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11)
던전 견문록-311화(311/319)
# 311
던전 견문록
제 312 화
호시탐탐 몸을 빼앗으려고 드는 밤의 존재는 분명 위협적이었다. 괴물의 끝없는 탐욕마저 품고 말리라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아. 분명 너는 흥미로운 존재지만 지저수는 너에게 두 번이나 관심을 주진 않을 테니까.”
배덕의 군주는 그런 괴수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 말했다.
“무슨 개소리를…….”
김진우는 명료해진 정신 덕분에 몇 배는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모르겠니? 지금이야말로 네가 너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다.”
성큼성큼 다가서는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니 선택하렴.”
안젤라가 배덕의 군주를 막아섰다. 나가들 역시 지저수의 신성에 짓눌린 얼굴을 하고서도 필사적으로 그 앞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금세 그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주인님!”
새된 비명 소리, 강렬한 고통과 의식을 짓뭉개는 지저수의 신성을 견뎌내며 그는 간신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 끔찍한 괴물을 끌어안고 평생을 불안에 떨며 살아갈 것인지.”
새하얀 얼굴이 불쑥 나타나 속삭였다.
“그도 아니면 네 안의 밤을 몰아내든지.”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당장은 하이로드의 힘을 흡수하지 않는 것으로 괴수의 본성을 억누르고 있다지만, 언제 어느 때 상황이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괴수를 몰아낼 수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다.
“내가 도와줄게.”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나 역시 너와 같은 하이로드, 밤은 기꺼이 나에게 옮겨올 거야.”
그녀의 새하얀 손은, 어두운 토굴 속에서 서슴없이 잡았던 그때처럼 따스해 보였다.
“그러니 나에게 짐을 넘기고 너는 이제 그만 편히 쉬렴, 나의 작은 진우야.”
그리고 그녀의 음성 역시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다정하고 따뜻했다.
“큭…….”
눈앞이 흐릿해진다. 고통 때문이 아니다. 의식 자체를 짓뭉개는 거대한 신성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이 압도적인 신비 앞에서 그는 생각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자, 내 손을 잡으렴. 그럼 모든 게 끝이 날 거야.”
괴수의 탐욕마저도 버텨낸 철옹성과도 같은 그의 의지력이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의지를 만나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그 아득함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녀의 속삭임뿐이었다.
“너는 지저수를 지키는 충실한 파수꾼이 되어 신비의 가호를 받을 거고, 괴물은 네 안에서 완전히 사라질 거란다.”
그녀의 말은 미치도록 유혹적이었다. 손을 뻗어 저 작은 손을 잡기만 하면 이 끔찍한 고통도, 운명도 벗어날 수 있다. 그 사실이 샘물 만난 사막의 나그네처럼 그를 절실하게 만들었다.
“으으…….”
이제는 뭐가 뭔지도 모르게 되어버린 그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간다.
***
“주인님!”
도미니크가 비명을 질렀다. 공고히 이어져 있던 주인과의 사고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닥가닥 끊겨 단편적인 사념만이 전해져 올 뿐이었다. 그렇게 밀려드는 것들마저도 고통, 고통, 또 고통뿐이었다.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거라 생각했던 주인이 지저의 신비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필사적으로 몸을 내달려 보지만, 정작 비루한 육신은 대지에 뿌리박힌 듯 나아가지 않았다.
“이익!”
찬탈자가 주인에게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한 걸음에 달려가 그의 앞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지저의 의지가 이 자리에 개입한 지금, 그 적대감 가득한 신성 앞에 버티고 서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온몸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안젤라!”
그 흔한 냉기 주문 하나조차 외울 수 없는 상황,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담아 금빛 머리의 흡혈귀를 바라보았다.
“아아…….”
이면층을 넘나들며 그 신출귀몰함을 자랑하던 흡혈귀가 절망에 찬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익!”
마지막 희망마저 무참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거대한 의지마저 거스르고 마침내 몸을 움직여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수십 가닥의 뿌리가 몸을 옭아매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놔! 놓으라고!”
그 아름답던 꼬리의 비늘이 깨지고, 피부가 찢겨져 나갔다. 그렇게 엉망진창의 꼴이 되어서도 그녀는 발버둥을 멈추지 않았다.
그 필사적인 몸짓에 곁에 있던 안젤라가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말했다.
“지저수는 우리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걸 원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하이로드에 불과한 배덕의 군주가 이면층을 오고 가는 자신의 권능마저 제한할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자신이 묶인 것은 찬탈자가 아닌 지저수의 의지일 것이다.
지금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인님이!”
도미니크가 그런 안젤라를 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그녀의 눈에 찬탈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이름만 무수히 들었던 존재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놀라울 정도로 선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작은 뒷모습은 마치 사냥감을 눈앞에 둔 뱀의 그것처럼 음험하고 탐욕스러웠다.
경각심에 현기증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가들은 적대감 가득한 신성 앞에서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을 뿐이고, 전장을 휩쓸던 에인헤리들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망연자실하게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배제, 지저수의 의지에 떠밀려 그들은 주변인이 되어야 했다.
“아아…….”
찬탈자의 작은 등에 검은 날개가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마침내 독니를 드러낸 뱀과 같았다.
“주인니이이이임!”
고개 숙였던 주인이 간신히 고개를 든다. 몽롱한 눈동자에 의지라고는 한 올도 보이지 않았고, 서서히 들려 올라가는 손길이 망가진 인형처럼 덜그럭거린다.
“그 끔찍한 괴물을 끌어안고 평생을 불안에 떨며 살아갈 것인지, 그도 아니면 네 안의 밤을 몰아내든지.”
찬탈자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내가 도와줄게.”
찬탈자는 주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 역시 너와 같은 하이로드, 밤은 기꺼이 나에게 옮겨올 거야. 그러니 나에게 짐을 넘기고 너는 이제 그만 편히 쉬렴, 나의 작은 진우야.”
따뜻했지만 절대로 선량하지만은 않은 그 속삭임에 도미니크가 몇 번이나 외쳤다. 절대로 그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계속해서 외쳐 댔다.
“자, 내 손을 잡으렴. 그럼 모든 게 끝이 날 거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음성은 닿지 않은 듯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주인은 오직 찬탈자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너는 지저수를 지키는 충실한 파수꾼이 되어 신비의 가호를 받을 거고, 괴물은 네 안에서 완전히 사라질 거란다.”
끔찍한 탐욕과 흑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속삭임. 비로소 도미니크는 알게 되었다, 주인이 알 길이 없다며 내내 고민해 왔던 찬탈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그녀는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찬탈자가 원하는 것은 ‘밤’의 권능이었다.
“자아, 더는 망설이지 말렴. 네 짐을 나눠 들어줄 내가 이곳에 있잖니.”
마지막 숨통을 조이듯 한결 더 따뜻해진 음성, 주인이 손을 내민다.
“그래. 그것으로 네 고난도 모두 끝이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 탐욕을 숨길 수는 없었던 것인지 미세하게 떨리는 음성 끝에 음험함이 묻어난다.
“주인님! 절대로 그 말을 들어서는 안 돼요!”
스스로가 괴물이 되기를 바라는 찬탈자, 그녀가 그 힘으로 무엇을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모두에게 파멸이 찾아올 거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래서 도미니크는 필사적으로 주인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 간절함이 마침내 주인에게 닿은 것일까. 느리지만 끊임없이 나아가던 주인의 손길이 멈췄다.
“쯧.”
심기가 상했는지 찬탈자가 말간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티 없이 맑은 눈동자에 떠오른 작은 증오가 그렇게 끔찍할 수가 없었다. 그 노골적인 살의와 악의 앞에서 목이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차왔다.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감히…….”
도미니크가 입을 다물자 찬탈자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주인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멈춰 있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침내 맞닿은 두 손, 수줍게 접혀 있던 찬탈자의 검은 날개가 확 하고 펼쳐지고 가느다란 허리가 환희로 휘었다.
“아아…….”
절망적인 상황, 고대부터 이어져 온 증오와 광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새로운 괴물의 탄생에 도미니크와 안젤라가 탄식을 내뱉었다.
“음?”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어째서! 어째서지!”
이제까지의 차분한 말투와는 확연히 다른 새된 어조, 찬탈자가 당황해 외쳤다.
“왜, 나에게 넘어오지 않는 거냐!”
자애의 가면을 벗은 찬탈자는 추악했고, 그 음성이 더는 따뜻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았다. 그저 음험하고 차가울 뿐이었다.
“왜기는.”
그 가운데 작지만 힘 있는 음성이 끼어들었다.
“이미 이사 갈 집을 봐뒀으니까. 새로운 집은 필요가 없거든.”
“주인님!”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나마 평소의 당당함을 찾은 주인이 찬탈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찬탈자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더는 그가 알고 있던 소희의 선량한 것이 아니었고, 다른 하이로드들이 그러하듯 탐욕스럽고 추악하기만 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해 온 친구가 있거든.”
그런 그녀를 보며 김진우가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렇게 내민 그의 손이 마치 검은 장갑을 낀 것처럼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는 너무 오래돼서 가끔은 있는지 나조차도 까먹곤 하지만 말이지.”
“그게 무슨…….”
완전히 무너져 버린 표정을 한 찬탈자를 보며 김진우가 웃었다.
“기생마.”
“설마…….”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것일까. 찬탈자의 얼굴에 경악과 불신이 떠올랐다.
“맞아. 밤은 지저의 신성을 피해 이 작은 벌레에게 옮겨갔다.”
그의 시선이 잠시 그녀를 벗어나 거대한 물푸레나무를 향했다. 쏟아지는 신성과 거대한 의지는 여전했지만 더는 그 성스러움이 불편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김진우가 다시 찬탈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그 바닥을 드러낸 표정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마침내 복수를 완성했다는 성취감에 온몸이 짜릿짜릿할 지경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복수는 끝이 나지 않았으니, 진정한 시작은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