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08)
던전 견문록-308화(308/319)
# 308
던전 견문록
제 309 화
108. 복수의 완성
처음에는 작은 의문이었고, 그 의문은 이내 회한이 되었다. 그리고 회한은 다시 분노와 증오가 되어 지옥 거미들을 덮쳤다.
끼르륵, 끼륵.
억센 발톱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막아내던 단단한 표피는 검고 불길한 기운에 물에 젖은 소금처럼 녹아내렸고, 단말마처럼 내지른 독액과 거미줄마저도 비산하여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탐욕의 권능은 수만의 크고 작은 지옥 거미를 집어삼켰다.
“말해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옥 거미들, 거기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거미 공작이 가학적인 음성에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의 너는 어떤 기분이지?”
거미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우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는 답답한 침묵조차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부족한가?”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거미 공작이 기다릴 틈도 없이 다시 한 번 탐욕스러운 괴물을 해방시켰다. 이번에 향한 곳은 거미들의 둥지였다.
아그작, 아그작.
거미들의 단말마조차도 먹어치운 끔찍한 괴물이 미궁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단단하던 외벽이 금세 퍼석퍼석하게 변해 무너져 내린다. 흘러내린 돌조각마저 모래처럼 흩날리다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한때 심층을 지배했던 강대한 공작의 미궁은 그렇게 순식간에 부서지고 쪼그라들어 이내 볼품없는 돌무더기가 되었다. 그 잔해의 안쪽에서 느껴지는 핵의 미약한 박동만이 미궁이 살아 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김진우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꺼지고 말 불씨였으니, 사실상 거미 공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족하는가?”
거미 공작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렇게 내뱉은 한마디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비통과 무력감에 젖어 있어야 할 음성은 뜻밖에도 무덤덤하기만 했다.
언젠가 그와 토굴꾼들에게 비참한 노예 생활의 종말을 고했던 그날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에게 고통을 준 감독관도, 그대의 지인들을 짓밟아 죽였던 전사들도 모두 그대에게 살해당해 더는 남아 있지 않다.”
카랑카랑한 음성 그 어디에도 수만 일족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나 하나, 사실상 그대의 복수는 이미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진우는 굳은 얼굴로 거미 공작을 바라보았다. 흉측한 얼굴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공작이 이 끔찍한 폭력 앞에서 비굴하게 애원할 생각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너는 만족스러운가?”
거미 공작은 거기서 더 나아가 마치 복수 따위 허망할 뿐이라고,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약하면 먹힌다. 약자의 모든 것은 강자의 것, 그대는 약했고, 나는 강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대가 나보다 강할 뿐이다. 먹고 먹히는 그 행위에 의미를 두는 그대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살려달라는 건가?”
“내가 그리 부탁한다면 나를 살려줄 것인가.”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만나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렇게 마주한 이상 거미 공작을 살려줄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대는 원하는 것을 취하라.”
뻔뻔하다 못해 당당하기까지 한 거미 공작의 태도에는 한 점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옥 거미들의 지배자이자 심층을 아우르던 맹독의 군주, 약자일지언정 비참한 패배자는 되지 않겠다.”
그 말을 끝으로 거미 공작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말처럼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무언의 시위인 듯했다.
하지만 아마 몰랐을 것이다.
“착각하고 있군.”
한때 자신의 미궁에서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아왔던 김진우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끔찍한 괴물로 성장했는지 거미 공작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네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니야.”
이때까지만 해도 거미 공작은 여전히 사태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말처럼 약자의 모든 것은, 강자의 것이다. 그게 설령 죽음일지라도 말이지.”
언제 다가온 것인지 말이 끝났을 때는 이미 김진우가 거미 공작의 코앞에 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당당한 죽음을 허락한 적이 없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먹이 뻗어 나갔다. 콰직, 듣기 거북한 소음과 함께 단단한 공작의 표피가 깨지고 체액이 튀어 올랐다.
거미 공작은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거구를 받치고 있던 다리는 전부 뜯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고, 검고 붉은 줄무늬 가득하던 껍질은 온통 깨어져 체액과 피로 범벅이 되었다. 오만하게 빛나던 눈알 역시 대부분 뽑혀 오직 한 쌍의 눈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키히이이.”
억센 턱은 진즉에 뜯겨져 나갔고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오직 고통에 찬 신음뿐이었다.
“지금의 너는 여전히 맹독의 군주인가.”
김진우는 마지막으로 한 쌍밖에 남지 않은 눈알 중 하나를 마저 터뜨렸다.
“크헤에에엑.”
“아니면 비참하게 바닥을 나뒹구는 패배자인가.”
거미 공작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을 꿈틀거리며 버러지처럼 버르적거렸을 뿐이다.
물론 그 강대한 힘만큼이나 오만한 공작이 처음부터 이리 비참하게 바닥을 뒹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리가 뜯겨져 나가고 껍질이 벗겨지는 고통을 무한정 참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맹독 섞인 거미줄을 뽑아내던 돌기가 뜯겨 나갔을 무렵부터 더는 공작의 체면을 생각할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무자비하고 잔인하기만 한 손속, 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비참하게 토굴을 전전하다 그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무참하게 살해당해야 했던 어른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어쩌면 부여잡을 수도 있었던 생을 기꺼이 내던졌고, 자신은 죽음을 먹고 성장해야 했다. 그렇게 그는 처음부터 가장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밤’과 어울리는 존재로 자라났다.
김진우는 손을 뻗어 깨어져 나간 거미 공작의 표피를 까뒤집어 살을 발라냈다.
“살려달라 애원할 생각이 없다면.”
산 채로 온몸이 해체되는 끔찍한 고통에 거미 공작이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러댔다.
“차라리 죽여달라 애원해라.”
그는 끔찍할 정도로 가학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온몸에 묻은 체액과 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게 내가 너에게 허락할 수 있는 유일한 죽음이다.”
공작의 위엄 따위는 이미 곤두박질친 지 오래였다. 거미 공작은 그의 말대로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 애원해야 했다. 하지만 바로 원하던 것을 얻을 수는 없었다. 온몸이 분해되어 머리만이 남고 나서야 그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만족하냐고?”
김진우는 마지막 남은 머리마저 짓밟아 으스러트렸다. 흉물스러운 잔해를 밟고 선 그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허망함에 후회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마침내 이룬 복수의 달콤함에 감격하여 흐느끼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당연히 만족스럽지.”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김진우가 그렇게 거미 공작을 분해하는 동안 도미니크를 비롯한 나가들은 흔들림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리가 뜯겨져 나가고 껍질이 벗겨지는 그 끔찍한 광경에도 눈을 돌리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적의 피로 목을 축이고 살점을 뜯어 배를 채우는 지저에서도 드물게 끔찍한 광경이라지만 저 가증스러운 거미가 주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 이상, 차라리 통쾌할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축하드려요, 주인님.”
“복수를 이룬 것을 축하드립니다!”
제 주인이 역겨운 체액과 선혈로 엉망진창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을 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축하의 말을 건넨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주인은 진짜 원흉이 남았다며 축하 인사는 뒤로 미루라 말했다. 그리고 다시 진군을 명령했다.
미궁을 부수고 핵을 흡수한다. 그 주인과 소환수들은 보이는 족족 먹어치운다. 그것이 김진우와 나가들이 진군하는 방법이었다.
그야말로 폭군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행보. 온 지저가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들의 걸음이 일직선으로 지저수를 향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 경로에 놓인 미궁의 주인들은 부리나케 미궁의 핵을 추출하여 피신하는 것으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개중에는 운 나쁘게도 이주 중에 흉신을 만나거나 다른 미궁의 주인과 조우하여 비참하게 종말을 맞은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살아남았다.
“너무 요란하게 움직였나 보군.”
근래 들어 만나는 미궁마다 텅 비어 있으니 그 내막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다시 살아 있는 미궁을 만나기란 쉽지 않겠네요.”
이제 막 식탐에 눈을 뜬 도미니크와 나가들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래도 진군 속도가 빨라진 건 다행이에요. 너무 오래 미궁을 비워놓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거든요.”
아이를 가진 탓일까, 근래 들어 부쩍 걱정이 늘어난 도미니크만이 이 길고 긴 원정이 어서 끝나기를 바랐다.
“이제 머지않았어. 지저수의 기운이 느껴진다.”
김진우는 그런 도미니크를 다독여 주며 나가들을 독촉했다.
그렇게 텅 비어버린 지저 걷기를 한참, 그들은 마침내 지저수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여기서 일단 정지. 더 이상 접근하면 휘말린다.”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하기에는 다소 떨어진 거리, 그는 나가들을 멈춰 세우고는 지저수를 살펴보았다.
지저수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처럼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고 나아가 권능을 완전히 지배하에 둔, 유일무이한 군주들의 계승자인 그조차도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저게 지저수…….”
도미니크와 나가들이 멀리 보이는 지저수를 향해 복잡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 압도적인 존재의 격은 경배해 마땅하지만 지저의 신비야말로 자신들을 배척하는 가장 큰 적이었다.
그리고 지저수는 그런 지저의 신비를 관장하는 요체 그 자체였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냥 접근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어지간해서는 자신감을 잃지 않는 안젤라가 질린 얼굴로 물었다.
“위시 스톤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다만 문제가 있다면 몸속에 잠들어 있는 ‘밤’이라는 놈이 위시 스톤만 보면 먹어치우지 못해 안달을 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기다려라. 그렇게 요란을 떨었으니 우리가 오는 것을 찬탈자가 모를 리 없다. 일단은 그녀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먼 곳에서 나부끼는 하얀 옷자락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