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44)
던전 견문록-44화(44/319)
# 44
던전 견문록
제 45 화
“저희 왕께서 전하시기를, 나가의 미궁과 적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였나이다!”
탐식자들의 왕 우서의 사절은 그렇게 다급한 어투로 다짜고짜 용건을 꺼내 들었다.
출진 준비를 마치고 도열한 나가들을 보고 어지간히 놀란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몸에서 흘러내린 점액질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는데도 저리 제 몸 챙길 새도 없이 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노골적으로 염탐한 것이 아닌가? 다른 뜻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짓을 했겠는가.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시큰둥한 얼굴로 그리 대답한 김진우가 퀀투스에게 명령했다.
“퀀투스, 출진하라. 능력이 닿는 데까지 마음껏 휘젓고 오도록.”
“모든 것은 왕의 뜻대로!”
가뜩이나 주인의 명령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퀀투스다. 능력이 닿는 한 적진을 휘저으라 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탐식자들의 미궁 외곽 정도는 초토화시키고 올 것이다.
“나가들의 왕이시여! 잠시만 제게 시간을!”
“들을 가치가 없다! 그대들이 보낸 사절이 다녀간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 그 잠깐을 못 견디고 이리 노골적으로 나오는 그대들의 말을 내가 또 어찌 믿겠는가!”
이제는 그래도 한 지역의 지배자이자 나가들의 왕이라는 자리에 익숙해진 김진우의 말이 제법 위엄 있었다.
“어찌하면 믿으시겠습니까! 하라는 대로 하겠나이다!”
추상같은 호통에 사절이 꿀렁대는 점액질을 뻘뻘 흘려대며 절절맸다.
“하라는 대로?”
“저희 왕께서는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따르겠다 하였나이다!”
그래도 한 미궁의 주인이나 되는 자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굴종을 표하니 듣는 이가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그의 황당하다는 표정에 도미니크가 작게 속삭였다.
‘어차피 지저에서는 살아남는 게 미덕입니다. 왕의 위세도 살아 있어야 누릴 수 있답니다.’
“그도 그렇군.”
도미니크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김진우는 출진을 위해 나가들을 정비하는 퀀투스를 제지하곤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그럼 그대들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의도적으로 기세를 드러낸 그의 사나운 포효에 사절이 온몸을 떨었다.
“그대의 왕에게 전하라! 만약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 진심을 내보이라고! 말로만 떠들어대는 우호는 가치 없다 전하라!”
그렇게 윽박을 지르니 사절은 온몸의 점액을 질질 흘리며 도망치듯 미궁을 떠났다.
협박이 먹힌 것일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탐식의 왕이 직접 미궁을 찾아왔다.
“나가들의 왕이시여.”
사절의 정신을 쏙 빼놓기는 했지만 정말로 한 미궁의 주인이 직접 올 줄은 몰랐던지라 김진우가 이채롭다는 눈빛으로 우서를 살펴보았다.
자신의 수하들과는 다르게 제법 또렷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몸이 점액질로 이루어진 것은 우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왔군.”
“오해를 풀기 위해 직접 왔소.”
태평한 말투에 비해 점액을 흘려대며 수시로 몸을 꿀렁대는 것이 그 말캉거리는 몸은 내심을 숨기기에 적합하지 않은 듯했다.
그 모습이 왠지 우스꽝스러웠지만 김진우는 애써 화가 난 얼굴을 해 보였다.
“이제야 공평해졌군. 그대는 이미 내 얼굴을 다 훔쳐보았을 테니까.”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잘못을 들추어내는 그의 태도에 우서의 몸이 부글부글 기포를 내며 끓어올랐다.
“길게 말하고 싶지 않군.”
“말하십시오.”
굴욕적인 자세, 허리춤을 접어 보인 우서가 김진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우서를 바라보며 뜸을 들이던 그가 툭 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숙여라.”
지나치게 짧은 한마디, 저의를 파악할 수 없는 말에 우서가 다시 고개를 들고는 투명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굴종을 맹세하고 신하를 자처한다면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하지.”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상대의 기색을 살폈다.
어차피 탐식자들의 미궁은 9층에서도 힘이 약한 축에 속했다. 따르지 않는다면 퀀투스를 보내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이런 결과를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우서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제가 신하를 자처한다면 이번에는 믿으시겠습니까?”
잠깐의 화를 모면하기 위해 굴종을 맹세하는 것이라면 지저의 어느 누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미니크가 전에 말한 것처럼 지저에서 가장 큰 미덕은 살아남는 것이었으니까.
“또 의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차분하게 가라앉은 우서의 말에 김진우가 씨익 웃어 보였다.
“의심할 여지가 있나. 그대는 배신을 할 수 없을 텐데.”
이상할 정도로 확신에 차 있는 그의 태도에 우서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는지 온몸으로 점액을 흘려대며 기포를 부글부글 뿜어댔다.
“그럼 제의를 받아들이는 걸로 알겠다.”
하지만 이미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애초부터 우서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탐식의 왕, 탐욕스러움에 비해 가진 바 능력이 부족한 우서의 실수는 기생수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이다. 감각이 예민한 릭샤샤와 다른 순찰자들조차도 탐식의 덩어리는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지저 남작의 권능 ‘봉신의 맹세’가 발동합니다.] [탐식의 왕 우서를 지저 남작 김진우의 첫 번째 기사로 임명하려 합니다.] [기사는 가장 충성스럽고 용맹한 남작의 수족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충성스러웠던 것은 아닙니다. 봉신의 맹세를 하고 나서야 그들은 ‘진짜 충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허공중에 떠오른 메시지, 평소였다면 그 빼곡한 문자를 본 것은 김진우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우서의 투명한 눈동자가 허공을 빠르게 훑어가고 있다.
“이건…….”
“그대도 미궁의 주인이라면 뭔지 알 테지.”
쉽게 충성을 논한 건 어쩌면 필요한 순간 마음대로 등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모양이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우서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서를 첫 번째 기사로 임명하시겠습니까?] [지저 남작의 기사가 되시겠습니까?]마치 독촉이라도 하듯 노랗게 점멸하는 메시지를 본 우서의 몸뚱이가 마치 탄산수처럼 마구 기포를 흘리며 끓어올랐다.
***
[탐식의 우서가 지저 남작 김진우의 가신(기사)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기사 우서는 주인과 운명을 함께하게 됩니다. 나가의 미궁이 파괴될 경우 우서 역시 소멸될 것입니다.] [우서가 다스리던 탐식의 땅이 ‘봉토’가 되었습니다. 우서는 여전히 한 미궁의 지배자이지만 섬겨야 할 주인이 생겼습니다. 탐식의 땅을 관장하는 핵에 축적되는 던전 에너지의 20%가 나가의 미궁에 속합니다.] [언제든 두 미궁을 연결하는 포탈을 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탈을 열고 말고는 온전히 남작의 권한입니다.]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를 본 김진우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우서 역시 겉으로는 충성을 맹세하겠다며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몸 안에서 마구 요동치는 기포를 보면 속이 편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만 돌아가도 좋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제는 자포자기에 체념한 기색이 역력한 우서가 반색했다.
“왜, 아쉬운가?”
혹시라도 트집을 잡혀 자리에 붙잡혀 있게 될까 겁을 집어먹은 것인지 우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디 가서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속이 그렇게 다 보이니 속아주는 척하기도 힘들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우서의 몸은 낭패스러운 심정을 대변하듯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게다가 메시지까지 우서의 속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우서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진정으로 감복한 것은 아닙니다. 봉신의 제약에 묶인 그의 마음을 얻는다면 탐식의 우서가 지닌 능력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지저 남작의 권능에 묶여 버린 그였지만, 진심으로 충성하는 것은 별개였다.
과연 앞으로 저 음흉한 점액질 덩어리의 마음을 얻게 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김진우가 우서에게 손짓했다.
“돌아가. 어차피 이제는 언제든 볼 수 있을 거야.”
“명을 따르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서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우서가 흘리고 간 점액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다시 한 번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
그렇게 탐식자들과의 전쟁은 손 하나 쓰지 않고 마무리되었다.
‘주인님, 진정한 군주가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도미니크 역시 이런 식으로 일이 풀릴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황홀한 얼굴로 존경의 염을 담아 보냈다.
“저 아메바 같은 놈이 욕심에 비해 무능해서 다행이야. 게다가 겁까지 많으니 일이 쉽게 풀렸어.”
‘9층의 존재가 심층에서나 볼 수 있는 지저 귀족을 만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니까요. 아마 우서도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긴 한데, 저렇게 겁이 많아서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
당장 탐식의 땅에서 나는 던전 에너지의 20%가 나가들의 핵에 축적된다는 것만 해도 큰 이득이었지만, 정작 우서 본인의 능력은 의문이 들었다.
혹시 몰라 미궁의 스테이터스 창을 불러 확인해 보려 했지만, 봉신의 맹세는 완전한 ‘귀속’이 아닌 모양이었다.
스테이터스 창 한 귀퉁이에 떠오른 첫 번째 기사와 그 봉토에 관한 문구는 미궁의 등급만을 알려줄 뿐이었다.
“같은 5등급인데 왜 저렇게 허접한지 이해가 안 가.”
‘같은 등급의 미궁이라도 핵의 질과 격은 하늘과 땅 차이예요.’
바꿔서 말하면 나가의 미궁이 그만큼 우수한 핵을 가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가 운이 좋았군.”
‘지저의 신비가 행사하는 일에 우연이란 없어요. 이 모든 건 애초부터 주인님의 것이나 다름없답니다.’
이상할 정도로 가슴을 울리는 그녀의 말에 김진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가. 어쩌면 정말 운명일지도 모르겠네.”
나가의 미궁을 얻은 뒤부터 지옥거미를 만나 복수를 다짐한 일까지 필요할 때 필요한 힘이 주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작위적이기까지 한 상황이라 차라리 누군가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일단은 9층을 전부 먹는다.”
우서를 첫 번째 기사로 받아들이며 앞으로의 방향을 잡은 김진우가 다부진 얼굴로 말했다.
미궁을 얻고 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천명한 몇 달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다.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그런 그의 모습에 눈이 부신 것인지 도미니크가 가늘게 뜬 눈으로 혀를 쉭쉭거리며 달뜬 숨을 내뱉었다.
***
우서가 김진우에게 억지로 충성을 맹세한 이후로 각 미궁에서 오던 사절단의 발길이 뚝 끊겼다. 아무래도 자신들도 트집을 잡혀 곤란한 일을 겪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모양이다.
“후우, 좋구만.”
한동안 미궁을 들락거리던 수많은 사절단 탓에 신경이 곤두 서 있던 김진우가 오랜만에 나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발치에 꿇어앉은 호야가 애교라도 부리듯 무릎에 뺨을 비볐다.
“진짜 적응 안 되네.”
시일이 꽤 흘렀지만 인간과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저리 안겨오는 호야의 모습은 도무지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하지만 말렸다가는 자신이 미움을 산 것이라 오해를 하고 의기소침해져 식음을 전폐하는 호야인지라 차마 내칠 수도 없었다.
탐색자들을 학살하던 호인족의 전사가 과연 그녀가 맞나 의심이 들 지경이다.
‘주인님, 암상인이 찾아왔습니다.’
한때는 암상인의 방문이 있을 때마다 미궁이 발칵 뒤집어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보고를 하는 도미니크도 김진우도 시큰둥했다.
“이번엔 또 뭐지?”
그래도 올 때마다 제법 유익한 거래를 한 기억이 있어 그는 지체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존귀하신 지저의 남작이시자 나가들의 왕이시여, 오랜만에 뵙습니다.”
작은 머리통을 힘껏 숙여 보인 암상인의 인사에 김진우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울리지 않으니까 대충 하지. 언제부터 그렇게 극진하게 인사했다고.”
“안 될 말씀입죠. 지저의 귀족에게 함부로 대했다가는 경을 치고 맙니다.”
정색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는 암상인의 얼굴이 정말로 누가 들을까 걱정된다는 기색이다.
“됐으니 용건부터.”
“끄응. 어째 갈수록 삭막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역시 넓고 탁 트인 곳에서 살아야 웅심도 생기고 마음도 넓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금세 능글거리며 되는 대로 말을 주워섬기던 암상인이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쳤다.
마침 뒤를 따라온 호야가 달려가 냉큼 암상인이 꺼낸 봉투를 뺏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글을 모르는 것인지 울상을 하며 도미니크에게 봉투를 건넸다.
“뭐지?”
도미니크가 고급스러운 인장으로 봉인된 봉투를 찢어내는 것을 보며 김진우가 물었다.
“초대장입니다.”
앞뒤 다 잘라낸 말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니 암상인이 으스대는 얼굴로 말했다.
“블랙 머천트가 주관하는 정기 경매의 초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