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07)
던전 견문록-307화(307/319)
# 307
던전 견문록
제 308 화
김진우는 용제의 답을 기다리는 대신 악룡의 힘을 이끌어냈다.
“그대에게 다시 묻겠노라. 그대의 대답은 여전히 변함없는가.”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밤’에 의해 변질되고 더럽혀져 이제는 용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악룡의 존재를 이루는 근원은 여전히 용의 그것이었다. 그토록이나 자신들의 뿌리를 자랑스러워하는 용제와 그 일족이라면 절대로 지룡의 힘을 외면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용제는 비록 ‘밤’에 의해 오염되고 변질되었을지언정 그가 지닌 용의 힘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냉큼 제안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용제 아그립투스여.”
김진우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대와 그대의 일족은, 나를 거부하는가.”
그럴 리가 없다. 씹다 내뱉은, 채 소화하지 못한 찌꺼기처럼 흉물스럽게 변해 버렸다지만 지룡의 권능은 진짜였고, 드라칸들은 그 권능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용제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아…….”
뜨거운 숨결을 머금은 채, 침묵을 지키던 용제의 입매가 한참 만에 열렸다. 그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일족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은 실로 기쁜 일이나, 찬란한 금빛 비늘은 이제 칙칙한 어둠이 되었고, 긍지와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되었구나.”
용제의 음성은 그토록이나 염원했던 용의 힘과 마주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음울했다.
“오매불망 염원해 왔던 근원을 찾았으나 내일을 잃었으니, 비로소 우리 일족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미래를 모두 잃게 되었도다.”
하기야 자긍심 강한 드라칸으로서는 지저뱀의 악의에 반쯤 먹혀 버린 지룡의 힘이 달갑지 않은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나의 일족은 그대를 부정할 수 없으니.”
절대로 굽혀지지 않을 것 같았던 용제의 무릎이 꺾였다.
“나의 몸속에 흐르는 뜨거운 피가 용에 뿌리를 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노라.”
고고한 기상만큼이나 뻣뻣하던 용제가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수많은 드라칸이 무릎을 꿇고 굴종의 자세를 취했다.
“나와 나의 일족은 그대가 지룡의 힘을 계승했음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충성을 보일 것이다.”
[가장 강대한 공작들마저도 찬탈자의 눈치를 살필 때에도 드라칸들은 긍지를 잃지 않았었습니다. 자존심 강한 그들에게 강제로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차라리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 드라칸들에게 복종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지룡의 권위뿐입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당신에게는 비록 변질되었을지언정 지룡의 힘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용제 아그립투스와 그를 따르는 일천 용기병들의 충성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용제 아그립투스의 미궁이 새롭게 대미궁의 세력에 편입됩니다.]김진우는 메시지 너머로 보이는 고개 숙인 드라칸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악룡의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결국 용제와 드라칸들은 미궁을 이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들은 쇠락한 일족의 정기가 지금의 혼란을 이겨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고, 분한 마음을 달래며 핵을 추출하여 훗날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곧 뒤를 따르겠습니다.”
고개 숙인 용제의 말에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다시 걸음을 서두르도록 하지.”
그의 나직한 한마디에 원정대가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왜, 드라칸의 힘을 흡수하지 못해 아쉬운가?”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나가들을 보며 그가 물었다.
“용제는 지저에 드물게 믿을 수 있는 자예요. 그런 용제의 충성을 얻은 건 대단한 일이랍니다.”
나가들을 대표해 앞으로 나선 도미니크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가 마법사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그 말에 도미니크가 뒤를 돌아보더니, 침울하다 못해 의기소침해진 나가 마법사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끙. 나가 마법사들이야 원래 별종들이니까요.”
“하나 다른 이들도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아쉬운 마음은 매한가지겠지.”
이번에는 도미니크도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제 막 식탐이 생겨 적들을 먹어치우는 데 재미가 들린 나가들이니만큼 용제와 드라칸들처럼 질 좋은 먹잇감을 두고도 돌아서야 했던 게 내심 아쉬울 만도 했다.
“실망하지 마라. 앞으로 내가 그대들의 식사를 방해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 장담하마.”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말을 지킬 수 없었다.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마주 한 거대한 미궁 앞에서 그 말을 번복해야만 했다.
“대기하라.”
전과 똑같은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나가들도 경솔하게 아쉬움을 표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나타난 미궁과 주인의 악연이 얼마나 깊은지, 이 자리에 선 자들 중 모르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그대들에게 양보할 수는 없을 것 같구나.”
얽히고설킨 거미줄 너머로 언뜻 보이는 거대한 미궁은 맹독 품은 지옥 거미들의 보금자리이자 가장 강대한 지저의 공작들 중 하나인 맹독 군주의 성이다.
그리고 그곳은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야 했던 비좁은 닭장과 토굴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저벅, 저벅.
문득 손을 잡아채는 이질적인 감촉에 김진우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그의 눈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거미줄이 엉켜 있는 것이 보였다. 침입자를 막아내는 치명적인 덫이자, 토굴꾼들을 옭아매던 족쇄, 지옥 거미의 거미줄이었다.
“그래. 이 거미줄 때문에 무던히도 많은 사람이 죽어갔었어.”
과거 몇몇 어른이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들은 고된 노예살이에도 굽히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었지만, 이 질기디질긴 거미줄을 이겨낼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거미줄을 벗어나지 못하고 미궁의 주변을 떠돌던 거미 초병의 먹이가 되어야 했다.
“어른들은 이 거미줄을 절대로 끊어낼 수 없다고 말했었지.”
물끄러미 자신의 손목을 휘감은 거미줄을 바라보던 김진우가 손을 휘저었다.
투둑.
수많은 토굴꾼이 탈출을 포기하고, 좁고 음습한 토굴 속에서 보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속박이 그 아무렇지도 않은 손짓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끊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도 내 발길을 막을 수 없구나.”
그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는 그림자, 거미 초병이었다. 진즉부터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챘을 이가 지금 공들여 만든 거미줄이 끊어지고 잘려지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찮다. 하찮아.”
그들은 더 이상 포식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겁에 질려 몸을 떠는 사냥감에 불과했다. 그의 시선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거미 초병들은 자신들이 친 거미줄에 몸이 묶인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갑작스레 방문한 이 흉악한 맹수가 부디 자신들을 모른 척하고 지나가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너희들 역시 그 가엾은 이들을 모른 척해 주지 않았지.”
나직한 읊조림과 동시에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피어오르더니, 금세 거미 초병들을 옭아맸다.
껙, 끼르르르.
마치 귀뚜라미가 우는 듯한 볼품없는 소리, 거미 초병들은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조차도 길지 않았다. 그들은 이내 탐욕의 권능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말았다.
저벅, 저벅.
김진우가 다시 나아간다. 그의 걸음을 따라 발자국처럼 남은 검은 기운이 사방을 에워싼 거미줄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동한 탐욕의 권능이 어둠 속에 숨어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수많은 거미 초병을 집어삼켰다.
끼륵! 끼르르르!
온 사방에서 거미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채 열 걸음을 걷기도 전에 끝이 났다.
침묵, 사방이 고요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침묵은 폭풍 전의 고요함과 같았으니, 발소리 없이 걷는 지옥 거미들이 저 미궁 안쪽에서 부산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나와라.”
김진우가 작게 속삭였다.
“나오지 않으면 미궁째로 먹어치울 것이다.”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미궁 너머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지옥 거미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가 그토록이나 증오했던 그들의 수장, 거미 공작이 있었다.
“오랜만이군.”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먼저 입을 연 것은 김진우였다.
“전에는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
그는 마치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복수가 부질없게 느껴졌다. 어차피 날 기억도 못 하는 놈한테 복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거든. 이 지저에서는 약한 게 죄니까. 그걸 깨닫고 나니 복수고 뭐고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들더군.”
거미 공작과 자신 사이에 무슨 대화가 필요할까. 복수조차 그 의미가 퇴색한 마당에 거미 공작은 이제 자신에게 있어 수많은 지저의 공작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너에게 있어 난 수많은 노예 중 하나가 아니라 공들여 관리해야 할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깨달았다. 네가 날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걸 말이다.”
우연처럼 흘러갔던 수많은 일들이 필연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거미 공작 역시 필연을 관리하던 관리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어느 순간이 되자, 너한테 신경 쓰는 시간조차 아까워졌거든. 지금의 나에게 넌 하찮고 하찮은 존재니까, 마치 예전에 네가 토굴꾼들을 그렇게 생각하던 것처럼.”
조금씩 그의 음성이 가라앉는다.
“근데 말이야.”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그것은 언어라기보다는 차라리 낮은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더군.”
김진우의 눈에서 안광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널 마주하고 나니 알겠다.”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거미 공작을 둘러싸고 있던 지옥 거미들이 카르륵, 거리며 울어댔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들은 이내 턱을 부딪치며 몸을 떨어야 했다.
그런 그들을 해일처럼 일어난 하이로드의 존재감이 짓뭉갤 듯 찍어 눌렀다.
“지금의 내가 너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온몸에서 탐욕의 권능이 일어나고,
“아마 난 여전히 복수가 하고 싶은 모양이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권능이 지옥 거미들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