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48)
던전 견문록-48화(48/319)
# 48
던전 견문록
제 49 화
탁하게 죽어버린 눈동자에 체념한 듯 힘없는 걸음걸이, 홀에 가득 찬 온갖 괴수들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여인의 모습이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김진우는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시다시피 지난 협정 이래로 지저에서 나고 자란 ‘지저인’들의 씨가 말랐습니다. 간혹 가다 겁도 없이 다시 땅 밑을 찾은 지저인들이 잡히기는 했지만, 지상의 흉포한 인간들에게 물들어 성격이 완전 바뀌어 버렸죠!”
멋대로 지껄여대는 진행자의 음성을 한 귀로 흘리며 그는 하염없이 던전 베이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 상품은 그런 흉포함이 없는 초기의 지저인입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반항을 모르는 순종적인 놈이지요! 게다가 심층에 있던 놈인지라 거칠게 다루어도 쉽게 죽지 않는 단단한 놈입니다!”
진행자가 시범이라도 보이듯 던전 베이비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살을 꼬집었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깜짝 놀랐을 텐데도 불구하고 던전 베이비는 그저 ‘아’ 하는 짧은 신음을 내뱉을 뿐이다.
“보셨습니까? 이번 상품은 여러분이 알던 그대로의 지저인 그 자체입니다!”
심장이 콱 조이는 듯한 기분, 김진우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도미니크를 불렀다.
“도미니크?”
‘네, 주인님.’
무서울 정도로 착 가라앉은 음성에 도미니크가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가용한 다운 잼이 얼마지?”
‘일단 혈표의 심장을 처분할 생각을 한다면 18,000잼까지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벌써부터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 홀의 분위기에 김진우가 차갑게 말했다.
“이번 입찰, 우리도 참가한다.”
도미니크는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의욕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다.
“그간 지상인들에게 당한 울분을 온전히 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장담컨대 오늘 이후로 순수한 지저인은 다시는 지저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당치도 않은 말을 떠들어대는 진행자, 참가자들은 놀랍게도 그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광분했다.
“나에게! 나에게 줘!”
“닥쳐! 내가 그놈의 지저인들 때문에 얼마나 큰 굴욕을 당했는지 알아! 만약 이번 경매를 방해하는 놈이 있으면 땅 끝까지 쫓아가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누가 할 소리! 다들 닥치고 있어! 나 우르투스야말로 이번 상품의 합당한 주인이야!”
아무래도 모든 던전 베이비들이 미궁에서 풀려나며 얌전하게 지저를 떠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를 갈며 외치는 참가자들의 모습에 진행자가 흡족한 얼굴로 손가락을 펴 보였다.
“2,000잼! 2,000잼부터 시작합니다!”
“2,100잼!”
“2,300잼!”
몇몇 참가자들이 마구 입찰을 하며 분위기가 과열되었다.
“4,000잼!”
수인족 도우미가 그 순간 VIP 룸에 위치한 관의 주둥이에 입을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아! VIP 룸에서 4,000잼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지저인에 대한 원한은 귀한 분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단번에 두 배가량 올라 버린 입찰가에 참가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원한을 푸는 것도 좋지만 관상용으로도, 일꾼으로 쓰기에도 가치가 없는 던전 베이비라는 상품에 그렇게 큰돈을 투자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큰 액수로 기를 죽여 놓는 것도 나쁘지 않답니다. 어정쩡하게 올렸다가는 오기가 생긴 참가자들이 판을 망치는 수가 있거든요.”
도우미도 나름의 노하우가 있는지 흔들림 없는 얼굴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상황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스테이지 아래에 있던 임프 하나가 올라가 진행자에게 귓속말을 건네는데 진행자가 던전 베이비와 홀을 번갈아 바라보다 경쾌하게 외쳤다.
“방금 들어온 정보입니다! 이번 상품은 심층의 지저인에게만 존재하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무엇이냐! 바로 ‘길잡이’ 능력입니다! 시간과 정성만 들인다면 근방의 지형을 파악하여 보다 완전한 지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끝나는 순간 홀의 참가자 중 하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4,200잼!”
“5,000잼!”
누군가가 입찰을 하기가 무섭게 수인족 도우미가 다시 입찰가를 올렸다. 단번에 최상급 다운 잼 반 개에 해당되는 금액을 높여 버리는 그 배포에 참가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전쟁 끝날 때 손해 본 것도 없었잖아. 왜 저리 지저인에게 집착하는데? 그냥 호기심?”
“길잡이 능력이라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닐 터, 저리 열을 올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구나.”
참가자들이 탐탁찮은 얼굴로 온갖 추측을 내놓았다.
“5,000잼! 이상은 없습니까! 만약 없다면 5,000잼에 던전 베이비는…….”
“5,500잼!”
어지간히 원한이 깊었든지, 그도 아니면 ‘길잡이’ 능력이 탐이 났는지 참가자 중 하나가 이를 악물고 또다시 입찰했다.
“어떻게 할까요?”
수인족 도우미도 이렇게 따라붙는 참가자가 있을 줄은 몰랐는지 다소 당황한 얼굴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김진우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값싼 동정으로 값을 치르기에는 제법 높은 금액이다. 하지만 길잡이 능력과 지도라는 말에 그는 조금 더 세게 나가보기로 했다.
“6,000잼.”
김진우가 짧게 대답하니 그녀가 다소 놀란 얼굴을 해 보이더니 이내 관의 주둥이를 잡았다.
“6,000잼.”
“아! 6,000잼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귀한 분께서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입니다! 6,000잼이라면 어지간한 대형 크리쳐 둘은 구매할 수 있는 돈인데 말입니다!”
진행자의 말이 은연중에 홀의 참가자를 압박하고 있었다.
더 이상 가격을 올렸다가는 지저 귀족의 눈 밖에 날지도 모르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배려 아닌 배려였다.
과연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경쟁적으로 따라붙던 참가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번 경매에 낙찰된 존귀한 분께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힘찬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마치 한 편의 희극과도 같은 광경이다. 억지로 박수를 치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진우는 다시 한 번 던전 베이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
[던전 베이비 ‘윤희’를 얻었습니다.] [11층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타고난 탐색자입니다. 비록 이제까지는 그 능력을 활용할 일이 없었지만, 그녀의 능력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지저에서 절대적입니다.] [‘길잡이’ 능력, 한 번 가본 길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때고 길을 잃지 않는 그녀의 능력은 어쩌면 가보지 않은 길도 어렴풋하게나마 방향을 가늠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윤희’의 능력을 일부 공유합니다.]경매장의 일꾼이 마치 짐짝처럼 건네준 그녀는 김진우의 요청에 따라 깊이 잠들어 있었다.
지상과 지저 중 아직 그 처우를 결정하지 못한 탓에 자신의 얼굴을 내보이기가 꺼림칙한 탓이다.
“이거 이번 정기 경매의 이벤트 상품은 전부 남작님께서 얻어가셨군요. 다른 이들이 알면 배깨나 아파하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따지고 보면 그대도 안젤라의 전 보호자에게 나름대로 빚을 지운 것이 아닌가. 괜한 소리 말고 물건이나 제때 보내도록.”
심드렁한 그의 말에 암상인이 이번에야말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얼굴로 그를 전송해 주었다.
“다시 한 번 경매에 참가해 자리를 빛내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다음 정기 경매에도 꼭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부디 평안하시기를.”
암상인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김진우는 처음 경매장을 찾아왔을 때보다 배는 많아진 인원으로 경매장을 떠났다.
***
경매에서 돌아온 김진우는 적당한 곳에 안젤라의 거처를 마련해 주라 지시하고는 곧장 오너 룸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품에 새롭게 얻은 던전 베이비 ‘윤희’가 안겨 있다.
“후우.”
평평한 제단 위에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은 김진우는 뒤늦게 윤희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안젤라에 비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외모, 다소 낮은 코와 살짝 올라온 눈두덩에 깡마른 몸매가 초라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그녀야말로 김진우에게 경매장에서 가장 큰 지출을 하게 만든 존재이다.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암상인과의 거래를 통해 자금에 대한 압박은 벗어난 상태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길잡이’ 능력은 꽤나 유용하다.
이미 지저에 자리 잡은 지 오래된 다른 미궁의 주인들과는 다르게 자신과 나가들은 고작 이 근방을 겨우 파악해 가기 시작했을 뿐이다.
9층 전체를 아우르기 위해 큰 그림을 그려야 할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또한 당장 미궁이 위치한 9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녀를 쓸 곳은 많았다.
변변한 지도도 없이 저층을 헤매고 다니는 탐색자들에게 그럴싸한 지도를 제공하면 투자한 돈을 단번에 회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민이 된 것은 그녀가 지저의 존재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그녀 역시 빛을 찾아 지상으로 나서는 것이 옳을 테니까.
하지만 마지막 던전 베이비가 지상에 오르고도 무려 1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저 땅 위 세상에 그녀가 설 자리가 있을지 확신이 서지를 않았다.
아니, 그보다 그녀로 인해 자신과 미궁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가장 걱정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시스템에 의해 자신에게 귀속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지상에 풀어주었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길.”
웅크린 채 잠이 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김진우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인 그는 깊게 잠이 든 윤희를 흔들어 깨웠다.
“아…….”
약에 취해 잠든 탓인지 한참 만에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멍한 얼굴로 탄식도 신음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는 쿵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오들오들 몸을 떠는 그녀를 바라보던 김진우는 애써 표정을 다부지게 하고 말했다.
“내가 너의…….”
차마 끝말이 떨어지지를 않는지라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보호자다.”
그의 말에 윤희가 고개를 들 생각도 못하고 연신 몸을 떨어댔다.
***
안젤라는 빠르게 미궁에 적응했다. 기척도 없이 온 미궁을 쏘다니다 김진우가 나타나면 잽싸게 옆자리를 차지하는 그녀 탓에 요즘 도미니크의 심기가 무척 편치 않았다.
호야 역시 안젤라가 꽤나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가 나타날 때면 이를 드러내고 캭캭거리며 사납게 울어댔다.
“저 고양이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에요.”
“반가울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건 김진우의 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를 떠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녀는 타의에 의해 떠안게 된 짐에 불과했다. 가진 바 능력이 탐이 나기는 했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아직도 전 신뢰 받지 못하나 봐요.”
애처로운 얼굴로 눈을 내리까는 그녀의 모습이 여느 사내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이었지만 김진우는 시큰둥했다.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운 주인께서 나를 믿어주실까. 말했다시피 블랙 머천트와의 관계는 그게 다예요. 나의 전 보호자는 내가 진짜 주인을 만나기를 원했고, 블랙 머천트는 전 보호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매라는 해괴한 짓거리를 벌였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블랙 머천트는 그대에게 나의 정보를 캐오라 부탁했고.”
“이미 거절한 일이예요. 만약 다른 마음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말할 이유가 없죠.”
토라진 듯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도 김진우는 단호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나에게 그대의 전 보호자에 대해 말해주지 않지?”
이미 몇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의 전 주인에 대한 의혹만 커진 김진우였다.
“만약 말해준다면 저를 믿어줄 건가요?”
전과는 다른 안젤라의 태도에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묻는 것에 순순히만 대답한다면 믿지 못할 것도 없지.”
“좋아요. 어차피 제 몸도 마음도 다 주인님께 속한 것, 전 보호자의 호의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주인님을 위해 제 마음의 짐으로 두도록 하죠.”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눈가를 훔쳐 보이며 말하는 모습이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듯해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장 알고 싶은 게 제 전 보호자의 정체인가요?”
“더 많지만 우선은.”
김진우의 대답에 그녀가 성큼 다가와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제 전 보호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