를 보고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기쁨은 길지 않았다.
“어…….”
발려셔스는 자신이 막 옮기려던 시체를 지그시 바라보는 아룡과 눈이 마주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크르르르.
걸쭉한 침을 흘려대며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듯 목을 울려대는 아룡의 모습이 끔찍하기만 했다.
하기야 하나만 나타나도 어지간한 지저의 미궁 따위는 하루도 되지 않아 소멸시킬 정도로 강력한 괴수가 그들이었다.
그런 흉신의 적개심 가득한 시선과 마주쳤으니, 발리셔스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만. 그는 나의 수하다. 네놈의 먹이가 아니야.”
너무도 큰 공포에 의식이 통째로 날아갔었던 것일까. 발리셔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악취 나는 아룡의 주둥이가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만약 주인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인정사정없이 그를 물어뜯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발리셔스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가, 감사합니다, 왕이시여.”
“고마운 줄 알면 그 손부터 놓는 게 어떤가.”
김진우의 말에 발리셔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나마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런 그의 손은 언제 잡아챈 것인지 사체의 일부를 힘주어 움켜쥐고 있었다.
아무래도 흉신의 공포마저도 연구에 미친 나가 마법사의 기질을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시체는 포기한다. 그게 내가 그들에게 약속했던 대가다.”
몸을 덜덜 떨면서도 끝까지 연구 재료를 포기하지 않던 발리셔스가 뒤늦게 손을 털어냈다. 겁에 질린 와중에도 푸른 눈에 어린 탐욕은 여전했으니, 은근슬쩍 전장 정리에 나선 나가 마법사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런 이들을 보며 김진우가 혀를 찼다. 하지만 정작 나가 마법사들을 나무라는 그의 눈빛도 그들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셈인가!]흉신 중의 흉신, 붉은 거인이 사납게 외쳤다.
“아니, 약속은 지켜.”
[그렇다면 지금 그대의 행동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붉은 거인의 항의에 그가 힐긋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사, 살려…….”
어느새 거인화가 풀린 천장거인 군주가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그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약속을 잘 떠올려 봐.”
그는 벌써 두 번째로 보는 천장거인 군주의 비참한 모습에 피식, 실소하며 붉은 거인에게 말했다.
[분명 그대를 돕는 대가로 죽은 하이로드의 육신을 우리에게 넘기기로…….]거기까지 말한 붉은 거인이 그제야 김진우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맞아. 내가 그대들에게 약속했던 것은 ‘죽은 하이로드’의 시체였지, 살아 있는 하이로드의 육신이 아니었어.”
[그런 말장난을!]발끈한 붉은 거인이 화를 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게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숨통을 끊어놓지 그랬나. 난 분명 그대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줬어.”
[인정할 수 없다!]“그대가 인정하든 말든 난 분명 약속을 지켰어. 이 수많은 전리품 중에서 내가 챙길 건 고작 이 멍청한 놈 하나라고.”
온갖 이력을 지닌 귀족들의 무구와 수많은 전사자의 시신을 전부 흉신들에게 양도했다. 물론 살아남은 하나가 나머지 전리품들을 압도할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어차피 그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우리를 기만하고도 그대가 멀쩡할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쩌렁쩌렁 머리를 울리는 사념에 분노가 가득했다. 하지만 김진우는 태연하기만 했다. 도리어 붉은 거인을 협박했다.
“멀쩡하지 않으면?”
그가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낮게 가라앉아 있던 기운이 넘실넘실 차올라 얼핏 검은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그의 눈가에 안광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착각하지 마. 내가 상대하기 곤란한 건 하이로드들뿐이야. 그리고 그대들은 하이로드가 아니지.”
밤의 각성을 저어하지 않았다면, 이렇듯 어렵게 일을 해결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악룡의 태를 뒤집어쓰고 잠시 날뛰는 것만으로도 모든 상황이 끝났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그에게 밤이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흉신들 따위는 아무리 수가 많아도 그저 상대하기 번거로운 존재에 불과했다.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처리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교활한 협잡꾼의 기운을 탐하더니, 그대 역시 물들고 말았구나!]붉은 거인이 애써 분노를 잠재우며 한탄했다. 이미 그의 힘을 지켜본바 여기서 싸움을 걸어봐야 손해가 클 거라 생각한 기색이었다.
“그러네. 나도 몰랐는데 오늘 알았어, 나 역시 저들과 같은 하이로드라는 사실을.”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뻔뻔하게 지껄여대는 모습에 붉은 거인이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들은 돌아가겠다. 앞으로 우리 일족이 그대를 도울 일은 없을…….]“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마. 나도 그대들을 우롱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지금에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지 붉은 거인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떠올랐다.
“일단은 내가 쓸 일이 있으니 가져가지만, 모든 볼일이 끝나면 그대들이 그토록이나 원하던 것을 주도록 하지.”
이번에 그의 말을 듣고 놀란 것은 천장거인 군주였다. 격 높은 군주가 마치 정육점의 고기마냥 흥정의 대상 취급을 받는 것에 분노할 틈도 없었다.
그대로 있다간 저 무지막지한 괴물들에게 뼈도 남기지 못하고 잡아먹힐 판이니 표정에 떠오른 다급함 그 어디에도 거짓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 이번에야말로 그대에게 협조하겠…….”
김진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위시 스톤을 노린 이유가 뭔지를 말해주실까.”
그의 질문에 천장거인 군주가 잠시 망설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위시 스톤은…….”
“닥쳐! 말하지 마!”
이제껏 그가 흉신들을 다루는 솜씨를 보며 작게 감탄을 토해내고 있던 캐서린이 경기 하듯 말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제 목숨을 두고 저울질을 마친 천장거인 군주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지저와 지상을 잇는 매개체가 아니다.”
“자세히 말해봐.”
안젤라가 캐서린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 찍어 누르는 것을 한눈에 담으며 김진우가 천장거인 군주를 재촉했다.
“지저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지저의 신비, 지저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것도 지저의 신비, 그리고 종족의 탄생필멸을 주관하는 것도 지저의 신비. 그야말로 모든 것에 지저의 신비가 관여한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이 정도까지 듣고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바보가 분명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김진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설마 위시 스톤이…….”
“맞아. 위시 스톤만 있으면 그 신비를 발아래 두는 것도 꿈이 아니지.”
단순히 지저와 지상을 통합하는 열쇠가 아닌가 했던 위시 스톤은 그의 생각 이상으로 훨씬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는 뜻밖의 사실에 경악했고, 또 한편으로는 납득했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지 않고서야 지저와 지상의 통합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의 매개체가 될 리 없었다.
“지저의 신비를 지배하는 자가 지저의 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