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319)
던전 견문록-319화 (완결)(319/319)
# 319
던전 견문록
제 320 화
“주인님!”
예전이었다면 한걸음에 달려와 주인을 반겨주었을 도미니크는 어쩐 일인지 바닥에 웅크린 채 고개만 들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아래, 영롱한 꼬리 밑에는 커다란 알이 놓여 있었다.
“어때? 오늘은 깨어날 거 같아?”
이제는 폭군이라는 이름을 넘어 지저의 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김진우였지만, 도미니크를 닦달하는 모양새만큼은 평범한 사내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하기야, 어느 누가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2세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냉정할 수 있으랴.
“열심히 움직이는 게 느껴지기는 하는데, 도통 나올 생각을 않네요.”
“역시, 내가 깨우는 게 나으려나.”
“아니요, 절대요. 그러다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의 말을 거부하는 그녀의 단호함 역시 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 보다 풍만해진 가슴, 지난 결전 이후 놀라울 정도로 여성스러워진 그녀는 완연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대체 어떤 녀석이 나오려고, 이렇게까지 속을 썩일까.”
짐짓 불만스럽게 투정을 부리는 그였지만 얼굴만큼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보다 주인님.”
도미니크가 애지중지 감싸고 있던 알에서 슬며시 꼬리를 치우고는 그에게 눈짓을 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막 하려던 참이야.”
김진우는 살짝 허리를 굽히며 알 위에 손을 얹었다.
“오늘 나오든 내일 나오든, 부디 건강하게만 나오거라.”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한 번쯤은 할 법한 여상스러운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평범한 언어가 아니었다.
[지저의 신비가 가호를 내렸습니다.] [매일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중첩된 축언 덕에 축복의 효력이 더욱 강해집니다.] [알에서 깨어날 아이는 가장 강건한 거인족의 왕보다 더욱 건강할 것이며, 그 어떤 병마와 역병도 범접치 못할 것입니다.]그는 지저의 신비를 지배하는 신과도 같은 존재, 그가 건넨 말은 그 자체로 언령이자 축복이었다.
“도미니크도 조금만 더 고생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건강해야지.”
도미니크에게도 축복이 내려졌고, 하루 종일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알을 감싸고 있던 그녀의 지친 육체에 다시금 활력이 솟아났다.
방금 전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로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 질투 나서 못 보겠네. 진짜, 애 없는 여자는 서러워서 살겠나.”
따뜻한 분위기를 가르고 들어선 삐딱한 음성, 진즉부터 안젤라의 존재를 알고 있던 김진우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교육은 대충 끝났고?”
“뭐, 은근슬쩍 기어오르려고 하긴 하는데 나름대로 상황 판단이 빠른 놈이라 적응은 금방 할 거 같아요.”
공포의 대명사라 불리는 마왕을 코흘리개 취급하는 태도가 황당할 지경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녀의 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과의 접점이 틀어지고, 그 주인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지저는 어디까지나 약육강식의 세계, 약자는 강자의 말을 따르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안젤라는 단탈리안보다 강했고, 더없이 강대한 김진우의 비호마저 받고 있으니 마왕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존재라도 그녀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으리라.
“아, 그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안젤라는 단탈리안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신들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이쪽의 신은 저쪽하고는 다르게 실체를 갖고 모습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주인님이 놓아주신 성녀라든지, 유달리 편애를 받는 족속이 있어 그들을 통해 신들이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녀는 어쩌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 표정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하기야, 그녀의 주인이 누군가. 이 거대한 지저의 하나뿐인 지배자이자 신비의 주인이었다. 설령 이 세상에 신들이 있다 한들, 지저를 감히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물며 신도 아닌 신의 사도 나부랭이라면 애초에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쪽 세상도 나름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저쪽이랑 다르게 피를 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니까요.”
안젤라는 제 주인이 지저를 일통한 뒤 부쩍 심심해졌던 차에 잘됐다며 차라리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릭샤샤를 만났는데, 주인님께 지상을 둘러보아도 될지 물어보더군요.”
“직접 찾아오지 않고.”
릭샤샤는 이제 요정 군주가 되었다. 지저의 신비를 얻은 김진우가 스스로의 권능을 나누어준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요정 군주의 힘 정도는 있으나 마나 표도 나지 않는 미약한 것이었으니 그리 어려운 결단도 아니었다.
“그 꽉 막힌 성격으로 감히 주인님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말한 안젤라는 릭샤샤가 이곳 세상에서 요정들의 흔적을 찾은 것 같다며, 날이 갈수록 수가 줄어가는 제 일족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라도 지상에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라 말했다.
“그리하라 해. 어차피 릭샤샤도 이젠 예전의 릭샤샤가 아니니까.”
릭샤샤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지저의 신비를 얻은 그날 이후, 모든 소환수는 각기 새로운 군주로 거듭나거나 지저의 귀족이 되었다.
모리건은 까마귀 일족을 다스리는 당당한 여제가 되었고, 우서 역시 공작의 자리를 꿰차고는 제 출세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제힘을 키우는 것보다 주인의 위세를 빌어 세를 불리고 있다 하니, 그 타고난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럼 그리 전하도록 할게요.”
그렇게 말한 안젤라는 이내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제 시간도 슬슬 된 거 같은데, 나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 벌써 그렇게 됐나.”
김진우가 다소 아쉬운 얼굴로 도미니크를 바라보니, 그녀가 곱게 눈가를 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주인님의 축복이 있는 한, 저와 아이 모두 일이 생길 리가 없는걸요.”
“그럼요. 어떤 미치광이가 감히 용신의 반려를 건드리겠어요.”
안젤라의 추임새에 도미니크가 풋, 하고 웃었다.
“까불지 말고, 가서 어머님께 잘해. 그래도 어머님은 너를 며느리로 알고 있으니까.”
“아, 안 들려. 안 들려. 진짜, 조강지처부심 부리는 거 짜증나!”
장난스러운 말투에 도미니크는 그저 말없이 웃어 보였을 뿐이다.
“그럼 다녀올게.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만사 제쳐 놓고 돌아올 테니까.”
부드러운 인사를 건넨 그가 이내 안젤라와 함께 세상을 뛰어넘었다.
***
지저와의 연결 고리를 잃었지만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지저라고 해봐야 소수의 탐색자나 관계자들에게나 중요한 것이었지, 일반인에게는 꺼림칙하기만 한 존재였다. 그런 판국에 지저가 사라졌으니 눈엣가시가 빠진 느낌이리라.
“어머님! 저 왔어요!”
집에 도착한 김진우는 쪼르르 달려가 넉살 좋게 어머님에게 매달리는 안젤라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지금의 그녀를 보고 음험한 흡혈귀라고 생각하겠는가.
“우리 새아기 왔네.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가져왔어. 네가 진우보다 낫다, 나아.”
언제 준비한 것인지 모를 선물을 건네고 잠시 축하의 말이 오고 갔다.
뒤늦게 퇴근해 돌아온 아버지가 빈손으로 들어왔다가 어머니에게 구박을 받고, 그 뒤를 이어 여동생이 조카 손을 잡고 찾아왔다.
“애 아빠는 오늘도 야근이라 도저히 시간을 못 빼겠나 봐요.”
“남자가 우직하니 일해야지, 집안일에 너무 신경 쓰면 큰사람 못 된다. 게다가 시기가 어느 때인데, 번듯한 직장에서 괜히 빌미 잡혀 내쳐지지 말고 일이나 신경 쓰라고 해라.”
아버지의 잔소리, 여동생의 되지도 않을 애교, 어머님이 웃고 안젤라가 다시 콧소리를 낸다. 근래 들어 몰라보게 자란 조카가 슬쩍 다가와 김진우에게 안겼다.
“많이 무거워졌네. 건강하게 쑥쑥 자라서 훌륭한 사람 돼야지.”
번쩍 조카를 안아 든 그가 웃으며 말했다. 비록 지저에서처럼 축복의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하겠지만, 신성이 담긴 말은 알게 모르게 조카의 성장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여동생 역시 잔병치레 많던 아이가 근래 들어 부쩍 건강해졌다며 얼굴이 밝아졌으니, 그로서는 뿌듯하기만 한 일이었다.
“자, 모두 모였으니 밥 먹자.”
“그 전에 노래부터 해야죠!”
싹싹하게 어머님을 챙기는 안젤라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헛웃음이 나와 김진우는 공연히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때마침 이준영에게 와 있는 문자가 있었다.
[윤희도 이제 지상에 적응을 다 한 것 같으니, 저도 다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아요.]윤희는 놀랍게도 지저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지상에서의 평범한 삶을 선택했다. 그런 그녀를 이준영이 도왔다.
그와 반대로 이준영은 지저에서의 삶을 선택했고, 일이 끝나자 바로 지저로 데려가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이번에는 그를 데려가겠노라 대답을 해주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잠깐 다른 짓을 하는 사이에 언제 내왔는지 모를 케이크 위에 초가 얹어져 있었다. 어머님이 웃으며 촛불을 끄고 이내 가족들이 활짝 웃었다.
밤에게 오염되었던 정신이 정화되며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가족의 온기, 그는 뒤늦게 그 사이로 뛰어들어 따스함을 만끽했다.
웃고 즐기는 사이에 식사가 끝이 났다. 김진우는 은근슬쩍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보다 아버지가 빨랐다.
“이제 그만하면 서로 알 만큼 알았으니, 더 재지 말고 식 올려라.”
그토록이나 피하고 싶었던 화제였건만 가족들은 잘도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맞아. 언니 정도면 오빠도 감지덕지지. 왜 그렇게 시간을 끌어. 그러다 놓치면 후회한다.”
“네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새아기 생각도 하렴. 여자 나이 차면 애 낳을 때 힘들다.”
합세해서 금세 몰아붙이는 가족들의 태도에 그가 진땀을 흘리는데, 얄밉게도 안젤라가 가족들을 거들었다.
“아이참, 아가씨도. 저 어디 안 도망가요. 전 이 사람 없이는 못 사는 걸요.”
“아, 오빠. 진짜 언니 놓치면 나 오빠랑 평생 안 볼 거야.”
차라리 지저수를 다시 한 번 상대하는 게 낫지, 이런 상황은 그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치켜 올라간 것은 그 스스로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가족의 따스함이 가슴을 적셨던 탓이리라.
그는 허물 벗고 새롭게 거듭난 용신이었으며, 광활한 지저 세계의 하나뿐인 왕이었다. 그리고 ‘인간, 김진우’이기도 했다.
“아, 어머니, 아버지. 저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하다가 놓고 온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해서. 이만 가볼게요.”
“저놈 봐라. 결혼하라고 잔소리하니까, 금세 일 핑계 대고 도망치는구나.”
“그게 아니라, 정말로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 그래요.”
내내 웃고 있던 안젤라가 그의 표정이 진지함을 깨닫고는 가족들을 달랬다. 결국,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고 나서야 그는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가자. 아무래도 일이 생긴 모양이다.”
“네, 주인님.”
휴식은 끝이 났다. 인간 김진우 대신 지저의 지배자가 나서야 할 때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세상을 뛰어넘어 지저로 향했고, 기다리고 있던 도미니크와 만날 수 있었다.
“그 신이라는 놈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인 모양이에요.”
단탈리안이 제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멋대로 떠들어댄 ‘마신’이란 말이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신들이 마신의 강림에 놀라 각기 사도를 땅에 내려보냈고, 그들 중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이가 군세를 이끌고 지저에 찾아왔다는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네 탓이 아니다. 어차피 저들도 내 존재를 느끼고 있었을 터, 이번 기회를 통해 건드려도 되는 만만한 존재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겠지.”
풀이 죽어 눈치를 살살 살피는 단탈리안을 일별한 그에게 안젤라가 물었다.
“어쩌실 거예요?”
“어떻게 하긴.”
어쩐지 들뜬 기색이 역력한 안젤라의 음성. 그녀뿐 아니라 황급히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녀와 같은 표정이다. 그들은 이제까지 투쟁과 전투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해 온 진정한 전사들이었고, 그는 그런 이들의 수장이었다.
“지저가 누구 건지, 똑똑히 알려줘야지.”
김진우는 더없이 밝게 웃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던전 견문록>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