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03)
던전 견문록-303화(303/319)
# 303
던전 견문록
제 304 화
106. 무저갱의 지배자
김진우가 의식 속으로 빠져든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재앙이 찾아왔다.
층을 구분 짓던 천장과 바닥이 무너졌고 붕괴에 휩쓸린 미궁이 수도 없이 멸망했다.
살아남은 귀족들과 미궁의 주인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 끔찍한 재앙이 끝나기를 바라며 미궁 속에 웅크린 채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수많은 미궁이 소멸되었다.
이제껏 치러왔던 그 어떤 전쟁보다 끔찍한 희생, 생존자들은 겁에 질렸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의 앞에서 그들은 너무나 나약했고, 무력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붕괴와 지각변동 속에서 빠르게 지쳐 갔다.
종말이 온다면 이러한 모습일까.
그런 그들의 머릿속에 언젠가부터 ‘끝’이라는 단어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10만 미궁의 주인들 중 3분지 2가 재앙에 휩쓸려 끝장났으니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주인 잃은 미궁과 그 잔해만이 남은 지저는 마치 하나의 커다란 공동묘지가 된 듯했다. 그만큼 3차 복원은 끔찍했다.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던 것일까. 지저는 멸망하지 않았다. 생존자들의 좌절과 절망을 비웃듯이 재앙은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예고도 없었던 시작만큼이나 갑작스러웠다.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 버렸다. 고대 이후로 잘게 쪼개져 있던 층이 하나가 되었고, 격리되었던 각 대륙의 지저들이 합쳐져 마침내 과거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가 된 지저에 거대한 물푸레나무 한 그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진우가 언젠가 보았던 심층의 지저수였다.
하지만 정작 생존자들은 그 변화를 실감할 틈조차 없었다.
무너지고 손상되어 버린 미궁을 복귀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아부어야 했고, 폐허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흉신들과 힘겨운 전투를 이어나갔던 탓이다.
흉신들과 생존자들 사이에는 그 어떤 책략도 대화도 존재하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먹고 먹히는 지저의 율법뿐이었다.
생과 사가 명멸하는 순수한 투쟁의 장, 지저에 바야흐로 원시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의 미궁이 소멸하고 또 그만큼의 지배자들이 사라졌다. 지저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전장이 아닌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단 한 곳, 투쟁 없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발홀과 대미궁이 있는 곳이었다.
***
김진우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물푸레나무의 가지들에 둘러싸인 채였다.
도미니크와 소환수들은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의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을 주인을 기다렸다. 그들은 그가 돌아왔을 때 엉망진창이 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쉴 틈 없이 움직이며 손상된 대미궁을 복구하고 주변을 탐색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하지만 나가들이 다시 대미궁을 재건하고 언더 엘프들이 인근의 탐색을 완전히 마쳤음에도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흉신들이 날뛰어대는 지저에서 그들만이 유일하게 안전했음에도, 그들의 시름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기만 했다.
“근래 들어 흉신들이 근방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나이다. 아직은 주인의 위엄에 감히 이곳을 도모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으나, 주인의 부재가 알려지는 순간 그들은 망설임 없이 이곳을 향해 달려들 것이나이다.”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하는 릭샤샤는 마치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양 죄스러운 얼굴이었다.
“아직은 괜찮아.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어.”
도미니크는 그런 릭샤샤를 위로했다. 아니,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뇌며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소환수들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과는 달리 상황은 좋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흉신들이 출몰하는 빈도가 부쩍 늘었고, 간혹 가다가 대담하게 발홀의 근처를 얼쩡거리기까지 했다.
전권을 위임받은 나가 여왕의 권한으로 묠니르를 발동시켜 그들을 쫓아 보내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저들도 주인의 부재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부디 그 전까지 주인이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런 도미니크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벌써 50일이 다 되어가도록 미동조차 없던 진리의 왕좌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길게 뻗었던 가지가 바싹 말라간다 싶더니, 금세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아…….”
먼저 깨어난 것은 통곡의 군주였다. 그녀는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번쩍 떴다.
여전히 물푸레나무에 둘러싸여 깨어나지 않는 주인과 통곡의 군주를 번갈아 바라보던 도미니크가 긴장된 얼굴로 안젤라에게 눈짓을 했다.
혹시라도 주인이 의식을 잃은 틈을 타 캐서린이 허튼 수작이라도 부릴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통곡의 군주 하나라면 안젤라가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 역시 당당한 하이로드였으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통곡의 군주를 바라보는 안젤라의 눈빛이 충격받은 듯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미니크는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원했던 진실이 내 생각보다 더 무거웠던 모양이야.”
“너, 권능이…….”
안젤라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간신히 입을 뗐다. 그런 그녀의 말에 통곡의 군주가 허망한 얼굴로 대꾸했다.
“맞아. 진리의 왕좌는 의식의 대가로 내 권능을 거두어갔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 그 어디에도 더 이상 하이로드의 격 높은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 더럽네.”
한때 지저의 정점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섰던 이가 한순간에 그 모든 힘을 잃고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 허망하고 공허하지 않으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재수 좋으면 눈 하나, 팔 하나 정도로 끝날 거라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도미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음성에 깊게 밴 절망에 공감했던 탓이다.
“근데 더 기분이 더러운 게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
통곡의 군주, 아니, 이제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 캐서린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어느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아주 까마득한 옛날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거지.”
“그게 무슨…….”
“그것도 모르고 병신처럼 왕이니 뭐니 떠들어댔으니, 내 꼴만 우습게 됐지.”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과 자조가 가득한 음성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너도 진리의 왕좌를 통해 무언가를 본 게로구나.”
안젤라가 깊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캐서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을 해주지도 않았다.
“그런 질문일랑 네 주인에게 하렴.”
어차피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가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의식은 주인을 위해 치러진 것이었고, 그녀는 그 언저리에서 작은 진실을 본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주인님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거야. 그의 꿈은 나의 것보다 몇 배는 깊고도 길 테니까.
과연 캐서린의 말 대로였다. 김진우가 깨어난 것은 그녀가 깨어나고도 어언 일주일이란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주인님!”
“왕이시여!”
이제나저제나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소환수들이 감격해 외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멍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주인님!”
묘하게 텅 빈 듯한 그 모습에 도미니크가 와락 겁을 집어먹고 소리쳤다. 그 필사적인 외침에 몽롱했던 그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아아.”
그는 깊게 잠겨 마치 쇳소리처럼 갈라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리의 왕좌는 나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호들갑을 떨어대던 소환수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외눈박이 군주는 제 눈을 바친 대가로 지저의 종말을 보았다. 하지만 그가 본 지저의 종말은 배덕의 군주가 말했던 것과는 달랐어.”
배덕의 군주는 지저의 종말이 지상의 침공에 의해 찾아올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외눈박이 군주가 진리의 왕좌를 통해 본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외눈박이 군주가 눈 하나를 바치고 엿본 미래, 지저는 웅크린 채 때를 기다리던 괴수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지저를 멸망시킨 괴수는 땅 밑 세상뿐 아니라 땅 위마저 집어삼켜 버렸다.
그게 밤이었다.
지저와 지상이 하나로 합쳐질 그날, 웅크리고 있던 밤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가 바로 세상의 종말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외눈박이 군주는 훗날을 대비했다. 괴수가 지상으로 나서기 전에 그 숨통을 끊어놓을 무기를 준비해 두었다.”
가장 어린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로 만든 창, 지저의 신비조차 피해갈 수 없는 필멸의 창이야말로 외눈박이 군주가 준비해 둔 안배였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괴수는 교활했고 때가 되기 전까지는 본체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괴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미끼가 필요했다.
“그 미끼가 바로 위시 스톤이다.”
원래대로였다면 심층 가장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었어야 할 위시 스톤, 하지만 찬탈자의 음모로 인해 그것은 지상으로 유출되었다가 겨우 얼마 전에야 지저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소한 비틀림이었지만 그는 그 덕분에 외눈박이 군주와 찬탈자의 뜻이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찬탈자는 세상의 종말을 원하고 있다.”
밤이 날아오를 그때, 지저와 지상이 하나가 될 그 순간을 찬탈자는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지저뿐 아니라 지상도 멸망하기를 원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는 세상이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 주최가 밤이든 찬탈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어째서 나였지? 왜 하필 나였던 거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단다. 나는 그저 씨앗을 뿌렸을 뿐, 그 씨앗이 어떤 싹을 틔울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배덕의 군주는 왜 하필 자신을 선택한 것인지를 묻는 그에게 단지 우연일 뿐이라 말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진실이 아니었다.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만팔천이백삼십 뱀의 둥지, 나가의 미궁이 당신을 주인으로 인식합니다.”
김진우는 처음 나가의 미궁을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그저 주인 없는 곳을 운 좋게 얻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각인되지 않은 핵을 통해 미궁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만팔천이백삼십 뱀의 해방자, 음습한 땅 밑을 계승하고 나가들의 왕좌에 앉을 자여.”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너무나 작고 미천하구나.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잡아두기에는 나 또한 성치 않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 생각하리라.”
“행운을 빌겠노라.”
그는 분명 전대 나가왕의 사념을 통해 미궁의 주인이 되었다.
“도미니크, 혹시 전대 용왕을 기억해?”
“아니요.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그럼 퀀투스는?”
“저 역시 알지 못합니다.”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해 하던 나가들도 위화감을 느꼈는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김진우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상하더군. 마치 나가들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으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지저라고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지상의 인간들이 책에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듯, 지저의 존재들 역시 일족의 기억을 전승하는 식으로 역사를 이어갔다.
그랬기에 그가 만난 수많은 미궁의 주인과 소환수들이 존재의 근원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나가들만이 마치 새롭게 태어난 종족처럼 백지일까. 진리의 왕좌는 그에게 그 이유를 보여주었다.
“나가들은 가장 어둡고 음습한 땅 밑 세상의 백성, 지저조차 다 품지 못했던 가장 깊은 무저갱의 주민이자, 원래대로라면 어둠 밖으로 나설 수 없었던 수감자였으니.”
바싹 메마른 음성이 불편한 진실을 끄집어냈다.
“그대들은 최초에는 지저 뱀이라 불렸으나 황혼 이후 자신의 진명을 잃어버린 무저갱의 지배자, 옛 군주들이 그토록이나 증오해 마지않는 괴수, 밤의 일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