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01)
던전 견문록-301화(301/319)
# 301
던전 견문록
제 302 화
105. 지저의 왕좌
“지저 가장 깊은 곳, 그곳에서 그대가 약속을 지킬 그 때를 기다리겠노라.”
흉신 중의 흉신, 아룡과 거인들의 우두머리인 붉은 거인은 훗날을 기약하며 자리를 떴다.
수많은 흉신 역시 그 뒤를 따라 지저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원했던 하이로드의 육신을 얻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의 축제에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하기야 그들이 먹어치운 소환수들의 시신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했으리라.
그렇게 흉신들이 떠나고 남은 것은 천장거인 군주와 통곡의 군주뿐이었다.
강대했던 군세는 묠니르와 흉신들에게 몰살당해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한때 지저의 왕이 되기를 꿈꾸던 군주들의 신세는 비참하게 되었다.
[난쟁이의 쇠사슬.] [처음에는 기울어 가는 지저의 달과 태양을 억지로 고정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 쇠사슬은 불행하게도 시기를 맞추지 못했고, 결국은 현재에 이르러 죄수를 속박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난쟁이의 쇠사슬이 새로운 죄수, 천장거인 군주를 속박합니다.] [천장거인 군주의 거인화 능력이 봉인되었습니다. 억지로 거인화를 시도할 경우 촘촘하게 조여진 사슬에 의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될 것입니다.] [천장거인 군주가 지닌 대부분의 능력이 봉인되었습니다.] [난쟁이의 쇠사슬은 주인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그 매듭을 풀지 않을 것입니다.]천장거인 군주는 영원의 창고에서 미리 꺼내두었던 난쟁이의 쇠사슬에 속박되어 발홀의 성벽에 내걸렸다.
통곡의 군주 역시 그 신세가 그다지 다르지 않았지만, 그녀의 능력은 사자와 망령을 다루고 죽음 너머의 세상을 끌어들이는 데 있었다.
그러니만큼 난쟁이의 쇠사슬뿐 아니라 추가로 이런저런 조치가 취해졌다.
세세한 조치야 달랐지만, 때 맞지 않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처럼 발홀의 성벽에 내걸린 건 그녀나 천장거인 군주나 마찬가지였다.
[강대한 지저의 지배자 중 하나인 하이로드를 장식품처럼 내건 당신의 위엄에 지저 전체가 고개를 숙입니다.] [이 강대하고 인정 없는 군주에게 적의를 보일 이는 더 이상 지저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이로드들의 꾐에 넘어가 당신에게 적개심을 품었던 지저의 공작과 귀족들이 더 이상 당신을 적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그렇게 많은 귀족이 지난 전투로 전사했음에도 아직도 잔당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김진우는 새삼 흉신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전투가 힘겨웠을지를 떠올리고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저의 수많은 귀족이 당신을 찬탈자에 이어 또 하나의 왕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으로 당신이 지저의 왕이 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게 된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앞으로 지저 전체가 당신의 행보에 일희일비하고 귀추를 주목할 것입니다.]거창한 설명에 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메시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저에 다시없을 당신이 보인 위엄은 인정과 아량보다는 끝내 적들을 말살하고야 마는 집요함과 무자비함에 있습니다. 그런 당신을 ‘폭군(暴君)’이라는 말보다 더 잘 설명해 주는 단어는 없습니다.] [폭군의 이름이 전 지저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광폭하고 자비 없는 지배자의 위엄은 가장 심지가 곧은 귀족일지라도 불굴의 의지를 지킬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백작 이하의 귀족들에게만 효과가 있었던 기존의 폭군 호칭이 성장하여 공작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폭군의 고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귀족들은 당신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적대했던 이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더없이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나마 지저 전체에 소집령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내건 사자 앞에 자신의 군대를 아낄 간 큰 귀족은 없습니다.] [사나운 군주의 위엄에 굴종한 이들의 군대, 지저군(地底軍)의 소집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공포에 짓눌려 소집된 지저군은 강력한 군대지만, 결속력과 유대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오래도록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지저군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또한 아무리 공포스러운 지배자라고 해도 무한정 자신의 군대를 내줄 귀족은 많지 않습니다.] [지저군의 소집 능력은 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신중히 생각하여 가장 필요한 때 소집령을 내리는 것이 현명한 행동일 것입니다.]이름뿐이던 폭군의 호칭이 그에 걸맞은 고유 능력을 얻었다. 김진우는 단 한 번뿐이지만 지저 전체의 군대를 모을 수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능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바로 직전의 전투를 통해서 아무리 하나하나가 강력한 요새이더라도 수적 열세 앞에서는 파탄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현명하게 대처하여 승리로 끝을 장식하기는 했지만, 언젠가 오늘과 같은 일이 왔을 때 또다시 흉신들이 자신의 편을 들 거란 법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저군을 소집할 수 있는 능력은 그에게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힘이었다.
“재미있게 됐네.”
왠지 모르게 이 능력을 사용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
수많은 사절단이 발홀과 대미궁을 찾았다. 그들은 지저에 퍼져 나간 폭군의 이름 앞에 벌벌 떨었고, 앞다투어 우호를 다지기를 원했다.
처음에는 다소 빳빳하게 치켜들었던 귀족들의 고개가 숙여지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발홀의 성벽에 내걸린 천장거인 군주의 비참한 모습에 하얗게 질렸고, 금세 태도를 고쳐먹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힘이나마 원하신다면 언제든 달려오겠습니다!”
“그 드높은 위엄에 감히 고개를 들 자 없으니, 지저에 진정한 왕이 탄생했도다!”
“이제야 겨우 섬길 분을 찾았으니,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귀족들은 자존심이 강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허리를 굽힐 유연함이 있었고, 지금이 딱 그때라 판단한 듯했다.
그들은 신하를 자칭하며 굴종을 자처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귀족이 다 그들과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발 빠르게 발홀과 대미궁을 찾은 이들은 대부분이 백작급 이하의 귀족이었고, 공작들 중에 먼저 이곳을 찾은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아무래도 강대한 힘만큼이나 교활한 이들이 잠시 저울질할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저 심층 표면에 거주하는 백작들과는 달리 그들은 진정한 심층의 주민이라 할 수 있었고, 그만큼이나 그곳의 기류에 민감했다.
공작들은 이 무자비한 폭군이 무언가 큰일을 벌일 거란 사실을 진즉부터 눈치채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눈치였다.
김진우는 공작들의 미진한 반응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때가 되면 그들도 선택을 해야 할 테고, 그 시기가 바로 지척까지 와 있었다. 그때까지는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했다.
“끄응. 지금만큼 내 힘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군.”
김진우는 안젤라가 손에 쥔 위시 스톤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손이 닿기도 전에 벌컥 일어나 식탐을 부리는 탐욕의 권능 탓에 정작 예언에서까지 위시 스톤의 주인이라 칭해졌던 그에게는 저 강대한 돌을 제대로 살펴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옛 군주들의 예언이 틀리지는 않았으니, 어떻게든 방법이 나올 거예요. 어쩌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도미니크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지저의 보물이라는 게 얻고 싶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멀리하고 싶다고 해서 멀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자신을 습격했던 세 하이로드만 해도 그토록이나 간절하게 위시 스톤의 주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결국은 헛물만 켜고 말았다.
“그리고 그 때는 그다지 멀지 않았겠지.”
그는 조바심을 버렸다. 비록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리였지만, 가장 중요한 위시 스톤을 손에 얻었다.
만약 다른 이들이 뭔가 노리는 것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여유를 찾고 나니 외눈박이 군주가 대체 진리의 왕좌를 통해 무엇을 보았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분명 뭔가를 보기는 했을 텐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군.”
본 게 있으니 백오에게 심층으로 향하라는 말을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게 왠지 중요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진리의 왕좌를 사용하겠다.”
도미니크를 비롯한 소환수들이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그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보탄은 진리의 왕좌를 사용한 대가로 눈 하나를 바쳤다.”
이제는 외눈박이 이전에 어떤 이름을 지녔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보탄을 떠올린 그가 잠시 왕좌를 바라보았다.
진리의 왕좌를 통해 숨겨진 진실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일이었지만, 정작 자신이 불구가 되어서야 의미가 퇴색되고 만다.
한 눈으로도 위명을 떨쳤던 보탄은 태생이 강대한 힘을 지닌 거인족이었고, 자신은 보잘것없는 인간이었다.
만약 눈이나 팔, 또는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잃는다면 타격을 만회하기가 쉽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나까지 그러란 법은 없겠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진우의 표정에는 그다지 거리낌이 없었다. 그게 못내 이상했는지 안젤라가 그 이유를 물었다.
“내가 알기로 보탄이 이 성을 얻었을 때, 그는 빈털터리였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뜬금없는 그의 말에 소환수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집중했다.
“그 말은 그가 가진 것이 제 몸뚱아리밖에 없었단 뜻이야.”
사고의 공유를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본 도미니크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박수를 쳤다.
“과연 주인님!”
다른 소환수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나도 좀 알아듣게 설명해 주면 안 될까요.”
안젤라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묻자 김진우가 되물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뜬 안젤라를 보며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진리의 왕좌에 바쳐야 할 대가가 꼭 내 신체의 일부일 필요는 없단 말이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는지 안젤라를 비롯한 소환수들이 감탄했다.
“만약 소중한 것이 가치를 말하는 거라면, 나에게는 가치 있는 것들이 차고도 넘칠 정도로 많지.”
이제껏 수많은 귀족을 꺾고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왔다. 그리고 지금의 그는 하이로드들마저 전리품으로 거두어들인 진정한 승자였다. 그런 그에게는 진리의 왕좌가 만족할 만한 제물이 몇 개나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가 직전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두 군주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