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18)
던전 견문록-318화(318/319)
# 318
던전 견문록
제 319 화
김진우의 말에 마족도 용사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쩍 벌린 입을 뻐끔거리며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해 이리저리 눈을 굴려댔을 뿐이다.
그런데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한창 음울한 기운을 뿜어대며 지기를 흡수하고 있던 마법진의 활동이 중단된 것이다.
“오오! 드디어!”
마족은 갑작스레 난입한 김진우의 존재는 잠시 뒤로 제쳐 둔 채 마법진을 보며 환호했다.
고오오오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멈춰 있던 마법진이 다시 굉음과 함께 검은 기운을 꿀럭이며 토해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음습하고 끈적끈적한 마기가 온 주변을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마(魔)의 왕이시여!”
마족이 무릎을 꿇더니, 그도 모자라 바닥에 엎드려 경배의 자세를 취했다.
“아아…….”
수많은 마족이 환희에 차 마왕의 강림에 경배를 올리고, 그와는 반대로 용사를 비롯한 인간들은 절망에 찬 얼굴로 신음을 내뱉었다.
“이런 악몽이…….”
원정은 실패했다. 인간들은 마왕의 강림을 막지 못했다. 그 사실이 그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마왕은 아직 제힘이 온전하지 못해. 지금이라면!”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 그것이야말로 용사가 갖춰야 할 가장 큰 덕목이었다.
그리고 용사는 그 자격이 넘치도록 충분했다. 비록 마족의 저항에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목적을 잊지는 않았고, 다시 전의를 다지는 데 성공했다.
“내가 맞이할 죽음이 이름조차 남길 수 없는 남루한 것일지라도, 나는 그대와 함께하겠소.”
“이곳에서 멀지 않은 영지에 제 가족이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마왕을 두고만 본다면, 제 가족 또한 참화를 피할 수 없겠지요. 그럴 바에야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겠습니다.”
용사의 투지에 고무된 인간들이 다시금 의지를 되살렸다. 그들은 비장한 얼굴로 대열을 다시 갖추고 그가 지시를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 얼굴, 그 눈빛, 그 투지, 기억에 있다.”
검은 연기 속에서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필시 용사의 일족일 테지. 일어나자마자 그 지긋지긋한 얼굴을 보다니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구나.”
언짢은 심사가 그대로 드러나는 음성에 간신히 투지를 되살린 용사와 인간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단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심령이 뒤흔들리는 끔찍한 마기에 기세가 눌린 것이다.
“신께서 이곳을 지켜보고 계세요.”
그때 성녀가 나섰다. 기력이 고갈되어 의식을 잃었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한 신성력을 두르고 용사의 일행을 다독였다.
그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음성에 사그라들었던 인간들의 투지가 다시 타올랐다.
“네놈들은 늘 그런 식이었다. 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졌었지. 그 덕분에 나는 끝없는 악몽 속에서 다시 깨어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연기가 걷히고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체는 산양의 그것을 닮았고, 머리는 검푸른 갈기가 휘날리는 사자와도 같았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반인반마(半人半魔)의 모습, 검은 피막의 날개를 펼친 마왕이 창백한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들을 죽이고, 그 혈족의 피를 말리는 것으로 나는 악몽을 끝내겠다.”
마왕의 선전포고에 용사와 인간들이 칼을 다잡았다. 당장에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그 사이로 불쑥 심드렁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동작 그만. 거기까지다.”
잠깐 사이에 대화에서 소외되었던 김진우는 잔뜩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더 이상은 못 봐주겠군. 시간 낭비야.”
마왕을 앞에 두고도 여전하기만 한 그의 태도에 엎드려 경배하고 있던 마족이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했다.
“네놈이 마의 왕을 앞에 두고도 망발을 떠는구나. 이전에는 이곳이 온전히 네 것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왕의 것이나 다름없노라! 그러니 너는 순순히 모든 것을 바치고 왕께 투신하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않으면?”
한참을 떠들어대던 마족은 기이할 정도로 싸늘한 김진우의 얼굴을 보며 말을 멈췄다.
어딘지 모르게 겁을 집어먹은 표정, 하지만 이미 상황은 기호지세였다. 마족은 마왕의 힘을 믿는 것인지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펴고 다시 소리를 높였다.
“왕께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그 흔적조차 남지 못하게 할 것이노라!”
한번 내뱉고 나니 제 말에 스스로 고무되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마족이 기세등등하게 외치고는 마왕을 바라보았다.
마치 제 충성과 헌신을 알아달라고 아양이라도 떠는 듯한 꼬락서니,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당장에라도 용사와 인간들을 씹어 먹을 듯했던 마왕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굳어 있었다. 끝없는 탐욕과 증오로 번뜩여야 할 눈동자는 갈 곳을 잃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고, 거만하게 곧추세워져 있던 허리는 왠지 모르게 구부정했다.
“와, 왕이시여?”
마족이 영문을 몰라 입을 여는데 그사이를 자르고 김진우가 끼어들었다.
“갈기갈기 찢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게 한다라…….”
분명 그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묘하게 섬뜩했다.
“재미있는 말을 하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끈적끈적한 마기에 오염되어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공기가 어디선가 휘몰아친 냉기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그 위로 음습하고 불길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봐.”
격이 다르다. 성녀의 거룩한 신성력도, 용사가 뿜어대는 불굴의 투지도, 마왕의 사악함도 그의 존재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부정하고 불길한 기운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얼굴을 꼿꼿이 들 수 없었으니, 만물이 하찮기만 했다.
푸르게 광망이 흘러내리는 시선이 마왕을 향했다. 마왕은 단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필사적으로 외쳤다.
“마, 마신(魔神)이시여.”
그 뜬금없는 말에 김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마왕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뭐하는 게냐! 마신께서 이 땅에 강림하셨으니 마땅히 엎드려 그 거룩한 이름을 경배해야 옳을 것이다!”
마왕이 솔선수범해 바닥에 납작 엎드리니, 다른 마족들도 버티지 못하고 엎드려 경배를 올렸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아주 싹싹한 놈이군.”
김진우의 말에 마왕이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아양을 떨어댔다.
“이를 말씀이시겠습니까. 마신께서 원하신다면 무엇인들 못 하리오. 당장 끓는 용암에 몸을 던지라 해도 못 할 게 무어가 있겠습니까.”
“정말?”
“음. 그건 좀…….”
금세 태도를 바꾸는 모습이 괘씸하다 느껴지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친숙했다. 그리고 그는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서와 닮았군.”
탐식의 왕, 우서와 마왕은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었다.
마왕은 스스로 신하를 자처하며 김진우를 마신으로 섬기기를 주저치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거듭된 복원과 마지막 전쟁으로 대폭 감소한 지저의 주민을 새로이 들일 필요를 느꼈던 그는 마왕의 충성을 받아들였다.
“저들을 살려두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저들은 포기를 모르는 족속, 제 목숨을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다시 이곳을 침범할 것입니다.”
용사들은 돌려보냈다. 마왕이 만류하기는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다시 찾아오면 그때 쓴맛을 보여주면 그만.”
자신감에 찬 그의 말에 마왕이 과하게 감동한 얼굴로 과연 마신의 아량이라며 아부를 떨어댔다.
“조금 늦는다 싶더니, 재미있는 놈을 주워오셨네요?”
마왕을 발견한 안젤라가 눈을 휘어 올렸다. 힘의 격차를 느끼고 굴종한 마왕이지만 그래도 그 자존심이 어디 가지는 않는지 대번에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가녀린 그녀의 모습 뒤에 숨겨진 하이로드의 기운을 느끼고는 금세 꼬리를 말았다.
마왕의 힘과 권능은 진혈의 군주에게 미치지 못했다. 자신의 말로는 아직 부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라고는 하지만 안젤라가 이면층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한 그녀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녀도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아챘는지 대놓고 마왕을 아랫사람 부리듯 했다.
“마침, 잘 왔어. 네가 이놈의 교육을 맡아줘.”
“어머, 곁에 두고 쓰실 생각이신가요?”
“일단은 공작 정도의 자리를 주고 외곽을 맡게 할 생각이야. 저놈이라면 어지간한 놈들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제가 확실하게 교육시켜놓도록 할게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어딘지 묘하게 가학적인 구석이 있어 찝찝했지만 그는 굳이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아참, 어머님께서 오늘 집에 들러서 저녁 먹고 가라고 하시던데요.”
“아, 오늘이 그날이었나?”
“어휴.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고 그렇게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새 잊으셨어요.”
“바빴으니까.”
어쩐지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저수와 결판을 낸 그날 이후,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그는 지저수의 신성을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마침내 스스로 지저의 절대자로 군림했고, 신비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신비를 얻은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언제 발발할지 모르는 지상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필멸의 창, 가장 어린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로 만든 창으로 지저와 지상을 연결하는 법칙을 끊어냈다.
지저수가 소멸하면서 그 연결 고리가 약해진 탓에 지상과 지저의 접점은 너무나 쉽게 끊어졌고, 지상인들은 다시는 지저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세상이 지저와 연결되었다. 마왕과 용사, 그리고 마법사와 성녀가 존재하는 세상이 새롭게 연결된 곳이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지저가 세상을 이루는 수많은 층 중의 하나이며, 지상 역시 마찬가지였던 탓이다. 지저의 신비를 얻은 그는 그 사실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놀라지 않았다.
이곳 말고도 더 많은 세상이 저 너머에 존재했다. 불타는 화염으로 만들어진 세상, 얼음과 물로만 이루어진 세상, 안개가 뒤덮인 세상.
모두가 실존하는 세상이었으며 세계를 이루는 층 중의 하나였다.
“끄응. 조금 일찍 나가서 선물이라도 사둬야겠네.”
그는 방랑의 군주가 지닌 권능 또한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었다. 그 덕분에 연결 고리가 끊어진, 가족이 있는 저 너머의 세상으로 언제든지 넘나들 수 있었다.
“벌써 제가 사뒀는걸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그의 말에 안젤라가 눈웃음을 치며 가슴을 탕탕 두들겨 댔다. 그는 진심 어린 고마움을 담아 그녀를 안아주었다.
“저, 저기 그럼 저는 어떻게…….”
“아이참, 눈치가 없는 녀석이네.”
돌아가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마왕이 슬쩍 끼어들어 자신의 처우를 물었다.
그런데 그게 안젤라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날이 선 그 음성을 들으며 김진우는 마왕의 고된 미래가 보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 그리고 도미니크가 주인님을 찾아요.”
그 말에 그가 뜨끔한 얼굴을 해보였다. 왠지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너 이름이 뭐야.”
“마, 마왕입니다!”
“이름이 마왕이야?”
“그건 아니지만…….”
“이름 없어, 이름?”
“그게 제 이름은 아무나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아무나?”
“다, 단탈리안입니다!”
등 뒤로 안젤라가 마왕, 단탈리안을 쥐 잡듯이 잡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무시하고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