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05)
던전 견문록-305화(305/319)
# 305
던전 견문록
제 306 화
107. 지저수 원정대
3차 복원 이후 지저는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간 언더 엘프들이 목숨 걸고 수집해 온 정보와 지도는 아예 무용지물이 되었고, 난동을 피워대는 흉신들 탓에 어디에 어떤 미궁이 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원정을 나가려니 부담스러운 게 당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지저 어디에서든 눈에 들어오는 지저수가 목표라는 것이었다.
장님이 아니고서야 천장을 떠받들고 선 거대한 물푸레나무를 보고도 길을 잃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정찰 인원을 최소한으로 하고, 최단 거리로 경로를 잡는다.”
김진우의 명령에 릭샤샤가 난색을 표했다.
“흉신들이 날뛰어대는 통에 탐색 거리가 굉장히 협소해졌나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찰 인원을 최소화하면 경로의 미궁, 흉신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나이다.”
평소였다면 그녀의 말에 그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가가 원정대에 포함되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미궁의 주인 이상으로 강력했고, 도미니크를 제외한 수뇌부들의 힘은 귀족이라고 해도 열세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강했다.
그런 나가들이 영원의 창고에서 꺼낸 신병이기로 전원 무장했다. 어지간한 미궁은 오히려 그들의 전력을 강화할 양분이 될 뿐이었다.
“발홀의 성문을 폐쇄하고 모리건과 백오가 에인헤리들을 이끈다.”
게다가 이번 원정에 포함된 것은 나가들만이 아니었다. 발홀 역시 묠니르를 운용할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겨둔 채 에인헤리 전원이 원정대로 차출되었다.
과연 이 정도의 대군이 한 번에 움직인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 만약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다면 그자의 정신을 먼저 의심해 봐야 할 지경이었다.
“도미니크.”
그의 호출에 나가 여왕이 앞으로 나섰다.
“주인님의 걸음이 멈추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이심전심, 그녀는 지금 자신의 주인이 듣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기꺼이 제 입으로 그의 의지를 천명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어쩌면 공작의 미궁이 앞을 막아설지도 모른다. 우리의 목표는 그들이 아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의 대군이 앞마당을 활보하도록 둘 수 없을 테니까.”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자는 앞마당이 아니라 자신의 내일을 걱정해야 하게 될 거예요.”
늘 신중하고 사려 깊은 모습만을 보여 왔던 도미니크가 오늘만큼은 패기가 넘쳤다. 아무래도 전승의 각성은 외양보다는 그녀의 내면에 더욱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모양이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 그뿐이랍니다.”
도미니크의 말에 나가들이 일제히 칼과 창으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그들은 마치 눈앞에 공작의 미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발을 구르며 바람 소리를 냈다.
“하!”
나가 특유의 날카로운 포효,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고 사방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드높은 투지와 기세에 김진우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믿겠다.”
그 말에 나가들이 다시 한 번 목을 울리고는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
그들이 기세를 거두어들임과 동시에 냉기는 사라졌다. 하지만 잠깐 사이에 살얼음이 끼어버린 주변의 광경은 그대로였다.
릭샤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제 곡도에 들러붙은 서리를 보며 탄성도 신음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대와 언더 엘프들의 임무는 빠른 길을 찾는 것뿐이다. 만약 길이 막혀 있다면 저들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줄 테니까.”
그런 그녀를 향해 김진우가 선언하듯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릭샤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침착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받들었다.
“왕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선된 언더 엘프 순찰자들이 무리에서 떨어져 정찰에 나섰다.
“전군.”
김진우가 저 멀리 사라진 언더 엘프들을 눈으로 쫓다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런 그의 손은 끝도 없이 솟구친 지저수를 향해 있었다.
“진군한다.”
그의 말에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미니크와 나가들은 자신들의 말을 지켜보였다. 그들은 장담했던 것처럼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강력한 나가들에 비해 비참할 정도로 나약한 적들을 상대로 거둔 보잘것없는 승리지만, 어쨌건 간에 승리는 승리입니다.] [나가들이 미궁의 핵과 투항한 적들의 처우에 대해 묻습니다.]순식간에 끝이 난 전투에 나가들은 피로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알 수 없는 열기와 열의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자신들의 주인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음.”
김진우는 그들의 눈빛이 무엇을 갈구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 기대를 저버릴 마음이 없었다.
“승자의 권리를 누려라.”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가들이 소리 없이 환호하며 생존자와 미궁을 향해 달려들었다.
[살육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하필이면 굶주린 나가들과 처음으로 조우한 이름 모를 백작의 미궁이 가여울 지경입니다. 나가들이 남은 생존자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미궁의 핵마저 흡수합니다.] [살육제에 참가한 나가들이 조금이지만 성장합니다.] [이름 모를 백작의 군대와 미궁은 이 탐욕스러운 나가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식사였습니다. 당장 그들에게 눈에 띄는 변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봉인에서 해방된 이후 처음으로 즐긴 살육제는 나가들의 잃어버렸던 식탐을 다시 되찾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나가들이 더욱 강한 적을 상대하기를 원합니다.]눈앞에서 미궁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왜 옛 군주들이 그토록이나 기를 써가며 지저뱀과 그 일족을 막으려 했는지 알겠군.”
식사가 끝이 난 뒤, 남은 것은 미궁의 잔해뿐이었다. 기분 탓인지 작은 돌조각 하나까지 생기 없이 바싹 메마른 듯한 느낌이 왠지 모르게 괴기스러울 지경이었다.
“전군, 다시 앞으로.”
원정을 나서고도 며칠이 지났지만, 대미궁에서 바라본 것과 지금의 지저수는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김진우는 아무리 걸어도 조금도 가까워질 생각을 않는 지저수를 보며 새삼 저 하나뿐인 물푸레나무의 거대함과 변해 버린 지저의 광활함에 혀를 찼다.
[연이은 살육제로 꽤나 많은 미궁을 먹어치운 나가들이지만, 제 주인의 탐욕을 닮은 것인지 여전히 허기를 호소합니다.] [나가들이 계속해서 성장해 나갑니다.]그 와중에 신이 난 것은 나가들이었다. 나가들은 미궁이 나타날 때마다 살육제를 열고 식사에 열을 올렸다. 그 덕분에 처음 대미궁을 출발했을 때의 그들과 지금의 나가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나가의 꼬리는 힘의 상징입니다. 비늘로 뒤덮인 꼬리야말로 나가의 힘과 권위를 나타내는 좋은 지표이며, 가장 효과적인 공격 수단입니다.] [퀀투스의 꼬리가 10미터를 넘어섰습니다. 이 용맹스러운 나가 친위대장의 권위에 도전할 나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단한 비늘로 둘러싸인 꼬리는 거대한 지저의 크리쳐조차도 통째로 휘감아 으스러트릴 정도로 강력한 무기입니다.] [발리셔스의 꼬리가 8미터에 도달했습니다. 접근전에 취약한 나가 마법사의 한계가 조금은 보완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라난 제 꼬리보다 일족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발리셔스와 그를 따르는 나가 마법사들에 대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한층 더 집요해진 미치광이들은 동족이라고 해서 실험 재료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벌써부터 가장 만만한 연구 대상을 찾기 시작한 눈치입니다.]길게는 3미터, 짧게는 2미터가 채 되지 않았던 나가들의 꼬리는 이제 가장 거대한 나가가 10미터에 달하게 되었고, 조금 왜소하다 싶은 나가조차도 꼬리만 3미터가 넘을 정도로 거대하게 성장했다.
[도미니크가 또 한 번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을 제외하고는 가장 고귀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나가 여왕은 전투에 앞장서서 뛰어드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가 여왕의 진정한 존재 의의는 왕의 반려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녀의 꼬리는 거추장스럽게 커다래지는 대신 더욱 더 촘촘한 비늘과 아름다운 광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그녀 본신의 무력이 약한 것은 아닙니다.] [왕을 보좌하는 명석함과 그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온갖 능력은 그녀야말로 왕의 진정한 반려임을 증명합니다.] [또한 냉기를 다루는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감히 나가 마법사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냉기 마법은 다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나가 마법사들과는 달리 거대한 하나를 상대하는 데 보다 효과적입니다.]이번에도 도미니크의 성장 방향은 다른 나가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김진우는 잠깐이지만 상황도 잊은 채 넋을 잃고 말았다. 스스로의 취향이 정상적인 성인 남성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조차도 검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비늘과 꼬리를 보며 알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고 말았다.
그만큼 그녀의 아름다움은 치명적이었다.
[가장 위험한 전투를 앞둔 지금이야말로 종족을 번식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나가 여왕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온몸으로 매혹의 향기를 내뿜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의 쓸데없을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과 승리를 위한 집착이 그녀의 유혹을 이겨내고 말았습니다.] [나가 여왕은 실망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당신을 유혹할 것입니다.]아무래도 봉인이 해제되어 해방된 것은 그저 일족의 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인을 갈망하게 되었고, 자신을 어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곤란해진 것은 김진우였다.
“주인님, 저 앞에 공작의 미궁이…….”
“하던 대로 처리하도록. 힘이 부족하면 안젤라의 도움을 받고.”
“주인님, 그래도 공작의 미궁인데 정말 저희가 흡수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나중에 가서는 도미니크가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일을 도맡은 그녀를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유혹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렇지만 도미니크는 만만찮았다. 며칠 전 공작의 미궁을 흡수한 이후로 그녀가 발하는 유혹의 향은 머리가 아파올 정도로 강해졌고, 그는 시간이 갈수록 자제력이 약해져 갔다.
하기야,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전부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탐욕의 군주가 이만큼이나 참아온 게 도리어 용한 일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를 거부할 이유조차도 모호했다.
메시지의 말마따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지금이야말로 후손을 남겨야 할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 지경이었다.
결국 그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도미니크의 유혹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 버린 것이다.
“너무 늦지 마세요.”
원정대를 슬쩍 앞세우는 그를 보며 안젤라가 짓궂게 말했다. 그는 못 들은 척 그녀를 보내고 도미니크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도미니크, 꼬리가 사라진 대신 눈부시게 창백한 각선미가 그를 반겨주었다.
“주인님…….”
매혹의 빛을 띤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한 순간 그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아…….”
이미 안젤라와의 경험을 통해 그 신비로움을 알고 있었다지만, 도미니크의 경우는 또 그 차원이 달랐다. 나가 여왕의 육체는 마치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가장 사소한 것 하나마저도 그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끄응. 또 졌군.”
덕분에 그는 가장 무참하게 패배했던 첫날밤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려야 했다.
[나가 여왕은 자신의 가장 큰 사명을 이룬 데 몹시 만족했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충족감과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단 한 번의 관계였지만, 나가 여왕이 당신의 아이를 수태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나가들은 이제 당신의 아이를 수태한 나가 여왕을 당신을 대하듯 떠받들고 보호할 것입니다.]메시지가 떠올랐지만 그는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도미니크를 안은 마당에 새삼 놀랄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주인님, 제 목숨을 잃더라도 이 아이만큼은 지켜 보일게요.”
도미니크의 결연한 말에 그가 따스하게 미소 지으며 뭐라 말을 하려는데 머릿속으로 낯익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