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14)
던전 견문록-314화(314/319)
# 314
던전 견문록
제 315 화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찬탈자를 끝장낼 수 있다.
자신을 풀어달라고 아우성치는 탐욕을 슬쩍 풀기만 해도 그녀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존재마저 지워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복수는 끝이 나리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토록이나 간절히 원해왔던 복수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김진우는 스스로를 억눌렀다.
“왜지?”
찬탈자는 그의 인생 자체를 쥐고 흔든 협잡꾼이자 계략가였다. 스스로가 진리의 왕좌를 얻기까지, 그 주도면밀함을 어느 하나 깨달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녀가 세운 허술한 인질극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복수의 달성에 있어 작은 의혹 하나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무리한 수를 쓴 거지?”
차라리 그녀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접근해 왔다면, 어쩌면 그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던 그녀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맹목적인 믿음과 애정으로 대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그녀가 목적을 이루는 데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찬탈자가 굳이 제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고, 지저에 얽힌 비사를 사건의 중심으로 끌고 온 것이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그녀가 한 모든 행위가 스스로를 묶고 마침내는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게 하지 않았는가.
“말해. 내가 널 아직까지 살려둔 것은 네 입에서 그 이유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김진우의 말에 미동도 없이 주저앉아 있던 찬탈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너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을 정도로 너무나 많이 변해 버렸지. 그런데 지금은 또 내가 기억하는 작은 진우 그대로구나.”
그녀의 바싹 메마른 얼굴에서 더 이상 꾸며낸 듯한 감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만들어낸 선량함과 온화함도, 또 음험한 탐욕도 온데간데없었다. 그래서 마치 영혼이 없는 인형 같아 보였다.
“호기심과 동정을 착각하지 마라. 나에게 그런 싸구려 같은 감정 따위 더는 남아 있지 않으니까.”
김진우는 어쩌면 지금의 무감정한 모습이야말로 그녀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갑게 쏘아붙였다.
“네가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이겨낸 것은 사실이야.”
찬탈자가 한참이나 그를 말간 눈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를 위해 일부러 이러한 결말을 자초했다고는 생각하지 말렴. 지금의 넌 마치 내게 특별한 감정을 바라는 듯하구나. 내 눈에는 네가 아직도 나에게 ‘소희’의 모습을 투영하려는 것처럼 보인단다.”
그녀의 투명한 시선에 김진우가 흠칫 놀랐다. 의혹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 생각했던 자신의 행동이 그저 망설임에 불과하다 말하는 그 이야기가 제법 설득력이 있었던 탓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진실인가. 그도 아니면 마침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끝내는 돌이킬 수 없었던 비극의 종말인가.”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나는 들어줄 수가 없구나. 나는 네가 기억하는 소희로 죽어갈 생각도, 또 그렇다고 해서 보다 만족스러운 승리를 위해 입을 나불거릴 생각도 없단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온몸에서 끔찍한 사기가 흘러나왔다. 음험하고 사악한, 알 수 없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기운이었다.
[배덕의 군주가 지닌 권능, 가장 끔찍했던 한때의 악의와 기억이 퍼져 나갑니다.] [수많은 군주가 목숨을 잃고, 그보다 많은 소환수가 비참하게 죽어야 했던 황혼, 그 끔찍한 전쟁의 광기가 이 자리에 현신했습니다.] [나가들의 정신이 오염되려 합니다.] [에인헤리들의 정신이 오염되려 합니다.]꽤나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가들이 거친 숨을 몰아쉰다. 기묘한 열기는 금세 광기가 되어 바로 곁의 나가에게 전염이 된다.
더는 상대할 적도 없건만 칼과 창을 움켜잡은 그들의 손이 당장에라도 떨쳐질 것처럼 불끈거린다.
[주인을 향한 충성과 공고한 유대감이 그들을 억제하고 있지만, 이대로 시간이 조금 더 흐를 경우, 어쩌면 나가들은 제 동족에게마저 칼을 휘두르게 될지도 모릅니다.]주인을 향한 충성으로 제 일족의 근원마저 부정했던 나가들은 간신히 그 광기를 억누르며 버텼지만, 에인헤리들 중에는 벌써부터 제 동료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살의와 광기만이 지배하는 끔찍한 살육제가 벌어질 것이다. 그만큼 배덕의 군주가 피워 올린 광기와 증오의 불꽃은 깊고 또 깊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조용히 찬탈자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배덕의 군주는 하얗게 까뒤집힌 눈으로 목을 울려대고 있었다. 닿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오염되고 육신이 썩어버리는 끔찍한 저주를 두른 손톱이 날카롭게 일어서 할퀼 듯 치켜 올라갔다.
“그런가.”
그는 유달리 느릿느릿하게 보이는 그녀의 손짓을 보며 무겁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게 너의 선택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은 손을 움켜잡은 그의 손끝이 검게 변했다.
타고 남은 재 위에 가늘게 흔들리던 연기처럼 미약하던 기운은 금세 거대한 어둠이 되었고, 순식간에 배덕의 군주가 피워 올린 광기의 불꽃을 집어삼켰다.
찬탈자의 권능은 강력했다. 잠깐 사이에 수천의 에인헤리가 서로를 상잔하게 만들고, 그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던 나가들마저 광기에 전염이 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가 흩뿌린 광기와 증오는 김진우의 권능을 이겨낼 수 없었다. 한발 늦게 퍼져 나간 탐욕의 기운이 그것마저 먹어치워 버린 것이다.
“아…….”
김진우는 손끝을 바라보았다. 검게 물든 얼룩이 어쩐지 처음보다 더욱 커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잡혀 있던 작은 손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고대 황혼 끝에 멸망해 버린 지저의 마지막 군주로 살아남아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지저의 왕으로 군림해 왔던 자애의 군주는 결국 배덕이란 이름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거꾸로 서서 길을 걷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내 발걸음은 끊임없이 내일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내 눈은 언제까지고 내가 걸어온 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됐구나. 멍청하게도 나는 끝내 내일을 바라볼 수 없었단다.”
존재가 사라지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지친 얼굴 어딘가에 묘한 안도감을 떠올린 채 그녀는 마지막 순간만큼은 과거로 돌아간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진우야, 나의 작은 진우야.”
제 입으로 그리움으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거라 한 말을 지키지 않았다.
“너만큼은 앞을 바라보렴. 과거를 살아가기보다는 오늘을 살며 내일을 꿈꾸렴.”
대체 그녀가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스스로가 밤이 되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었을까. 알 수 없다. 그녀는 끝까지 답을 알려주지 않았고, 이제 더 이상 대답해 줄 수도 없었다.
“누나…….”
복잡한 마음에 과거 그녀를 불렀던 그 이름으로 되뇌어보고 만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손끝의 온기를 쫓아 차가운 공기를 한 움큼 움켜쥔다.
“주인님!”
한 발 늦게 달려온 도미니크는 왠지 모르게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고의 교감을 통해 주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 탓이리라.
“그녀가 바라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순간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김진우는 여전히 도미니크를 돌아보지 않은 채,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녀를 죽인 건 나인가, 그도 아니면 그녀 스스로인가.”
복잡한 심경이었다.
“왜 그녀는 또 다른 계획을 준비하지 않았던 걸까.”
“그녀는 지저의 폭군이자 탐욕의 군주이신 주인님과 지상인이신 주인님을 동시에 겨냥해 함정을 팠어요. 하지만 둘 다 통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도미니크는 말했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고난과 오늘의 고비 모두 그녀가 준비한 함정이었고, 그것을 다 이겨냈기에 마침내 승리를 얻었을 뿐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런가? 그녀가 죽은 건 나보다 약했기 때문인 건가?”
“단지 그뿐이랍니다.”
도미니크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김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군.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보인 작은 변덕이 나를 조금은 복잡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완전히 감정의 잔재를 털어내는 것은 당장엔 힘들 것이다. 그만큼 찬탈자가 그의 인생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을 끌어안고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지저의 신비를 관장하는 거대한 의지, 지저의 신비 그 자체이자 지저를 떠받드는 거대한 물푸레나무와 만나야 했다. 그게 바로 그가 이곳까지 온 이유였다.
“하지만 그 전에.”
어느새 평소의 신색을 되찾은 그가 소환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승리를 만끽하는 게 우선이겠지.”
주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숨죽인 채 눈치만 보고 있었던 에인헤리들과 나가들이 뒤늦게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
나가들과 에인헤리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전장을 정리하는 동안에 김진우는 윤희와 대화를 나누었다.
“탐욕스러운 건 지상인들이나 지저의 존재들이나 마찬가지. 지저가 하나로 합쳐진 이상 저들도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겠죠.”
윤희는 전쟁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는 지상의 상황을 말해주었고, 그들이 이미 탐색자들을 파견할 준비를 마쳤노라 말했다.
“짧으면 한 달, 길면 여섯 달, 지저가 지상을 상대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에요.”
거듭된 복원으로 많은 미궁이 무너졌고, 살아남은 미궁들 역시 흉신들의 습격으로 많은 고초를 당해야 했다.
그런 지저가 지상인들의 본격적인 침공을 막아내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상인들이 활동하기 더욱 유리하게 변한 지저의 지형 역시 전쟁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알았다. 돌아가는 대로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지. 그대와 못 다한 이야기 역시 그때 마저 나누도록 하겠다.”
“뜻대로.”
고개를 숙이며 물러난 윤희대신 이번에는 안젤라가 다가왔다.
“주인님.”
그렇게 다가온 그녀의 손에는 그가 여태껏 밤을 경계해 손댈 수 없었던 위시 스톤이 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가 건네준 작은 돌덩이를 받아 들었다.
[밤이 마구 식탐을 부립니다. 기생마가 덩달아 군침을 삼킵니다.]기생마의 육체에 봉인되다시피 한 밤이 다시 한 번 난동을 피웠다. 어떻게든 위시 스톤에 닿고자 꿈틀대는 그 노력이 가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밤이 자리를 잡은 기생마가 있는 곳은 그의 오른손, 그리고 위시 스톤을 쥔 손은 왼손이었다.
그가 마음먹지 않는 이상 절대로 오른손이 왼손에 닿을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한 번 보았던 메시지가 다시금 눈앞을 메우더니 뒤이어 그가 전에 보지 못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위시 스톤을 먹어치우는 것은 멍청한 행동입니다.] [위시 스톤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놓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얻을 보상은 일시적인 포만감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위시 스톤의 주인으로 인정받을 경우 더 큰 보상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위시 스톤을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놓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