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09)
던전 견문록-309화(309/319)
# 309
던전 견문록
제 310 화
다시 만난 배덕의 군주는 여전히 작고 여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과는 다르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지난 전투에서 약삭빠르게 도망쳤던 야수왕이 그녀의 곁에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겨우 다 모였네.”
찬탈자가 인사 대신 꺼낸 한마디에 김진우의 시선이 사슬에 묶인 천장거인 군주를 거쳐 안젤라, 그리고 야수왕에게 이르렀다.
야수왕은 호되게 당했던 기억 탓인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다잡고는 고개를 뻣뻣이 드는 것이 나름대로 각오를 다잡은 눈치였다.
“위시 스톤은?”
눈으로 사방을 훑던 그가 그녀의 질문에 눈짓을 보냈다. 안젤라가 슬쩍 앞으로 나서 제 앞섶을 두들기곤 다시 뒤로 물러났다.
“보시다시피. 가장 믿을 만한 이에게 맡겼지.”
안젤라가 환하게 웃었고, 반대로 배덕의 군주는 서운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 가장 믿을 만한 이가 내가 아니라는 게 서글프지만, 이해해. 지금의 너는 나를 믿을 수 없을 테니까.”
그 가증스러운 태도에 김진우는 코웃음을 쳤다. 기만과 배신으로 점철된 삶, 그중에서도 가장 첨예하게 자신의 삶을 파고들어 뒤통수를 친 것이 바로 그녀였다. 단언컨대 그런 그녀를 다시 믿게 되는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해묵은 감정을 꺼내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살아남은 하이로드의 집결, 그리고 지저수와 위시 스톤, 지저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모든 요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직감적으로 오늘 이 자리에서 지저의 미래, 나아가 지상의 앞날까지 그 향방이 결정 날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는 어느 작은 단서 하나, 조짐 하나조차도 간과할 생각이 없었고, 그런 그의 감각에 지저수의 그늘에 몸을 숨긴 수도 없이 많은 기척이 잡혀 들었다.
– 주인님, 아무래도 함정인 것 같아요.
안젤라가 조용히 텔레파시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생기에 민감한 그녀이니만큼 이 자리에 매복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척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했다. 얼핏 느껴지는 매복자들의 수가 에인헤리들과 나가들을 합친 것 이상의 대군이었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어차피 쉽게 일이 마무리되진 않을 거란 사실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 야수왕은 신경 쓸 거 없다. 그는 늑대로 죽기보다는 여우로 살아남기를 바란 자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치열하게 나와 다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 하지만 그래도 수가 너무 많아요. 게다가 여기는 저들의 앞마당이라고요.
안젤라의 우려는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야수왕 따위야 어떻게 나오든 간에 중요한 것은 배덕의 군주였다. 그녀는 이 자리에 모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홀로 찬탈자라는 이름으로 군림해 왔고, 이곳은 그런 그녀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지저수의 숲이었다.
만약 함정을 준비했다면 그건 절대로 허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만큼 김진우도 찬탈자만큼은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우려하는 부분은 안젤라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힘으로 눌러온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제 와서 세의 열세로 움츠러들기에는 그의 힘이 너무나 독보적이었다.
수많은 이의 힘을 흡수해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만든 그는 이미 하이로드 그 이상의 존재였고, 그런 그의 무력은 설령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하이로드와 적대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대단했다.
그가 우려하는 게 바로 그 점이었다.
찬탈자라면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쉽게 접근을 허용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만회할 만한 비책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은밀한 종류의 함정일 것이다.
– 만약 일이 틀어지면 저는 위시 스톤이고 지저의 패권이고, 주인님만 챙길 거예요. 그때 가서 제가 주인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벌하신다 해도 저는 상관하지 않아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눈을 번뜩이며 사방을 살펴보던 김진우가 순간적으로 상황도 잊은 채 피식 웃고 말았다. 안젤라의 결연한 음성에 괜스레 든든해진 것이다.
하기야 붉은 성의 성주이자 이면층의 지배자인 그녀가 마음먹어서 벗어나지 못할 함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새삼 든든한 조력자의 존재에 알게 모르게 초조해졌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 제게 중요한 건 주인님의 안위뿐이니까요. 그 어떤 것도 주인님의 무사함에 우선할 수는 없어요.
– 믿을게.
짧은 대화를 그렇게 끝마친 김진우가 다시 배덕의 군주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이니만큼 뭔가 할 말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한 탓이다.
“나가들의 봉인이 깨어진 걸 보니 아무래도 밤의 정체를 깨달은 모양이야.”
“네가 지껄여댄 거짓의 실체를 하나 더 알게 되었지.”
그녀는 분명 나가들이 지저룡의 후예들이라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지저뱀, 요르문간드의 후예였고 밤의 일족이었다.
“도대체 네가 말한 것 중 진실이 하나라도 있긴 할까.”
그녀가 말한 거짓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저의 종말이 지상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라 말했었지만, 외눈박이 군주가 제 눈 하나와 바꾸어 본 지저의 멸망은 ‘밤’ 때문이었다.
거짓과 기만이 중첩되니 이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나는 너를 속이려고 한 게 아니야.”
거짓과 기만을 일삼고는 속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었다.
“네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지 않니. 네가 듣는 것은 네 몸속의 괴수 역시 듣게 되겠지. 그건 너에게도 나에게도 절대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란다.”
변명 같지도 않은 이야길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이 있다면 언제 본색을 드러내고 자신의 몸을 잠식하려 들지 모를 밤의 존재였다.
“그런 것치고 지금은 너무 말이 많군.”
“이제는 상관없단다. 거의 모든 준비는 끝이 났고, 선택의 시간이 왔으니. 그리고 그 증오스러운 괴물은 우리의 선택을 뒤집지 못할 테지.”
묘하게 들뜬 듯한 배덕의 군주는 마치 그간 지켜온 침묵에 대한 보상을 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다스럽게 떠들어댔다.
“멋대로 ‘우리’라고 지칭하지 마.”
김진우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너는 반드시 나에게 고마워하게 될 거야.”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확신을 갖게 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찬탈자의 얼굴에는 그만큼이나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었다.
“나중에 내가 감사를 하든 절을 하든 간에 일단은 길을 비켜줬으면 하는데.”
그는 성큼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오늘 내가 만나러 온 건 네가 아니라 지저수거든.”
냉정한 한마디에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막을 생각인가?”
“막으려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이제는 앞뒤 맞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차라리 익숙해질 지경이라 그는 무시하고 발을 내디뎠다.
“왜 지금에 와서야 내 앞을 막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한 번 접근한 적이 있다. 그때 찬탈자는 그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지저수의 존재를 처음 알려주고, 그를 안내하여 멀찌감치에서나마 지저수의 신성을 경험해 볼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때와 지금의 자신이 다른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다면, 뚫고 나가면 그만이다.”
그 선전포고와도 같은 한마디에 주변의 분위기가 완전히 변해 버렸다. 음산하게 떠돌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고, 침묵뿐이던 숲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나머지 대화는 잠시 머리를 식힌 뒤에 하자꾸나.”
드높게 치솟는 그의 존재감에 슬며시 물러난 찬탈자는 어느새 저 멀리 숲의 뒤편에 있었다.
“머리가 식을지, 더 달아오를지는 알 수 없지.”
웅성거리던 숲의 그림자 속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적을 본 김진우가 차갑게 웃었다.
그런 그를 따라 침묵하고 있던 나가들이 바짝 비늘을 세우고는 쉬잇, 하고 바람소리를 토해냈다.
“크아아아아!”
지난 전투에서는 동료와 합공을 하고도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야수왕이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위용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덩치가 무색하게 나무를 박차고 뛰어올라 단번에 대열의 한가운데로 뛰어내려 수십의 에인헤리를 짓뭉갰다.
그도 모자라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그 모습이 마치 양 떼 사이로 뛰어든 사자와도 같았다.
그 바람에 야수왕이 설쳐 대는 곳은 에인헤리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오직 전투만이 삶의 전부인 이들이라지만 하이로드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무너진 대열 틈으로 온갖 흉악한 형상을 한 맹수들이 뛰어들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쥐새끼 같은 놈.”
그런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김진우가 야수왕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이 교활하고 약삭빠른 하이로드는 철저하게 그와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혹 운 나쁘게 그와 맞닥뜨리더라도 바로 줄행랑을 치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찬탈자의 시선 탓에 탐욕의 권능을 함부로 꺼낼 수도 없는 그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약이 오를 지경이었다.
“야수왕의 또 다른 이름은 숲의 지배자랍니다. 비록 이곳이 그가 지배하던 야만의 숲은 아니겠지만,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와 풀이 그를 더욱 강하고 민첩하게 만들어주고 있어요.”
잊었던 전승을 깨달은 이후로 부쩍 해박해진 도미니크가 야수왕의 그러한 행태를 보며 주인을 위로했다.
“게다가 야수왕이 혼자 아무리 날뛰어봤자 전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야수왕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에인헤리들을 휘저어대고 있지만 그건 전장 전체로 보면 어디까지나 일부에 국한된 우세일 뿐이었다.
전장은 너무나 넓었고 야수왕은 한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가 빠져나간 자리의 에인헤리들은 금세 대열을 복구했고 맹수의 군대를 밀어냈다.
짐승들은 사나웠지만, 전귀들을 당해낼 수 없었으니 시간이 갈수록 전세가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이상해.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김진우는 힘겹지만 조금씩 전진해 나가는 에인헤리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이 의미 없는 전투의 목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뭔가 함정이라도 있는가 싶었지만, 딱히 이렇다 할 위협도 없이 지루한 소모전만 이어지게 되자 의문이 든 것이다.
야수왕은 자신을 막아설 생각이 없어 보이고, 배덕의 군주 역시 딱히 전면으로 나설 생각을 않는다. 죽어 나가는 것은 오직 소환수들뿐이었으니 전투는 시종일관 끝이 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저들을 무시하고 나아갈 수는 없어요. 지저수가 과연 주인님의 말대로 그렇게 마냥 호의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만약을 대비해야 해요.”
불필요한 전투는 피하고 신속하게 허를 찌르는 게 장기였던 그가 이 소모적인 전투를 이어나가야 하는 이유였다.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를 지저수의 압도적인 신성을 생각하면, 대면하기 전에 최대한 외부의 위협과 변수를 배제해야 했다. 그리고 야수왕과 찬탈자의 군대는 충분히 상황을 바꿀 변수가 되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