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02)
던전 견문록-302화(302/319)
# 302
던전 견문록
제 303 화
강제로 끌려온 천장거인 군주와 통곡의 군주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굶주린 독사처럼 온몸을 옭아맨 난쟁이의 쇠사슬도 쇠사슬이었지만, 그간 발홀의 성벽에 걸려 온갖 귀족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으니 그 모습이 피폐하기만 했다.
쩔그렁, 쩔그렁.
듣기 거북한 쇳소리가 멈추고 마침내 김진우의 앞에 내던져진 두 군주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비록 탁하게 바랬지만 둘의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 과연 심층에서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정점에 오른 자들다웠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오늘 둘 중 하나는 진리의 왕좌에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그는 그 대가로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진실의 자락 하나를 들춰낼 수 있겠지만, 저들은 얻는 게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왕좌는 저들의 일부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대가로 받아들일지도 모르지.
한때 왕을 꿈꿨고, 지저의 정점에 그 어느 누구보다 가까이 섰던 이들의 최후치고는 비참했지만 그는 동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기만했던 이들을 동정할 정도로 무르지 않았던 탓이다.
그래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자연스레 집행자가 교수대에 오른 사형수를 바라보듯 바싹 메말라 있었다.
“그대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두 군주는 성급하게 나서는 대신 가만히 눈을 빛내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를 위해 제물이 되어라.”
제물이라는 말에 두 군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이어진 김진우의 설명에 까맣게 죽었던 눈동자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제물이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지?”
먼저 입을 연 것은 통곡의 군주, 캐서린이었다.
“진리의 왕좌에 바칠 대가가 필요하다. 나는 외눈박이 군주처럼 내 몸의 일부를 바치고 싶지 않거든.”
짧은 설명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캐서린의 질문에 그가 차갑게 대꾸했다.
“만약 그게 싫다면 흉신들의 먹이가 되는 수밖에.”
흉신들이 하이로드의 육신을 얼마나 탐내는지를 떠올린 두 군주가 사색이 되었다.
“하, 하겠어.”
이번에 먼저 나선 것은 천장거인 군주였다. 뒤를 이어 캐서린 역시 기꺼이 제물이 되겠노라 말했다. 김진우는 그제야 냉소를 거두고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아, 깜빡하고 말해주지 않은 게 있다.”
제물이고 뭐고 다시 자유를 얻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는 태도로 매달리던 두 군주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내게 필요한 건 한 명뿐이다.”
둘 모두 제물로 바칠 필요는 없었다. 너무 많은 진실은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몸을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단순해질 필요가 있었다. 지금이 딱 그때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안갯속에 가려진 지저에서 딱 한 걸음 내디딜 만큼의 진실뿐이었다.
“그, 그럼 선택받지 못한 하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쩔 수 없이 흉신과의 거래에 쓰는 수밖에. 전부 풀어주기에 그대들은 너무 위험한 자들이거든.”
그의 말에 캐서린과 천장거인 군주가 일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곧장 경쟁하듯 외쳤다.
“내가 제물이 되겠어!”
“너를 위해 제물이 되겠다!”
그 필사적인 외침에 김진우가 짐짓 고민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실상 그의 속내는 자신이 선택받겠다고 악다구니를 써대는 두 군주를 비웃고 있었다.
진리의 왕좌가 어디까지 대가로 요구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운이 좋다면 보탄처럼 눈 하나, 또는 신체의 일부를 받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보다 많은 것을 앗아갈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 존재 자체를 잃을 가능성마저 적지 않았다.
속박된 육신만 아니었다면 드잡이질이라도 했을 법한 두 군주의 다툼에 그는 남모르게 냉소했다.
비참하고, 비참하다.
격 높은 군주들의 추한 모습을 보니 가슴이 짜게 식었다. 그들이 악다구니를 쓰면 쓸수록 추락의 골이 깊어졌고, 골이 깊어질수록 더욱 농도 깊은 증오가 차올랐다.
이들의 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자신이 저런 꼴이 되었을 테니까.
“도미니크, 네가 보기엔 둘 중 누구를 제물로 삼는 게 좋을 거 같아?”
김진우의 질문에 한창 악을 써대던 두 군주가 굳어버렸다.
“머리 아프게 둘 중 하나를 골라내느니, 네가 하라는 대로 하도록 하지.”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하찮은 소환수의 한마디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모멸감을 느끼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유라는 말에 눈이 돌아갔던 자신들의 추태를 뒤늦게 인식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표정을 고치며, 나가 여인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을 계획한 건 통곡의 군주다. 나는 이렇게까지 그대를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고!”
천장거인 군주는 급기야 통곡의 군주를 비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어떤 굴욕이든 마다치 않는 지저의 존재다운 모습이었다.
김진우는 그 모습을 그저 추하다고만 여기지 않았다.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미덕인 이 메마른 세상에서 천장거인 군주는 마땅히 자신이 할 수 있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저들이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패했기 때문에, 자신보다 덜 교활했고 약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제물의 조건은 그대에게 속해야 한다는 것이겠지?”
그에 반해 캐서린은 차분했다. 그녀는 용케도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문제를 짚어냈다.
“맞아. 제물을 바쳤는데 정작 대가가 엉뚱한 이에게 주어지면 곤란하니까.”
“뭐? 그게 무슨 말이지?”
천장거인 군주는 둘의 대화를 따라가기 힘들었던 것인지 얼빠진 얼굴로 눈을 굴려댔다.
“도미니크, 결정하지 못했다면, 내가 지금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
김진우의 말에 도미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물이 되는 건.”
그의 시선이 잠시 천장거인 군주를 향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통곡의 군주의 이름이었다.
“캐서린이다.”
“어째서!”
잠깐 사이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듯한 얼굴로 천장거인 군주가 외쳤다.
“머리 나쁜 놈에게 상황을 전부 설명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니까.”
실로 단순했지만, 김진우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이유였다. 애초에 그가 지금 생각하는 하이로드들의 가치는 딱 그 정도에 불과했던 탓이다.
“잠깐!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끝까지 멍청한 질문을 해대는 거한을 잠시 바라보던 김진우는 대답 대신 손을 들었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환수들이 그의 손짓에 곧장 천장거인 군주를 끌어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그 교활한 년을 살려두면 분명 후회하게 될 거라고!”
끝까지 납득하지 못하고 소리치는 천장거인 군주를 눈으로 쫓던 그가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곧장 입을 열어 충성을 맹세했다.
“죽음이 허락한 나의 권능과 진명을 걸고 지저의 신비에 맹세한다. 나는 이후로 그대의 으뜸가는 충신이 되리라.”
어쩌면 의미 없을지도 모르는 맹세였다. 애초에 그들은 지저의 존재이자 지상의 존재이기도 했고, 지저의 신비는 그런 그들에게 강제할 수 없었다.
“좋아. 그대의 충성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김진우였지만, 아무 내색 없이 그녀의 맹세를 받아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저의 신비가 관장하는 진리의 왕좌가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해 줄 한마디였다.
만약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그때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저 진리의 왕좌에 앉는 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하나 물을게요.”
나름대로 격식을 지키려는 것인지 캐서린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어디까지죠?”
“나도 알 수 없어. 진리의 왕좌에 대해 내가 아는 건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바치면 그 대가만큼의 진실을 보여준다는 것뿐이니까.”
그녀의 질문에 김진우도 이번만큼은 거짓 없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어쩌면 눈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그보다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지. 물론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그 말은 최악의 경우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없군요.”
그녀는 말을 아꼈지만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만큼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후회해? 만약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천장거인 군주를 데려오도록 하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흉신들의 밥이 되는 것보다는 낫겠죠.”
체념인지 기대인지 모를 대답에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됐으면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캐서린이 왕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녀가 변명처럼 한마디를 주워섬겼다.
“기껏 결심했는데 거부당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녀는 가급적이면 진리의 왕좌가 자신을 그의 것으로 인식해 주기를 바랐고, 또 이를 위해서 굴욕적인 자세도 망설이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눈치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바라 마지않던 일이라 탓하지 않고 그대로 숨겨진 진실에 이르는 의식을 시작했다.
“진리의 왕좌여, 나의 눈을 대신하여 저 너머의 진실을 보여다오.”
[진리의 왕좌가 지닌 권능이 발동합니다. 한 번 발동한 의식은 중간에 임의로 중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의식을 진행하시겠습니까?]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하겠다.”
[진실을 엿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당신이 원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무거운 것. 그 대가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대가가 부족할 경우 진리의 왕좌는 엉뚱한 것을 보여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의식을 진행하시겠습니까?]다시 한 번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진리의 왕좌에 새겨진 물푸레나무의 가지들이 뻗어 나와 그를 감쌌다.
“내가 대가로 바칠 것은 죽음으로부터 허락받은 통곡의 권능을 지닌 하이로드, 캐서린이다.”
[자신의 신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진리의 왕좌에 바쳐진 것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당신이 제시한 대가는 진실을 엿보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녔습니다.]잠시 그가 긴장된 얼굴로 의식의 추이를 지켜보는 사이, 무릎 꿇고 있던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나 통곡의 군주, 캐서린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기꺼이 저울 반대편의 추가 되겠노라. 부디 나의 가치가 주인이 보고자 하는 진실보다 가볍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래도 거부당할까 염려가 되었던 것인지, 그녀가 몇 번이나 스스로를 제물이라 자칭하며 진리의 왕좌에 호소했다. 그러한 노력이 통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처음부터 진리의 왕좌가 캐서린을 대가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인지 잠시 멈추었던 의식이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다.
[진리의 왕좌가 당신이 바친 대가의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 당신은 진리의 왕좌가 거두어 갈 대가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결코 당신이 요구한 진실보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을 것입니다.]자신을 감싸고 있던 물푸레나무가 슬금슬금 뻗어 나가 캐서린을 휘감는 것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그는 어느 순간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