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10)
던전 견문록-310화(310/319)
# 310
던전 견문록
제 311 화
머리가 무거웠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보다 찬탈자의 꿍꿍이를 알 수가 없다는 게 더욱 그를 고민스럽게 만들었다.
“나가들을 투입할까요.”
도미니크의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나가들을 투입한다면 더욱더 승기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다 떠안게 된 에인헤리들의 존재와는 달리 그들은 함부로 낭비할 수 없는 그의 진짜 전력이었고, 그는 혼전 속으로 나가들을 밀어 넣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저쪽도 아직 여력이 있어. 나가들을 투입하는 건 저들이 진짜 힘을 드러낸 후라도 늦지 않아.”
게다가 저쪽 역시 찬탈자의 군대만큼은 아직 본격적으로 전장에 뛰어들지 않고 있었다.
섣불리 주력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예비대로 두어 이후의 변수를 대비하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야수왕이 날뛰어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군.”
다행스럽게도 그가 지금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이 꼭 나가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안젤라.”
그의 부름에 대기하고 있던 안젤라가 곧장 다가왔다.
“흉신들에게 전해. 보상으로 약속했던 천장거인 군주 말고도 또 다른 먹잇감이 이곳에 있다고.”
그는 마침내 아껴왔던 흉신들을 참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한 번 써먹은 적이 있는 만큼 찬탈자도 그 존재를 알고 있을 터, 더 시간을 허비하느니 그들을 투입해 전투를 빨리 마무리 짓는 게 이득이었다.
그의 말에 안젤라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쿵쾅거리는 흉신들 특유의 요란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예의 그 붉은 거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부디 그대가 명예롭게 약속을 지키기를 바란다.]“밥상 차려놨으니까, 일단 눈앞의 것들부터 먹고 이야기하지.”
그는 시큰둥하게 붉은 거인의 말을 받아주고는 야수왕을 눈으로 쫓았다.
“망할 놈들! 도대체 어찌 구워삶았기에 이렇게 개처럼 저자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것이냐!”
야수왕은 갑작스러운 흉신들의 난입에 가뜩이나 밀리던 전세가 확연이 기울자 분통이 터지는지 욕설과 저주를 퍼부어댔다.
“일단 저쪽은 대충 해결됐고.”
김진우는 야수왕의 저주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멀리 찬탈자의 동태를 살폈다.
그녀는 흉신들의 난입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지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고, 그녀의 군대 역시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뭘 기다리는 거냐.”
그 모습이 꼭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 그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야수왕이 필사적으로 날뛰어댔지만, 기울어가는 전세를 다시 뒤집을 수는 없었다. 수많은 짐승이 흉신의 식탐에 살해당하고, 에인헤리들의 돌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음.”
그런데 어쩐 일인지 평소라면 진즉에 몸을 뺐어야 할 야수왕이 끝까지 버티는 바람에 전투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다만 수십의 흉신을 위맹하게 몰아세우는 야수왕조차도 전선이 마구 밀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던지라 어느새 전장이 저 멀리 이동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 작은 소요는 커다란 변화가 되었고, 빽빽하게 늘어서 있던 나무들이 흉신들을 향해 그 가지와 뿌리를 뻗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납게 날뛰어대던 이들은 그 보잘것없는 가지와 뿌리를 피해 물러나며 비명을 질러댔다.
[지저수가 또다시 우리 앞을 막는구나!]정작 지저수는 그대로인데 어쩐 일인지 붉은 거인은 지저수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무심코 넘겼지만 지저수를 둘러싼 이 숲 역시 그 일부인 듯했다.
[어찌하여 네놈은 우리를 이다지도 거부하는 것이냐! 무저갱 또한 지저의 일부가 아니냔 말이다!]그 울분에 찬 포효를 보니, 아무래도 과거에도 지저수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던 모양이다. 가뜩이나 붉은 얼굴을 더욱더 붉게 만든 거인이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더는 참을 수 없다.]그런데 그 화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붉은 거인과 흉신들이 뻗어오는 가지와 뿌리를 피해 김진우가 있는 쪽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약속했던 하이로드의 육신을 다오! 그리하면 저 저주스러운 지저수의 영역을 넘어 그대의 적을 말살하리라!]김진우는 코웃음을 쳤다.
“실적이라도 있어야 선금을 주지. 그대들이 한 게 무어란 말인가. 나의 군대가 이룬 공을 감히 그대들이 세운 것이라 말할 참인가.”
흉신들의 활약 덕에 전선을 밀어 올릴 수 있었지만, 애초에 그 정도의 결과물은 그들 없이 에인헤리들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성과였다.
단지 그 시간을 앞당겼을 뿐이니, 그의 입장에서는 흉신들에게 딱히 대가를 지급할 이유가 없었다.
“어린애처럼 칭얼대지 마라. 원하는 것이 있다면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고 쟁취해 내라.”
그리도 하이로드의 육신을 원한다면 당장 가서 야수왕의 목을 치라 말했다.
“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건대 이번에는 틀림없이 대가를 치르겠다. 하지만 그전에 그대들이 합당한 결과를 보여주어야 할 거야.”
모멸감에 몸을 떨던 붉은 거인이 잠시 저 멀리 가지를 흔들어대는 숲과 김진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어느 쪽이 더 상대하기 쉬울지 저울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 자신 있다면 그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
김진우는 그 노골적인 탐색의 시선에도 오히려 웃어 보였다. 하지만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그의 기세는 끝도 없이 피어올라 일시적이나마 지저수의 존재감을 뒤덮을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그대의 몫이다.”
결국, 그 기세를 이겨내지 못한 붉은 거인이 몸을 돌려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지저수 본체도 아닌 그 언저리의 숲을 상대하는 게 눈앞의 괴물을 상대하는 것보다 낫다 판단한 모양이다.
[빌어먹을 지저! 이놈이나 저놈이나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는구나!]“애초에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였으면, 원래 살던 곳에서 기어 나오지를 말았어야지.”
생각하기에 따라 흉신들 역시 나가들과 그 뿌리가 같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김진우의 시선에는 확연한 온도 차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보기에 저들은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수하로 거둘 가능성이 전무했던 탓이었다.
[크아아아아아!]“저들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군요.”
과거 자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인지 도미니크가 드물게 안쓰러운 얼굴로 흉신들을 동정했다. 하지만 굳이 나서서 저들에게 선심을 베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만약 저들이 나가들과 같았다면, 조금은 생각을 달리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밤이 깨어나면 가장 먼저 나를 배신할 자들이다. 옛 주인을 잊지 못하는 자들을 품을 정도로 내 품은 넓지 않아.”
김진우의 본심이었다. 그는 기왕지사 상황이 이렇게 된 김에 나중을 대비하고자 했고, 흉신들을 압박한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언젠가 밤이 깨어났을 경우, 그 힘이 될 게 빤한 흉신들을 찬탈자와 상잔시키기로 진즉부터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어쩌면 저들 역시 그 속내를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토록이나 필사적인 것은 하이로드의 힘이 지닌 그 무지막지한 가능성 때문이리라.
흉신들은 패퇴되었다. 그들은 결국 지저수의 힘을 빌려온 숲을 넘어서지 못했다.
온갖 부정하고 불길한 것들을 정화시키는 그 압도적인 신성 앞에서 그들의 육신은 무너지고 분해되어 결국 온데간데없어졌다.
하지만 흉신들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죽음조차 허락받지 못한 가엾은 망령들이었고, 무저갱 어딘가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살아난 그들은 과거보다 조금은 약해져 있을 것이었다.
“흉신들을 끌어들인 건, 그다지 좋지 못한 방법이었단다.”
흉신들이 물러가고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장.
배덕의 군주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지저수가 우리의 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 같으니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던 김진우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너, 설마…….”
환하게 웃어 보이는 찬탈자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가 흉신들을 이용할 것을 예상했고, 지저수의 지척에서 그들을 불러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소모적인 전투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흉신들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지저수의 관심을 부르고 말았다.
“맞아. 나는 지저수의 관심이 필요했단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작은 존재였고, 지저수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지.”
곧게 서 있던 지저수가 조금씩 허리를 굽혔다.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아찔한 광경, 그 본체만큼이나 거대한 가지와 이파리들이 쏟아질 듯 머리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다르단다.”
찬탈자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한결 낮게 가라앉았다.
“너는 지저수가 정한 파수꾼의 계승자이자, 그토록이나 경계했던 지저뱀의 현신이니까.”
김진우는 거대한 신성이 자신을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받을, 너만큼이나 흥미로운 존재가 이 지저에 또 어디 있을까.”
음습한 지저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스러운 기운이 사뿐하게 사방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의 작은 진우야, 절대 잊지 말렴.”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 모든 일은 다 너를 위한 것들이란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너도 곧 알게 될 테지. 그러니 지금은 부디 내 말을 따라주렴.”
“크윽.”
멋대로 떠들어대는 그녀를 향해 뭐라고 쏘아붙이기도 전에 신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갑작스레 한쪽 손등이 타는 듯한 통증이 그를 덮쳐 온 것이다. 지저에서 온갖 험한 꼴을 보아온 그조차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고통에 머리가 핑 돌고 귀에 이명이 내려앉았다.
“절대로 그 손에 쥔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를 놓지 말렴. 그것만이 네 안의 괴수를 쫓아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다.”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그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 아득한 와중에도 귓가에 박혀들었다.
“밤은 방랑을 집어삼켰고, 방랑은 제 몸을 옮기는 재주가 있단다. 밤이 네 몸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능력 덕이지.”
“가, 갑자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하지만 그런 밤이라면 반대로 네 몸에서 스스로 떠나는 것도 가능할 거야.”
“뭐?”
생각지도 못한 찬탈자의 말에 김진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