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12)
던전 견문록-312화(312/319)
# 312
던전 견문록
제 313 화
김진우는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밤이 자신의 육신을 잠식하려고 들었던 그 무렵부터 그는 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강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기생마.
이 작은 벌레는 숙주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당연하게도 숙주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해 내고야 마는 충실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 기생마에게 밤을 이식한다면 어떻게 될까. 굴종의 맹세를 하고도 끝내 굽히지 않았던 사자들의 왕, 발리셔스가 나가 마법사의 육신에 종속된 후 그에게 충성을 다했던 것처럼 밤 역시 종 자체의 한계에 얽매이게 되지 않을까.
제법 그럴싸한 가정이었고, 그는 실험해 볼 가치가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의 고민을 거듭해 보아도 콧대 높은 밤을 작은 벌레 속으로 욱여넣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다.
[지저의 신비는 지저를 살아가는 수많은 존재가 조우하기를 그토록이나 염원하는 축복이지만, 그게 모든 이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밤 역시 그 예외 중 하나입니다.] [지저의 신비는 무저갱의 유배자들에게 특히 가혹합니다. 그리고 밤은 그런 무저갱의 지배자입니다.] [당연하게도 지저의 신비는 밤이 이 지저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지저의 신비를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그 존재의 격차가 너무나도 큰 탓에 밤은 지저의 신비를 증오하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지저의 신비가 바로 코앞에서 신성을 쏟아내며 관심을 보이는 것은 밤에게도 무척이나 끔찍한 일이었습니다.]지저수의 신성을 접하게 된 것이다.
[지저수는 당신이란 존재 자체에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오래도록 헌신해 왔던 파수꾼들의 왕, 외눈박이 군주의 기운을 지닌 당신은 지저수에게 반가운 존재입니다.]본의 아니게 얻게 된 지저수의 관심은 결코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지저수가 당신의 안에 깃든 부정한 존재를 알아차렸습니다.] [온갖 하이로드의 기운을 집어삼켜 완전히 변해 버린 밤은 전과는 완전히 달랐고 보다 은밀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저수가 당신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된 이상, 그 은밀함은 당신과 밤의 존재를 은폐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지저수가 밤의 기운을 느끼고, 당신을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쏟아지는 신성 속에서 그는 존재가 붕괴되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자아가 무너지고, 스스로가 거대한 법칙에 휘말려 사라지는 듯한 느낌, 설상가상으로 지저는 그를 거부하고 배척했고 이곳을 떠도는 한 줌 공기조차 그에게 허락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존재를 위협받고 나서야 그는 왜 밤과 흉신들이 그토록이나 하이로드의 힘을 탐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지저수의 눈을 가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지저수는 당신이 아직까지 밤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 끔찍한 탐욕에 먹히지 않은 정신력을 높이 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아직 본신의 힘을 되찾지 못한 밤과 함께 소멸되었어야 할 당신이 목숨을 부지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호의적인 메시지와는 달리 지저수는 얄궂게도 시험을 멈추지 않았다. 압도적인 신성에 노출된 그는 여전히 의식이 혼미했고, 위태로웠다.
그저 작은 위안이 있다면 유독 그의 주변에만 희박해졌던 공기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고, 막혀왔던 숨통이 겨우 트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통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보다 밤에게 치명적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예전에 포기했던 기생마와 밤의 융합을 시도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지저수의 신성에 그가 망가지고 말 것이라고 지레짐작이라도 한 것인지, 밤은 너무나도 쉽게 기생마에게 옮겨갔다.
아마도 밤은 작은 벌레 속에 몸을 숨겨 또 다른 숙주라도 찾아낼 생각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그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비록 밤이 기생마에게 옮겨갔지만, 그가 지닌 힘은 사라지지 않았고, 탐욕의 권능 역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권능을 사용해 방랑 군주의 파편이자 흔적인 위선자의 가면을 먹어치웠다.
그렇게 그는 방랑 군주의 권능 일부를 얻게 되었다.
육신을 강탈하여 존재를 이전하는 기기묘묘(奇奇妙妙)한 힘, 존재 그 자체를 다루는 방랑 군주의 고유 권능이다.
그리고 그는 그 능력을 사용해 기생마가 또 다른 숙주를 찾아 빙의할 수 없도록 그 존재 자체를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밤이 기생마를 조종하여 가장 가까운 곳의 숙주를 찾으려 합니다. 마침 배덕의 군주가 그 앞에 있습니다.] [밤이 기생마의 빙의 능력을 사용해 당신을 벗어나려고 시도합니다.] [기생마의 빙의 능력이 발현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행한 존재 안착의 능력이 기생마의 능력을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기생마는 당신에게 종속된 존재입니다. 아무리 강대한 밤이라고 해도 종의 근원에 관계된 제약을 완전히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밤에게 조종당했던 기생마가 다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밤의 충동질이 더는 먹혀들지 않습니다.] [밤이 기생마를 벗어나려 합니다.]역시나 탈출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밤의 탈출은 성공하지 못했다.
[지저의 신비가 개입했습니다. 미숙한 능력의 발현으로 불안정하던 존재의 안착이 지저의 신비가 개입한 덕분에 완전히 안정화되었습니다.] [밤은 기생마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메시지가 떠오른 직후, 흐릿했던 의식이 명료해졌다. 영혼 자체를 짓뭉개는 듯하던 신성의 압박이 더는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이다.
“왜, 나에게 넘어오지 않는 거냐!”
그 순간 찬탈자의 잔뜩 날 선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지저의 신비는 나에게 기회를 주려는 모양이다.”
김진우의 말에 찬탈자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꾸며낸 듯한 따뜻함도 선량함도 더는 그녀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설마, 처음부터 노린 거야?”
한참 만에 꺼낸 질문, 감미롭던 속삭임은 이제 음험한 협잡꾼의 증오가 되었다. 본색을 드러낸 찬탈자의 표정이 그렇게 가관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굳이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냉소를 참지 않았다.
“처음부터 노렸던 건 아니야. 그 정도로 상황이 단순하진 않았으니까.”
복원이 진행된 후부터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졌다. 고대의 망령이 부활하고 다시 그들의 미몽이 현실에 도래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의 틈바구니에 껴서 그는 그 흐름을 좇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런 상황에서 거짓과 기만을 일삼던 그녀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은 차라리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는 아홉의 거짓 중에 하나의 진실을 교묘히 섞을 줄 아는 교활한 협잡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덕분에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어.”
눈과 귀를 현혹하는 온갖 거짓 사이에서 그는 단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그에게는 있고 그녀에게는 없는 것, 그 안에 진실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답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밤, 스스로를 위협하는 천형이자, 그를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들어준 가장 큰 밑천, 그것이야말로 이 넓은 지저에 오직 그만이 지닌 유일무이한 힘이었다.
“원래 욕심 많은 놈들은 누가 제 것에 손대는 걸 끔찍할 정도로 싫어하거든. 그래서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지, 상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넋 놓고 있다가는 아차 하는 사이에 빼앗겨 버리고 말 테니까.”
그리고 그는 지저에서 제일가는 욕심쟁이였다. 그렇기에 그는 만약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가장 탐냈을 무언가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뭐, 어찌 됐건 간에 네가 끌어들였던 지저의 신비 덕분에 난 오히려 밤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됐어. 비록 하찮은 벌레지만 기생마는 제법 충성스러운 놈이거든.”
김진우의 느긋한 태도에 찬탈자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리고 밤은 스스로가 새로운 숙주를 찾아내기 전에는 꼼짝없이 내가 원하는 언제 어느 때고 제 힘을 빌려줘야 하는 신세가 된 거지. 놈이 자리 잡은 기생마는 원래 그런 존재니까.”
그리고 밤은 새로운 숙주를 찾아낼 수 없으리라. 그가 지저에 발붙이고 있는 한, 지저의 신비가 절대로 밤이 탈출하도록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아, 맞다. 중요한 이야기를 잊었네.”
과장되게 손뼉을 치며 말하는 그의 눈빛이 번쩍, 푸른 광망을 토해냈다.
“밤이 기생마에게 묶여버린 지금.”
검게 변색된 그의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나에게는 더 이상 그 어떤 제약도 없어.”
순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배덕의 군주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다, 뒤늦게 그 뜻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날개를 펼쳐 들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으니, 훌쩍 날아올랐던 그녀의 발목을 검은 기운이 붙잡고 있었다.
“네 덕분에 편식 심하던 고약한 습관을 고칠 수 있게 됐으니까.”
절망과 공포, 그리고 분노로 범벅이 된 얼굴, 김진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난 단지 네가 그 끔찍한 괴물에게 고통받는 것이 싫었을 뿐이야.”
본색을 드러냈던 찬탈자가 다시 선량한 소녀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녀는 가증스럽게도 눈물까지 흘려가며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해서였노라 그에게 애원했다.
“언제 몸을 강탈할지 모를 괴수와 품고 산다는 건 끔찍한 일이란다. 나는 네가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어.”
그 모습이 얼마나 간절하고 애틋한지 철의 심장을 지닌 사내라도 흔들리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하지만 김진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는 푸른 광망이 넘실거리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고, 시종일관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그녀는 밤의 권능이 욕심났던 것만큼은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였노라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과거의 일마저 들추어내며 오누이처럼 좋았던 자신들이 어쩌다 이렇게 적으로 만나게 되었느냐 한탄하기까지 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넌 애초부터 살아남을 수 없을 거야.”
구차하고 궁색하다. 그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시간을 찬탈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군림해 온 하이로드의 모습치고는 지나치게 비굴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처리하기 전에 앞서 처치한 야수왕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흡수당하던 꼴을 눈앞에서 지켜보았으니, 필사적인 태도도 이해가 갔다.
다만 그렇게 구차한 모습을 보일수록 그녀에게 기만당하고 농락당했던 스스로에게 환멸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만. 더는 듣고 싶지 않군.”
그래서 그는 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차라리 당당하게 군주로 죽어라.”
“정말 냉정하구나.”
사형선고와도 같은 그 말에 찬탈자가 대꾸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방금 전과 달랐다.
“당당한 죽음이라는 게, 이 지저에 존재하긴 할까? 너는 어떨까. 죽음 앞에서 너도 초연할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태도는 온데간데없다. 그녀는 어느새 여상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능력이 되지 않아 알 수 없구나. 나는 너를 죽음의 문턱까지 인도할 힘이 없으니까.”
그 태도 변화가 미묘하게 거슬려 그가 이제라도 손을 쓰려고 하는데, 그녀가 불쑥 말했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을 만들 수는 있겠지.”
채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숲의 한켠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너와 예전처럼 지낼 수 있기를 바랐어. 하지만 너는 도무지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저들이 왜 여기에!”
절대로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이들의 등장, 김진우가 전에 없이 격앙된 음성으로 외쳤다. 그런 그를 보며 찬탈자가 작게 속삭였다.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려놓을 기회를 마다한 것은, 진우, 바로 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