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04)
던전 견문록-304화(304/319)
# 304
던전 견문록
제 305 화
[지저에는 가장 깊은 심층보다 더 깊은 어둠이 존재했습니다. 지저조차 품지 못한 이 끝없는 구덩이는 ‘무저갱’이라 불렸습니다.] [구덩이 속은 오직 어둠뿐인 세계였으며, 가장 가죽 두꺼운 크리쳐조차 버티기 힘든 추위가 지배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생명체가 살아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혹독한 환경, 무저갱의 주민들은 동족의 피로 몸을 덥혀야 했으며, 그 살을 뜯어 주린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지저의 존재들은 그런 그들의 비참한 삶을 경원시했으며, 흉신이라는 이름을 붙여 적대하였습니다.] [지저뱀, 요르문간드는 그런 무저갱의 지배자이자 구원자였습니다. 오직 요르문간드만이 성벽을 높이 쌓은 지저의 군주들을 상대할 수 있었으며, 비참한 수감자들의 주린 배를 채워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요르문간드조차도 동족의 골육을 파먹고 피를 마시는 악순환만큼은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요르문간드는 동족의 비극을 끝내기로 마음먹었고, 지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전쟁이 바로 고대의 황혼입니다.] [하지만 황혼은 패배했습니다. 요르문간드 역시 옛 군주들을 상대하느라 크나큰 상처를 입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따라 무저갱을 나섰다 비참하게 쫓겨난 이들의 처지를 비탄했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거대한 지저를 독차지한 채 조금의 양보조차 없는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옛 군주들을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골수에 파묻힌 증오는 마침내 그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요르문간드는 진명을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밤은 지저를 침범한 대가로 해갈되지 않는 갈증과 해소할 수 없는 허기에 시달리는 끔찍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무저갱의 주민들 역시 저주받아 죽음의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진리의 왕좌를 통해 보았던 진실이 주르륵, 메시지로 떠올랐다.
[황혼에서 패퇴한 무저갱의 주민들에게는 전쟁보다 더 끔찍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쳐 버린 지배자가 동족을 끝도 없이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극은 오래도록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밤은 스스로의 육신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비극을 끝맺었습니다. 하지만 옛 군주들의 저주는 그를 죽을 수조차 없게 만들었습니다.] [밤은 무저갱 바깥세상에 대한 증오로 완전한 괴물이 되었고, 마침내 스스로를 잊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일족의 해방을 염원하는 마음만큼은 여전했고, 그리하여 그는 하이로드들이 준비한 천년 대계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방법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황혼의 전투에서 집어삼켰던 방랑 군주의 기억이 이제는 그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밤은 때를 기다렸고, 오랜 시간이 흘러 마침내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룡 군주의 권능을 이어받은 지저인 ‘김진우’를 발견한 것입니다.] [밤은 이 약속된 하이로드의 재목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른 군주들로부터 자신의 권능과 일족을 숨기기에 지룡의 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일족의 힘은 일개 지저의 존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흉험했고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힘을 대부분 봉인하였습니다.] [정체를 숨기는 대가로 일족은 대부분의 힘을 잃었고, 전승을 잊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우연과 필연이 겹쳐 잊혔던 족의 전승이 다시 돌아왔습니다.]그때까지만 해도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느라 반쯤 얼이 빠져 있던 나가들이 덜컥거리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총기 돌던 눈동자가 하얗게 탈색되고 푸르고 붉던 비늘이 빛을 잃었다.
[나가들이 잃어버린 일족의 전승을 떠올렸습니다.] [전승을 기억해 낸 덕에 그들은 봉인되었던 힘을 다시 되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가들이 탈피(脫皮)의 과정에 들어갑니다.] [탈피가 모두 끝이 나면, 그때 나가들의 진정한 힘이 해방될 것입니다.] [탈피 완료까지 앞으로 23:58초 남았습니다.]메시지가 끝남과 동시에 주인의 귀환을 반기기 위해 모인 나가들 전부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가들을 전부 대미궁으로 옮겨라.”
김진우는 갑작스러운 나가들의 변화를 예상이라도 한 듯 태연하게 도미니크를 안아 들었다.
“이곳은 그들이 잠들기에 그리 좋은 곳이 아니다.”
무저갱 주민들의 염원을 무참히 박살 내고 요르문간드를 패퇴시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외눈박이 군주는 나가들의 원수다.
그런 원수의 성안에서 그들이 진짜 모습을 되찾는 것은 그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에인헤리들과 언더 엘프들이 몰려와 나가들을 옮기는 사이, 안젤라가 따라붙었다.
“놀랍네요. 지저의 일이라는 건 뭐 하나 우연이 없군요.”
의식을 잃은 도미니크를 힐끗 바라본 그녀가 캐서린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가. 결국 그리되었군.”
그것 역시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상한 소리를 했어요. 처음부터 다 이리 될 거라 정해져 있었다고.”
그 소리가 마치 다른 하이로드들은 들러리라는 말처럼 들렸다며 안젤라는 의아해했다.
“너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파편을 통해 각성한 다른 하이로드들과는 다르게 넌 진혈 군주의 사념을 통해 제대로 각성했으니까.”
아무래도 자신 역시 캐서린처럼 비참한 미래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인지, 안젤라는 그의 말에 적잖이 안심한 얼굴이었다.
그사이 대미궁에 도달한 김진우는 도미니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저들이 깨어나기 전까지 나를 찾지 마라.”
아직 듣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지라 안젤라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지만 굳이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의 얼굴이 전에 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던 탓이다.
그런 모습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그야말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태였다.
진리의 왕좌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외눈박이 군주에 얽힌 이야기와 나가들에 관한 진실같이 그가 알고자 했던 것도 있었지만, 또한 전혀 원하지 않았던 진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그는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멸망을 막을 해결책과 또한 멸망을 확정지을 열쇠가 동시에 한 사람에게 주어졌고,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당연하게도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미래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무겁다. 그리고 불편하다.
사실 세상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단지 살아남는 것, 아울러 자신을 짐승처럼 부렸던 공작에 대한 복수뿐이었다. 이런 거창한 선택권 따위는 단 한 번도 바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었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나가들이 깨어나면 지저수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
그곳에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있다. 그것을 손에 쥐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결정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리라.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나가들이 깨어났다. 깨어난 이들은 예상과는 다르게 큰 변화가 없었다.
붉고 푸르던 비늘이 단지 검게 물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많이 변하지 않았다 싶은 것은 단지 외양뿐이었다.
그저 영웅급 소환수 정도나 되었을까. 크게 도드라지지 않던 나가들의 기세가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들의 주변을 두른 냉기는 여전했으나 그 기저에 깔린 불길함은 전에 없던 것이었다.
김진우는 그 불길함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해갈되지 않는 갈증과 해소되지 않는 허기를 근원으로 둔 끝없는 탐욕이 불길함의 정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지닌 탐욕의 권능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었다.
[나가들이 봉인되었던 힘을 되찾았습니다.] [그간 잊고 있었던, 무저갱의 주민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탐식과 폭식의 권능이 나가들에게 깃들었습니다.] [이미 일개 소환수라고 하기에는 아득할 정도로 강해진 나가들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모습이 저들의 진정한 힘은 아닙니다. 전투에서 승리할수록 더욱 강해지고 탐욕스러워질 것입니다. 마치 당신처럼 말입니다.] [자신들의 근원, 무저갱을 다시 떠올린 나가들이 고유 능력, ‘살육제(殺戮祭)’를 되찾았습니다.] [끝없는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무저갱의 주민들은 적들의 피와 살점을 통해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힘을 키워왔습니다. 나가들 역시 살육제를 통해 적의 힘 일부를 흡수하고 성장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살육제에 참가한 나가들은 일시적으로 전투력이 상승합니다.]“주인님.”
도미니크가 그를 불렀다.
“나는 아직 그대들의 주인인가.”
김진우는 물었다. 저들이 잃었던 전승과 힘을 되찾은 이상, 더 이상 그가 수족처럼 부려왔던 수하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진정한 왕은 자신이 아닌 몸속에 깃든 무저갱의 지배자, 밤이었으며 그 권능이었다.
“아니, 다시 묻지. 그대들이 따르는 것은 나, 김진우인가, 그도 아니면 내 안의 ‘밤’인가.”
오직 나가들만이 유일하게 온전한 자신의 것이라 여겼던 생각이 틀리고 말았지만, 그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도미니크 역시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부서진 꿈을 부여잡고 발버둥치는 가련한 지저뱀이 아닌, 더없이 난폭하고 오만한 폭군입니다.”
“그게 너희 나가들의 결정인가.”
김진우는 다시 물었고, 이번에 대답한 것은 수많은 나가였다.
“일족의 유일한 왕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오직 주인뿐입니다.”
마치 선언과도 같은 그들의 대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저갱의 주민들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지저뱀의 피를 이어받은 나가들이 자신들의 근원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일족의 해방자이자 유일한 구원자 대신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기를 천명했습니다.] [어쩌면 일전에 그들이 섭취했던 변질된 해룡의 심장이 그들이 내린 결정의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아니, 그런 게 아냐.”
김진우는 처음으로 메시지를 부정했다.
“그들은 밤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또한 무저갱의 파편 역시 아니야. 그저 그들은 나가들일 뿐이고, 나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웃어 보였다.
[어쩌면 당신의 말이 일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가들은 너무나 오랜 시간을 지저뱀과 떨어져 있었고, 그 시간은 그들이 새로운 주인을 품기에 충분할 정도로 길었습니다.] [어쨌건 간에 나가들이 당신을 선택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 당신의 안에 웅크린 어둠이 이번 일로 조금은 마음이 급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지저수와 만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조급해진 괴수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예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메시지는 마치 그와 대화라도 나누듯 말을 건네 왔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변화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 역시도 진리의 왕좌를 통해 지저의 신비에 닿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소한 변화일 뿐이었다. 새삼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었다.
“그대들의 변함없는 충성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김진우는 만족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말로만 고맙다 하는 것도 궁색해 보이겠지.”
그렇게 말한 그가 나가들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이건…….”
“그대들은 이곳에서 얻은 칼과 창으로 나를 위해 싸울 테니, 상이라고 하기에도 뭐하군.”
그들이 도달한 곳은 얼마 전에 이전을 완료한 영원의 창고였다. 그는 그곳에서 온갖 보물을 꺼내 나가들에게 전해주었다.
“오오!”
가장 사치스러운 공작의 군대조차도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호사스러운 장비. 나가들은 전에 없이 강력한 무구와 갑주로 새롭게 무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무장한 이들은 지저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되었다.
“지저수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
김진우의 선언에 대미궁과 발홀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