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40)
던전 견문록-40화(40/319)
# 40
던전 견문록
제 41 화
#16. 호야(虎夜)
사방이 온통 붉은 피로 덮여 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 섬뜩한 빛깔이 넓지 않은 통로를 따라 쭈욱 이어져 있었다.
그 피바다 속에서 무언가의 살점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작은 짐승들이 김진우를 보고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울었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에 깜짝 놀라 후다닥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게 대체…….”
질척질척하게 변해 버린 바닥에 쭈그려 앉은 그가 방금 전까지 작음 지저의 짐승들에게 물려 있던 살덩이를 보고는 침음을 내뱉었다.
팔뚝 위로 완전히 찢겨져 나간 손목, 무언가에 뜯겨져 엉망진창이 된 정강이, 조각조각 난 무언가의 육신이가 끔찍하기만 했다.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흉물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김진우는 이내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 그것도 탐색자가 분명했다.
피와 함께 엉겨 붙은 각반과 질겨 보이는 천 조각이 이준영과 그 동료들이 사용하던 것과 똑같았다.
깨어져 나간 방패의 조각을 보며 다시 한 번 희생자의 정체를 확신했다.
붉은 피로 뒤덮인 진창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몇몇 흔적을 보며 그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철퍽철퍽.
탐색자의 규모는 최소 수십 단위의 대규모 팀이었다. 어지럽게 널린 각반과 깨어진 무기의 수만 헤아려 보아도 그 정도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김진우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며 머릿속으로 이곳에서 있었을 전투를 그려보았다.
탐색자들의 수는 마흔, 던전 베이비는 열에서 열다섯 정도, 7층에 발을 들일 만큼 강하고 경험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7층에 들어섰고, 무언가의 습격을 받았다.
“여기…….”
아마도 이쯤에서 처음 괴수가 달려들었을 것이다. 벽에 꽂힌 석궁의 살 방향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최초의 충돌이 있었으리라. 깨져 나가고 바닥에 눌어붙듯 처박힌 방패 조각들은 당시의 충돌을 눈에 선하게 그려주었다. 흔적을 좇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갔다.
탐색자들의 대응은 완벽했다.
다른 이들의 전술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준영과 그 무리가 어떻게 싸우는지 정도는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가 보기에 전투의 흔적은 희생된 탐색자들이 얼마나 잘 싸웠는지를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탐색자들이 몰살당한 것이다.
대체 뭐에 의해서?
이 정도 규모의 탐색대라면 김진우와 나가들이 9층에서 마주친 혈표 한 쌍이 달려든다 해도 격퇴할 만큼 막강한 전력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을 사냥한 포식자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고 나면 으레 남기 마련인 벽에 새겨진 괴수의 발톱자국도, 찍어 누르다시피 한 바닥의 족적도 없었다.
이래서야 탐색자끼리 상잔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지경이다.
생존자는?
잠시 생존자의 흔적을 살펴보던 김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정도로 처참한 흔적이라면 차라리 생존자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만약 살아 있다고 한들 피 냄새에 이끌려온 또 다른 지저의 포식자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크고 강한 포식자들이 배를 채울 만큼 채우고 사라지지 않았다면 작은 고기 조각에 달라붙어 살점을 파먹던 작은 짐승들은 이곳에 얼씬도 하지 못했으리라.
“제길, 냄새가 배겠어.”
팔뚝에 코를 파묻고 킁킁거리던 김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끔찍한 곳에 오래 머물러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더 이상 건질 것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피 웅덩이를 지나쳐 마침내 뽀얗게 맨살을 드러낸 돌바닥 위에 섰다.
잠깐 사이에 짙게 몸에 밴 피 냄새를 특수 용액으로 제거한 그는 빠르게 현장을 벗어났다.
***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대답할 사람이 있을 리 없건만 김진우는 솟아오르는 의문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또다시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
벌써 네 번째다. 탐색자들의 넝마가 된 사체를 발견한 것이.
차라리 처음에 본 팀의 생존자들이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게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발견한 네 번의 참상이 전부 다른 팀에게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그는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결정해야 했다.
계속해서 탐색을 이어가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결정해야 할 순간이었다.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모든 난관을 이겨나갈 힘이 있었다.
김진우는 그중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카모플라쥬.”
나직한 속삭임에 그의 몸이 조금씩 어둠에 녹아들다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여기서 일단 정지!”
선두에 서 있던 사내의 지시에 일단의 탐색자들이 일제히 장비를 풀고 사방에 동작감지기를 설치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여기 너무 열린 거 아닙니까?”
앞뒤로 뻥 뚫린 통로를 보며 누군가가 다가와 사내에게 물었다.
“너 7층은 처음이지?”
사내의 말에 말을 건 탐색자가 순간 무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사내가 혀를 찼다.
“7층에서는 오목하게 들어간 공터보다 이런 통로에서 쉬는 게 차라리 안전해. 여기부터는 진짜 괴물들의 영역이니까. 크리쳐가 하나 있는 통로를 막고 덤비면 그 자리에서 전멸할 수도 있어.”
5층까지의 포식자들이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크리쳐들이 주라면 6층 아래로는 단독 개체, 또는 암수 한 쌍이 사냥하는 크리쳐들이 포식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7층 정도 되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해 크리쳐의 수가 눈에 띄게 주는 대신 하나하나가 무지막지한 괴물이었다.
“아무리 우리가 날고 기어도 지저에서는 사냥감에 불과해. 기억해 두도록 해.”
“그래도 레벨 8의 던전 베이비가 몇인데 8층도 아닌 7층에서…….”
하지만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탐색자가 구시렁거리니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이 새끼, 혼자서 올라온 놈 아니지? 너 올라오다 운 좋게 군바리들 만나서 낑겨 올라온 새끼지?”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하, 이 새끼, 입구 언저리에서 놀던 새끼라고 해도 기본은 있는 줄 알았더니 영 꽝이네. 야, 김찬수! 니가 이 새끼 데려왔냐?”
사내의 말에 멀리서 야영 준비를 지휘하던 탐색자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 소리야! 그놈 그거 협회에서 채워준 놈이잖아!”
“뭐? 그럼 종철이 형이 보낸 애라는 거네. 나 참, 이 형이 진짜.”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인 사내가 다시 사나운 얼굴로 말했다.
“인마, 레벨 8, 8층에서 나고 자란 던전 베이비라고 8층까지 커버되는 거 아니다. 레벨 때문에 착각하는 놈들이 많은데, 8층에서 태어났다는 건 8층에서 도망쳐 왔다는 거지 무슨 8층 다 씹어 먹고 왔다는 게 아니야. 알간?”
“아…….”
“이 새끼야, 전쟁 끝난 지 10년인데 어디서 뭘 해 처먹다가 이제 와서 어리바리야, 어리바리가? 너, 다운 잼 안 챙겨봤어? 저층 안 와봤냐고!”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 사내의 태도가 진짜로 화가 난 듯해 탐색자가 찔끔 몸을 떨었다.
“너, 명심해. 여기선 나대면 무조건 죽어. 심층에서 태어난 새끼들도 나대다가 죽어 자빠지는 게 저층이야. 알간?”
몇 번이나 더 당부를 하던 사내가 뒤늦게 풀 죽은 탐색자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인마, 우리가 크리쳐 잡으러 온 게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알아. 우린 크리쳐 만나면 무조건 내뺀다. 알았지? 쓸데없이 나서서 헛짓거리 하지 마. 우리 목표가 뭐라고?”
“수인이요.”
“그래, 우리는 수인만 잡으면 돼. 그렇지 않아도 일정 꼬여서 여러 팀이 한꺼번에 들어왔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목숨 값은 본전이고, 뭐라도 챙겨 가야지.”
그래도 같은 팀이 됐다고 화낼 때는 언제고 제법 살갑게 초짜 탐색자를 챙기는 사내였다.
사내가 한창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섬기며 7층의 위험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멀리 정찰 나간 탐색자 몇몇이 돌아왔다.
정찰조의 귀환에 야영 준비에 한창이던 탐색자들이 금세 또 부산스러워졌다.
“뭐? 확실해?”
“장사 하루 이틀 하냐. 내가 수인 포획만 벌써 스무 번은 했다, 새끼야.”
정찰조의 자신만만한 말에 사내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일행을 불러 모았다.
“장비 거둬! 다시 이동한다!”
“아, 왜 또!”
“이 새끼야, 눈먼 돈이 바로 앞에 있는데 여기서 자빠져 자고 있을래? 그러다 수인들 도망치면 공치고 나가는 건데, 이 인원으로 공치고 나가면 손해가 얼만지 알아?”
사내의 사나운 말에 말을 꺼낸 탐색자가 금세 입을 다물고 일반 탐색자들을 닦달했다.
“30분 거리에 수인들 발견! 이동한다!”
자리 다 펴놓고 다시 이동하게 생겼다고는 하나, 어차피 장비를 설치하고 다시 거두어들이는 건 일반 탐색자들이었다. 던번 베이비들은 입 내밀고 한마디 투덜거리는 게 전부였다.
“포획 장비 다시 점검하고, 점검 끝나면 바로 이동할 테니까 딴소리들 말아.”
사내의 지시에 탐색자들이 서둘러 장비를 점검한다고 난리를 피워댔다.
그렇게 장비를 챙긴 탐색자들이 다시 이동을 시작한 건 불과 5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음, 뭔가 이상한데?”
“뭐가 또?”
정찰에서 돌아온 던전 베이비가 선두에 서서 길을 가늠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인족 말이야.”
“수인족이 왜?”
“보통 수인족은 감각이 예민해서 뭔가 다가온다 싶으면 도망치잖아.”
뜸을 들이는 던전 베이비의 말에 사내가 벌컥 화를 냈다.
“그게 뭐 어쨌다고?”
“아, 새끼 성질머리 하고는. 알았어. 빨리 말할게.”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린 던전 베이비가 말을 이어갔다.
“근데 이놈은 도망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한테 다가오고 있는데?”
“잘됐네. 멀리 갈 것도 없고.”
“그거야 그렇긴 한데, 좀 이상한데.”
상황이야 호재라지만, 그래도 지저에서 뼈가 굵을 대로 굵은 동료의 말을 무시하기는 영 꺼림칙했는지 사내가 일행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놈이 뭔가 이상하댄다! 혹시 모르니까 전투 준비하고 사주경계 확실하게 해! 수틀리면 수인이고 나발이고 그냥 튄다! 알간?”
역시나 경험 많은 팀답게 사소한 낌새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는 꼼꼼함이 있었다.
“쩝. 근데 왜 다른 팀 새끼들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냐. 어차피 이쪽에서 다니는 길이야 빤한데.”
사내가 뒤늦게 찝찝함을 느끼고는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수인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정찰조의 말에 사내는 대열을 정비시키기 위해 연달아 지시를 내렸다.
“투망 준비! 전위조는 혹시 모르니 벙커 세울 준비 하고, 칼 좀 쓰는 놈들은 긴장 바짝 하고! 속보로 이동!”
사내의 지시에 탐색자들이 장비를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
혈표의 심장에서 얻은 카모플라쥬(위장) 능력을 통해 탐색자들의 뒤를 따르던 김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불과 얼마 전에 전문적으로 수인을 사냥하는 팀이 있다는 이야기를 백 선생에게 들었는데 그게 벌써 이렇게 성행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두 번 해본 짓이 아니라 그는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아예 따로 준비한 것인지 포획용 그물까지 꺼내 들고 설쳐대는 그들을 보며 나서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저 멀리 탐색자들이 말하던 수인족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 수인의 모습이라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붉은 안광을 넘실거리며 흘려대는 기세나 섬뜩하게 날을 세운 손톱까지 수인족의 모습은 김진우가 알고 있는 묘인족이나 낭인족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붉은 피부를 본 순간 김진우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참사를 일으킨 범인이라는 것을. 그녀의 몸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짙은 혈향을 풍기고 있었다.
“얏호! 대박이다! 암컷이야! 그것도 삼삼한 암컷!”
사태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탐색자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그들이 포획용 그물을 발사한다고 준비를 하는데, 그 순간 수인족 여인이 탐색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친년이네. 놓칠 걱정 안 하고 잡아도 되겠구만.”
“주둥이 털 시간 있으면 상처 내지 말고 잡을 생각이나 해. 저거 바로 가져다 팔면 최소 억 소리는 나올 거야. 엇? 뭐가 저렇게 빨라? 그냥 쏴!”
순식간에 짓쳐든 수인족 여인의 모습을 보며 사내가 급하게 지시를 내렸다.
“1조! 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