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13)
던전 견문록-313화(313/319)
# 313
던전 견문록
제 314 화
109. 선택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아버지, 어머니.”
차갑게 식어버린 손끝에선 제 몸이 아닌 것처럼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굳어버려 잘 움직여지지 않는 턱을 억지로 움직여 내뱉은 한마디가 입속에서 웅얼거리다 이내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입 밖으로 채 나오기도 전에 어둠에 먹혀 버린 음성은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으으…….”
그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침묵에 짓눌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을 뿐이다.
창백한 안색, 어둠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해 혼란스럽게 움직이는 눈동자, 가슴으로 내쉬는 가쁜 숨결이, 지금 그들이 느끼고 있을 공포와 절망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며 오는 가슴에 막혔던 목이 뚫리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새된 소리에 갈 곳 못 찾아 헤매던 그들의 눈동자가 대번에 한곳으로 쏠렸다.
“지, 진우?”
“진우야!”
잔뜩 갈라지고 쉬어버린 음성, 인간의 시력으로는 분간할 수 없는 어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번에 아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어머니! 아버지!”
김진우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오, 오지 마라! 진우야! 함정이다!”
“진우야! 오지 마라!”
바로 전 수천수만의 죽음이 휩쓸고 간 전장, 생경한 노린내와 역겨운 피 내음이 얼마나 공포스러울까. 지상의 것들을 밀어내는 지저의 음험함과 적의가 얼마나 두려울까.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는 살려달라는 말 대신, 구해달라는 말 대신, 오지 말라 외쳤다.
그 안에 담긴 무한한 염려를 느낀 순간 김진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쳐든 분노가 순식간에 몸을 키워 거대한 괴물이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흘러나온 것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차분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제가 구해드릴게요.”
“아아, 그러지 마라. 진우야, 그러지 마라. 우리는…….”
“허튼 생각 말고, 도망쳐라. 진우야, 우리는 괜찮다.”
차라리 막무가내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들의 안위를 도외시하는 부모님의 음성에 그의 낯빛이 차게 식었다.
“너인가.”
그런 그의 시선이 어느새 부모님을 스쳐 바로 곁을 지키고 선 여인을 향했다.
“네가 저분들을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냐.”
지목당한 여인이 그 섬뜩한 분노에 몸을 덜덜 떨었다. 하지만 그렇게 몸을 떨면서도 그녀는 절대로 인질로부터 물러나지 않았다.
“윤희, 네가 저분들을 이 음습한 곳으로 끌고 온 것이냐.”
한결 더 차가워진 음성에 여인, 윤희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배덕의 군주에게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다.
“조심하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란다. 너와 같은 이의 분노를 받아내기엔 너무나도 작고 하찮은 존재지. 네 분노에 그녀의 심장이 멈추면, 저들 역시 심장이 멈출 거란다.”
배덕의 군주가 슬며시 끼어들어 하는 말에 은근한 협박이 담겨 있었다. 윤희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저들 역시 그 운명을 함께할 거라며 그를 압박했다.
“자, 이번에는 내가 물을 차례야.”
은근슬쩍 물러난 배덕의 군주가 윤희의 곁에 섰다. 그때까지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섣불리 나섰다간 부모님을 구출하기는커녕 도리어 겁에 질린 윤희가 최악의 수를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너는 저들의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겠니?”
노골적인 협박, 그리고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건, 아마도 ‘밤’이겠지.”
그녀는 대답 대신 가증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젤라.] [신비의 간섭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어요. 이 일대에서 지저수의 신성이 완전히 걷히기 전까지는 저분들을 구할 수 없어요.]입으로는 찬탈자와 대화를 하면서 김진우는 머릿속으로 안젤라와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저들을 구할 수 없노라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윤희를 제 때 잡아왔다면…….]윤희의 신병을 구속하고 위시 스톤을 회수하라 지시했을 때, 위시 스톤을 회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윤희만큼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의 자신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며 자책했다.
[제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게다가 안젤라는 지상에서 부모님의 경호를 맡은 바가 있었다. 그런 그녀였으니만큼 지금의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너를 지저로 복귀시킨 건 나다. 그리고 네 임무를 이어받은 건…….]“아…….”
텔레파시를 주고받다 무언가를 떠올린 김진우가 무심결에 탄성을 내뱉었다.
“혹시 진혈의 군주를 믿는 거라면, 포기하렴. 저들은 윤희가 죽어도, 또 너무 멀리 떨어져 교감이 끊어져도 바로 죽을 테니까.”
은근히 안젤라의 능력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인지, 찬탈자가 차갑게 경고했다.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냐고 물었던가.”
그런 그녀의 경고에 그가 엉뚱한 질문으로 대답했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찬탈자가 그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주도권이 자신에게 넘어왔다고 생각한 탓인지 그녀는 굳이 그의 말을 막지 않았다.
“죽는 것이 무섭고, 그렇기에 다른 이를 잃는 것이 두렵다.”
찬탈자가 환하게 웃었다. 그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했다고 생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말렴. 밤만 내게 넘겨주면 저들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볕 따스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다.”
생각해 주는 척, 부드럽게 말하는 태도가 뻔뻔하기만 하다. 하지만 김진우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조금은 의외야. 지금의 너라면 저들에게 큰 가치를 느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까지 보여준 손속이 너무도 냉혹했던 탓일까. 그녀는 조금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는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작은 진우 그대로구나.”
조롱일지 감탄일지 모를 그 말을 내뱉으며, 그녀가 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아. 나의 작은 진우는 처음부터 이 차갑고 음습한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았거든. 따뜻한 지상에서 저들과 오붓하게 사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야. 어차피 네가 복수하려던 거미 공작도 이제 이 세상에 없으니 너도 그만 행복한 여생을 보내야지.”
“맞아.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야.”
찬탈자의 말에 그가 맞장구를 쳤다. 배덕의 군주가 그 말을 듣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길게 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그가 태도를 달리한 것이다.
“근데 저들과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요만큼도 없는데?”
부모의 안위가 걱정되어 전전긍긍하던 김진우는 이미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뭐?”
“내가 그린 지상의 삶에는 저들의 자리가 없다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죽고 못 살것 같았던 부모의 존재가 이제 와서 새삼 하찮아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밤의 권능과 힘이 아쉬워지기라도 한 것일까. 갑작스레 돌변한 그의 태도에 찬탈자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고 난 뒤였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은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지? 저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니?”
한발 늦게 튀어나온 날 선 음성에 김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분명 안타까울 거야. 어쩌면 미안해질지도 모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런데도 지금의 넌 마치 나를 잡아먹을 듯하구나.”
경계심 가득한 그 시선에 그가 히죽 웃어 보였다.
“설마…….”
말문이 막혀 한참이나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찬탈자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됐다.
“어째서!”
꽉 잡힌 작은 손이 뒤늦게 이리저리 버둥거리며 억센 손길을 떨쳐 내려 용을 썼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그녀의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저들은.”
마치 다 잡은 사냥감을 눈앞에 둔 것과도 같은 섬뜩한 눈빛, 김진우가 차갑게 대꾸했다.
“내 부모님이 아니니까.”
“뭐?”
찬탈자가 소스라치며, 고개를 돌렸다.
제 자식의 무사함을 기원하며 발을 동동 굴러대던 이들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잔뜩 뭉개지고 흐릿해진 얼굴을 한 희끄무레한 그림자들이 그들을 대신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도 잊고 있었지 뭐야.”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해 눈만 부릅뜬 찬탈자를 보며 김진우가 말했다.
“내가 만들어낸 소환수 중에 타인을 흉내 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가엾은 이들이 있다는 걸 말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흐릿하게나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던 그림자들이 완전히 희뿌연 기체가 되었다.
“거울 망령. 네가 내 부모님이라 믿고 끌고 온 인질들의 정체다.”
“아아!”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것일까. 찬탈자가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윤희, 넌 알고 있었지?”
그런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던 김진우가 여전히 거울 망령들의 곁을 지키고 서 있는 윤희에게 물었다.
“네.”
“왜지? 왜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지?”
그의 질문에 윤희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어차피 변하는 건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애매모호한 대답, 그녀가 뒤늦게 설명을 덧붙였다.
“저들이 진짜 당신의 부모님이건 아니건 간에, 상황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제가 곁에서 지켜봐 온 당신은 지저 어느 누구보다 냉혹한 존재, 그런 당신이 고작 진짜도 아닌 가짜 부모 때문에 생명줄을 놓아버릴 거라 생각할 수 없었어요.”
대답을 들은 김진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게다가 당신은 멍청하지 않아요.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도 인질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거란 사실은 나도 당신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는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이 살벌한 지저에서 약속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서 교활한 찬탈자가 약속을 지킬 거라는 보장 또한 없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이니만큼 애초에 인질극이란 상황 자체가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양부모란 존재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찬탈자의 요구를 전부 들어줄 수는 없을지라도, 그는 분명 자신의 부모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찬탈자에게 상당한 손해를 입고 위기를 자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전부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부모님이 아닌 거울 망령들이었고, 인질은 이미 그 가치가 무색해지고 말았으니까.
“건방지군. 멋대로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떠들지 마라.”
“죄송해요.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죠.”
말과는 달리 그다지 미안한 기색이 없는 윤희를 보며 그는 구태여 자신은 그런 냉혈한이 아니라 변명하지 않았다. 이 또한 자신의 약점, 일부러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들은 대로다.”
김진우는 윤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찬탈자를 바라보았다.
“이 지저에서 제 목숨을 담보로 한 인질극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나도 알고 있고 윤희도 알고 있다.”
그의 눈동자가 마치 속내를 들여다보듯 투명하게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건 아마 너도 알고 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