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46)
던전 견문록-46화(46/319)
# 46
던전 견문록
제 47 화
진행자가 말을 멈추고는 잠시 홀과 VIP 룸이 있는 2층을 바라보며 뜸을 들였다. 정말로 이번 물건의 상품성을 자신하는지 꽤나 뜸을 들이는 모습이다.
“바로오오오오!”
하지만 그도 잠시, 벌써부터 성질 급한 몇몇 미궁의 주인들이 아우성을 치자 황급히 상자를 가린 검은 천을 잡아당겼다.
“흡혈귀입니다!”
꿀을 바른 듯 차분하게 가라앉은 머릿결에 창백한 안색,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모습. 상자 속의 흡혈귀는 차분한 표정으로 홀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오!”
“흡혈귀라니!”
지독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가 다르다면 다를까, 이제까지 나온 상품들과 뭐가 다른지 참가자들이 요란법석을 떨었다. 개중에는 이제껏 점잔을 떨던 미궁의 주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아시다시피 지저의 흡혈귀는 굉장히 수가 적습니다. 그리고 그 적은 수마저도 대부분 심층의 존귀한 분들께 속해 있습니다. 그런 흡혈귀가 이번 경매의 상품입니다!”
거창한 소개였지만 진행자의 말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은 없었다.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빼고 상자 속의 흡혈귀를 바라보느라 난리였다.
“안타깝게도 이번에 상품으로 나온 흡혈귀는 진혈이 거의 희석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희소성과 진귀함을 의심하는 분은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말뿐이 아닌지 참가자들이 벌써부터 자신이 부를 수 있는 한계 금액을 가늠해 보느라 제 시종을 윽박지르고 난리를 피워댔다.
“이번 상품의 경매가는 4,000잼으로 시작하겠습니다.”
경매 시작가부터 차원이 달랐다. 최상급 다운 잼 두 개에 해당되는 경매 시작가가 나중에는 얼마나 치솟을지 상상도 가지 않을 지경이다.
“아참, 한 가지 미리 말씀을 드리자면 이번 경매는 최고가에 입찰하신 분이라 하더라도 그녀가 주인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유찰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물론 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눈치를 살피며 꺼낸 말이 놀라웠다. 하지만 그 놀라움이 유쾌함보다는 불쾌한 쪽에 가까웠는지 참가자들이 분노했다.
“건방지군. 진혈도 아닌 모조 흡혈귀 주제에.”
“상품 주제에 주인을 골라? 블랙 머천트가 단단히 정신이 나갔어.”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진행자는 서슬 퍼런 참가자들의 기세에 굴하지 않고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저희 블랙 머천트에서도 이런 특이한 형식의 경매는 처음입니다. 하지만 이번 상품을 위탁하신 분이 심층에서도 가장 깊은 곳의 주인 중 한 분이라는 사실을 유념하여 주십시오. 저희 블랙 머천트를 욕하시는 건 달게 받겠습니다만, 너무 과열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그분의 심사를 어지럽힐까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군요.”
심층에서도 가장 깊은 곳의 주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홀 안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이제껏 기세 좋게 떠들어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입을 꾹 다문 참가자들의 모습은 차라리 희극 그 자체였다.
‘어쩔 수 없어요. 심층의 귀한 분들이라면 못해도 백작급 이상의 강대한 주인들입니다. 아무리 제 땅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는 미궁의 주인들이라고 해도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고도 무사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물며 저 홀 안의 이들은 대다수가 그저 그런 존재들에 불과합니다.’
이번에는 도미니크의 설명이 더 빨랐다. 착 가라앉은 그녀의 음성에 김진우가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조심스럽게 2층을 가리켰다.
짙게 어둠이 가라앉은 VIP 룸의 창을 바라보며 그녀가 강조했다.
‘어쩌면 이번 경매는 처음부터 귀족들을 노리고 열린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어지간한 이라면 흡혈귀의 눈에 차지 않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마따나 흡혈귀는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2층의 VIP 룸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 주인을 정하면 절대로 그 충성과 헌신을 거두지 않으며, 지닌 바 본신의 능력도 다재다능한 흡혈귀는 지저의 어느 누구라도 거느리고 싶어하는 진귀한 존재입니다.”
수인족 도우미가 도미니크가 빼먹은 흡혈귀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흠…….”
김진우도 흥미가 동했다. 노예라면 모를까, 그녀 스스로 주인을 정한다는 말에 경매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흡혈마하고는 많이 다른가?”
피를 빨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던 지저의 흡혈마와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다.
그저 괴물에 불과한 흡혈마와 한 글자 다를 뿐인데 흡혈귀는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흡혈마는 그저 이성보다는 본능만 남은 흡혈귀의 가장 저급한 종류에 불과합니다. 지저의 어느 누구도 흡혈마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하기야 그 흉악하기만 한 괴물을 저 유리 상자 안에 앉아 턱을 치켜 올리고 있는 흡혈귀와 비교하는 것이 차라리 미안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작께서 흡혈귀의 입찰 경쟁에 끼어드는 것만큼은 말리고 싶군요. 충성을 맹세한 주인에게 영생을 준다는 흡혈귀는 지저의 존귀한 분들도 탐을 내는 영험한 존재랍니다. 물론 진혈도 희석되어 거의 없다시피 한 그녀가 그런 능력이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요.”
“뭐,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어.”
수인족 도우미의 조심스러운 조언에 김진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벌써부터 과열된 참가자들의 분위기만 봐도 이번 경매가 얼마나 치열할지 알 수 있었다.
“자, 그럼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결국 흡혈귀의 경매는 유찰되었다.
무려 2만 3천 잼이라는 경매가를 부르고 경쟁자들을 떨궈낸 참가자를 흡혈귀가 본 척도 하지 않은 것이다.
희희낙락하던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린 참가자의 모습은 꽤나 볼 만한 광경이었다.
“휴우, 피곤하군.”
하루 종일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고급스러운 소파고 뭐고 온몸이 쑤셔왔다.
“원하신다면 제게 그 존귀한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부족하지만 피로를 푸는 법을 몇 가지 알고 있답니다.”
수인족 도우미의 말에 김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그냥 쉬고 싶군. 숙소가 마련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일주일간 열리는 경매이니만큼 숙소부터 편의 시설까지 전부 구비되어 있는 게 당연했다.
하물며 자신은 일반 참가자도 아닌 귀족의 자격으로 경매에 참가하지 않았는가. VIP 룸까지 준비할 성의라면 숙소 역시 제대로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네. 남작께는 특별히 저희 블랙 머천트에서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한 숙소가 배정되어 있습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평안히 쉴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김진우가 하루 종일 등을 붙이고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창 아래 펼쳐진 홀의 광경을 보았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라며 올라온 마지막 경매 상품은 인간인 그에게는 전혀 흥미가 동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악다구니를 쓰며 난리를 피워대는 참가자들을 보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지만 오늘은 이만 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김진우의 느릿느릿한 대답에 수인족 도우미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VIP 룸의 문을 열었다.
***
과연 블랙 머천트가 자신있게 주관하는 정기 행사답게 참가자들을 위한 편의 시설은 완벽했다. 경매 기간 동안 머무르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정작 아직까지는 건진 게 없다는 게 문제지.”
‘주인께 유용한 상품은 다른 이들에게도 유용하니까요. 그렇다고 쓸모없는 물건을 덜컥 잡을 수도 없고요.’
경매장의 물건들은 훌륭했다. 첫날은 살아 있는 것 위주로 경매했다면 이틀째부터는 무기와 방어구, 진귀한 힘이 든 최상급 다운 잼이 거래되었다.
개중에는 김진우가 보기에도 유용한 물건들이 있어 몇 번인가 입찰을 시도해 보았지만, 천문학적으로 치솟는 경매가를 따라잡지 못해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하기야 남작의 자리에 올랐다고 이리 VIP 대접을 받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김진우는 이제 막 9층에 자리 잡은 미궁의 주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갑작스레 경매에 초대받았다고 마구잡이로 입찰 경쟁에 참가할 금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하군.”
4일째 경매에 올라온 ‘순간 증폭’의 힘을 지닌 최상급 다운 잼을 떠올린 그가 입맛을 다셨다.
던전 오너의 증폭 효과와 중복되면 꽤나 큰 힘을 발휘할 거란 생각에 입찰을 해보았지만, 자신의 자금력을 아득히 초월하여 빠르게 치솟는 입찰가를 보고는 포기해야 했다.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매에 참가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첫날 경매로 올라온 노예들을 보고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적응하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이렇게 생겨먹은 지저인지라 기대한 것이 새삼 우스울 지경이다.
그렇게 마음을 편하게 먹고 나니 경매장에 오르는 물품들을 보는 건 꽤나 즐거웠다.
더욱이 다른 미궁의 주인들에 비해 턱없이 견문이 짧은 그에게는 지저의 분위기를 파악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올라오는 상품을 보며 다른 이들의 힘을 가늠할 수 있었으며, 지저의 기괴하고도 삭막한 취향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홀에서 입찰 경쟁에 열을 올리던 ‘망자들의 왕’ 발리셔스를 발견한 건 큰 수확이었다.
덕분에 지금 발리셔스가 무엇에 심취해 있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발리셔스는 지금 ‘키메라 제조’에 몰두하고 있었다. 경매에 올라오는 크리쳐마다 입찰을하는 것을 보니 흉포한 크리쳐들을 합성하여 더욱더 강력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듯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김진우로 하여금 발리셔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5일째 경매가 마무리되었다.
5일째에 올라온 경매에서 김진우는 작은 소득 몇 개를 올릴 수 있었다. 날카로운 보검과 무구 몇 개를 싼 값에 얻은 것이다.
애초부터 제 신체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지저의 주인들인데다 그 체격도 맞지 않으니 입찰 경쟁이 치열할 리가 없었고, 입찰에 참가한 아인종들도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으니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물건을 낙찰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6일째가 되는 날 경매장이 열리는 홀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4,200잼! 4,200잼! 더 입찰할 분 안 계십니까!”
최상급 다운 잼으로 쳐도 무려 두 개에 해당되는 무지막지한 경매가에 또 하나의 상품이 낙찰되었지만, 김진우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이다.
워낙에 큰 금액이 오고가는 경매이다 보니 금전 감각이 무뎌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도 이번만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6일째 경매에 주로 올라온 상품들이 지상의 것들인 탓이다.
“22번 참가자님이 ‘지상의 불을 토하는 막대’에 낙찰되었습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원형이 잘 보존된 물건이라 보존 가치가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총 한 자루가 무려 4,200잼에 낙찰되었다.
그 황당한 상황에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을 지경이지만, 다른 참가자들은 소총을 얻은 22번 참가자를 보며 부러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원래 지상의 물건이 이렇게 귀한 취급을 받는가?”
“일단 방금 낙찰된 물건은 전쟁 당시에 사용된 물건이라 역사적인 가치가 부가되어 유독 높은 가격에 거래된 것은 맞습니다만, 대부분의 물건들이 귀히 여겨지는 건 사실입니다.”
수인족 도우미의 말에 김진우의 눈이 번뜩였다.
어쩌면 새로운 돈벌이 수단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벌써부터 머리가 바쁘게 돌기 시작했다.
“자, 오늘도 어김없이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전날 3,2000잼에 낙찰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유찰 상품으로 돌려진 흡혈귀가 오늘도 다시 주인을 찾습니다!”
그사이에 지난 며칠 동안 주인을 선택하지 않은 흡혈귀 탓에 유찰 처리되었던 흡혈귀가 다시 경매에 올랐다.
이제는 흡혈귀의 가치를 떠나 누가 주인으로 선택 받을 것인지에 대한 흥미가 커진 참가자들은 조용히 진행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지 블랙 머천트에서도 이제는 흡혈귀의 경매를 하나의 이벤트처럼 마지막 상품이 나오기 전에 분위기를 띄우는 용도로 이용하고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유찰된 흡혈귀! 다시 유찰되면 내일 다시 경매에 올려야 하는 상황입니다만, 경매 기간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쩌면 그녀가 주인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품을 위탁하신 존귀한 지저 귀족 분을 생각하면 저희 블랙 머천트도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흡혈귀 여인은 상자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놀랍게도 제 발로 걸어서 무대로 올라왔다.
“그래서 오늘은 참가자 분들의 입찰 없이 그녀가 주인을 선택하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참고로 상품의 원주인께서도 동의하신 일입니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짓거리인지, 더욱 황당한 것은 참가자들이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를 진행자가 다시 끌어올렸다.
“물론 흡혈귀의 선택을 받으신 분이 구매 의사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 저희 블랙 머천트에서는 상품의 가격을 받지 않겠습니다!”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로 참가자들이 마구 소리치는 가운데 흡혈귀가 스윽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눈이 곧장 2층을 향했다.
“어?”
흡혈귀의 붉은 눈동자가 왠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김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를 향해 도미니크가 작게 소곤거렸다.
‘주인님, 어쩐지 저 흡혈귀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마따나 흡혈귀의 눈이 그가 있는 VIP 룸을 향해 있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에 그가 흡혈귀를 바라보는데, 흡혈귀가 눈가를 휘어 올려 보이며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