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49)
던전 견문록-49화(49/319)
# 49
던전 견문록
제 50 화
#19. 지저 백
잠시 뜸을 들이듯 말을 멈춘 안젤라는 달큰한 숨 한 줌과 함께 한 마디를 토해냈다.
“11층 심층의 지배자 중 하나인 지저 백작 아나톨리우스랍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개 던전 베이비에 불과하던 김진우가 심층 귀족의 이름을 알 리가 없다.
눈살을 찌푸리며 설명을 하라 무언으로 독촉하니 성큼 떨어져 깔깔거리며 웃었다.
“설마 아나톨리우스를 모를 줄은 몰랐네요.”
“내가 꼭 알아야 할 정도로 유명한가?”
아예 뻔뻔하게 나가기로 작정했는지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물었다.
백작이라는 위치가 다소 의외기는 했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존재 탓에 벌써부터 놀랄 필요는 없었다.
‘지저 백작, 철혈의 아나톨리우스 하면 지저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존재입니다. 아나톨리우스가 그녀의 전 보호자였다면 그녀가 새로운 주인을 찾아 헤맨 것도 이해가 가요.’
언제 나타났는지 도미니크가 불쑥 끼어들었다.
“왜지?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나?”
대답은 도미니크가 아닌 안젤라 쪽에서 들려왔다.
“철혈의 아나톨리우스, 그는 말 그대로 철의 거인, 뜨거운 피 대신 차가운 쇳물이 흐르는 그는 저의 원천이 될 수 없었으니까요.”
***
안젤라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세력 구도가 완전히 굳어버려 더 이상 새로운 세력이 발호할 틈도, 또 기존의 세력이 세를 키울 여지도 없는 11층의 상황이나 그 덕분에 미궁을 떠날 수 없게 된 지저 백작들의 상황까지 그녀는 꽤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결국 아나톨리우스는 누군가 그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시발점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었군.”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도 안젤라의 새로운 주인일 것이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아나톨리우스가 그대의 새로운 주인에게 지불해야 할 대금이 조금 더 늘어날 거야. 그렇지 않아?”
“이래서 제가 대답을 하지 않은 거랍니다. 저는 사랑스러운 주인님이 심층의 괴물들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대화를 시작한 이후로 처음으로 진심이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하지만 이미 9층을 정리하고 진군하여 끝내는 심층의 지저 공작에게 향하기로 마음먹은 김진우에게는 안타깝게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말이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면 아나톨리우스는 그대와의 접점을 놓지 않을 테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자리를 주선해 줘. 아나톨리우스와 만나볼 필요가 있겠어.”
안젤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내키지 않아요.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사랑스러운 주인님의 음성이 너무나 달콤하군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먼저 9층, 9층 전부를 주인님의 손에 두세요. 지금 상태로 아나톨리우스를 만났다가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소 무거운 얼굴을 해 보였다.
“잡아먹히고 말 테니까요.”
***
아나톨리우스가 안젤라에게 보여준 것은 호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아나톨리우스에 대해 말을 할 때 이따금씩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거나 겁을 먹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들은 정보로 아나톨리우스의 전력은 9층의 가장 강대한 미궁 열 개를 합쳐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다시 원점이군.”
지금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명확했다.
“도미니크!”
‘네, 주인님.’
“암상인은 언제 도착하지?”
‘일이 정리되는 대로 바로 오겠다고 했으니 길어야 2주면 도착할 거라 생각합니다.’
“암상인이 도착하는 대로 물건을 받아 미궁의 업그레이드를 시작한다. 그리고 최대한 다운 잼을 끌어 모아. 당장은 필요 없지만 곧 필요한 일이 생길 것 같으니까.”
김진우의 지시에 도미니크가 다부진 표정으로 알았다 말하고는 오너 룸 밖으로 사라졌다.
미궁의 등급을 올리고, 9층의 미궁들을 굴복시킨다. 그리고 마침내는 심층까지 나아가 지저 공작과의 오랜 악연을 끝맺음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목표는 확실했다.
“아아, 사랑스러운 주인님, 차갑게 식어버린 심층의 괴물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그 뜨거움과 조바심이 저를 미치게 만들어요.”
황홀한 얼굴을 한 그녀가 은근슬쩍 다가와 입술을 들이댔다. 팔목에 닿는 그 묘하게 차갑고도 보드라운 감촉에 김진우는 단호하게 손을 휘저었다.
“원천을 채우기에는 이르지 않나?”
“부, 부디 지금의 주인님을 느낄 수 있는 영광을…….”
피를 갈구할 때면 평소 보이던 기품과 고고함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안젤라는 금단증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온몸을 덜덜 떨어댔다.
“괘씸해서 안 되겠군. 그대는 주인에게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부터 배워야 할 거야.”
김진우의 차가운 태도에 안젤라는 더욱더 간절하게 매달렸다.
***
암상인은 안젤라를 억지로 떠맡게 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약속한 물품을 전부 가지고 왔다.
“크으, 정말 지독하십니다요. 그녀 하나만 해도 상당히 진귀한 존잰데 굳이 이런 것까지 받으셔야 하겠습니까?”
“웃기는군. 이게 블랙 머천트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도 아니지 않나?”
이미 안젤라를 통해 전후 사정을 전부 파악한 후다. 아나톨리우스가 그저 순수한 호의만으로 그녀에게 새로운 주인을 찾아준 것이 아니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아나톨리우스는 심층의 판도를 바꿀 계기, 그 계기를 열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안젤라의 안목을 빌린 것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블랙 머천트가 제 손해를 감수하며 나섰을 이유가 없었다. 아마도 암상인이 생색을 내는 물건은 전부 아나톨리우스의 창고에서 나왔을 것이다.
정곡을 찔렸는지 암상인이 찔끔 놀란 얼굴로 안젤라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아나톨리우스도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고 해준 말이었을 테지. 그리고 그 사실은 그대도 알고 있을 테고. 그러니 그렇게 되도 않는 연기는 집어치워.”
김진우의 말에 암상인이 뒤늦게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비벼댔다.
“뭐, 출처야 어찌 됐건 간에 아까운 건 아까운 거 아니겠습니까? 본디 상인이란 족속들이 제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건 끔찍하게 생각하는지라… 이해해 주십시오. 물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만. 헤헤.”
“그래?”
김진우가 또다시 무언가 트집 잡을 기미가 보이자 암상인이 괜스레 허둥지둥했다.
“그렇다면 나의 ‘외유’를 염탐하는 대가로 안젤라에게 그대가 지불하기로 한 대가는 무엇이지?”
결국 안젤라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암상인은 포기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암상인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김진우에게 바치게 되었다. 신뢰를 부르짖던 자신이 고객의 정보를 빼돌리려 했으니 할 말이 없을 만도 했다.
하지만 김진우는 암상인의 절절매는 얼굴을 보며 호통을 치면서도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지금 암상인이 보이는 어리숙한 모습은 진짜 얼굴이 아니었다. 지저의 온갖 괴물을 상대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암상인이 설마 이 정도로 허점투성이일까.
아마 암상인과 블랙 머천트 역시 자신과 미궁의 성장을 통해 얻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김진우는 화가 난 척, 배신감을 느끼는 척 어울리지 않는 연기를 해 보이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수고로움에 대한 대가로 김진우는 최소한 미궁을 7등급까지 업그레이드할 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들은 각자 후원하는 미궁을 선택할 수 있답니다. 아마 저 못생긴 암상인은 주인님을 후원하기로 결정했을 거예요.”
“그건 또 처음 듣는 소리군. 왜 하필 나지?”
“주사위의 가장 낮은 수는 이따금씩 가장 높은 수를 이기기도 하니까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아마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도미니크가 미궁의 운영에 관한 정보를 잘 알고 있다면 안젤라는 외부의 정보에 제법 정통했다.
처음으로 안젤라를 얻은 것이 흡족해진 그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는데, 언제 달라붙었는지 그녀가 철썩 붙어왔다.
“한 모금? 아니면 한 방울이라도…….”
“안 돼.”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그녀는 피에 관한 집착이 지나치다는 것이다.
***
“알았지? 당분간은 여기 릭샤샤를 따라다니면서 주변의 지리를 익히도록 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윤희의 텅 빈 눈동자를 보며 김진우는 릭샤샤에게 몇 번이고 전투를 피하라 당부했다.
어찌 됐건 간에 윤희의 목적은 9층의 지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럼 다녀오도록.”
“주인의 뜻대로.”
이번에도 릭샤샤만 대답할 뿐 윤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자신 역시 지상에 올라가 적응하는 데 무려 5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었다.
하물며 볕 따뜻한 지상도 아닌 이 땅 밑 미궁에서 과연 그녀가 자신을 찾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때가 온다면 왜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녀가 지저를 떠나지 않았는지를 듣게 될 수 있으리라.
미궁을 나서는 윤희와 릭샤샤에게 십여 명의 장거리 순찰자가 따라붙었다. 그렇게 탐사대가 미궁을 떠나고 김진우는 다시 빠르게 미궁의 일들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업그레이드가 진행 중인 핵의 진척도를 확인해 보았고, 남은 수용인원을 계산하여 부족한 전력을 채워 넣었다.
자원 채집에 부쩍 열을 올리는 도미니크의 아래로 나가 일꾼들을 더 소환하여 붙여주었고, 퀀투스와 오르테아가에게 용사와 투사를 붙여주었다.
미궁은 전보다 한층 더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미궁의 등급은 6등급을 넘어 7등급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지상의 상황도 슬슬 궁금해지는 참이라 그는 미궁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포탈을 열려던 그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상으로 향하는 포탈을 여시겠습니까?] [탐식의 땅 우서의 봉토로 향하는 포탈을 여시겠습니까?] [두 개의 포탈은 별도의 대기 시간이 적용됩니다.]그러고 보니 우격다짐으로 협박하여 우서의 충성을 받아낸 지 꽤나 시간이 흘렀건만 한 번도 탐식의 땅을 가본 적이 없다.
뒤늦게 생각이 난 그는 탐식의 땅 우서의 미궁으로 향했다.
“와, 왕이시여!”
왕좌라고 할 것도 없이 커다란 바위에 올라앉아 눈을 내리깔고 있던 우서는 김진우를 보자마자 혼비백산했다. 폴짝대며 왕좌에서 뛰어내린 우서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몸을 꿀렁댔다.
“아, 지나는 길에 들러본 거야.”
평소에는 형체도 없는 덩어리 상태로 있는 모양인지 뒤늦게 우서가 인간의 형태를 해 보였다.
꿀렁대며 일어나는 변화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던 김진우는 이내 탐식의 땅을 관장하는 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게 네 미궁의 핵인가?”
이미 봉신의 맹세를 하며 김진우에게 속해 버린 우서였지만, 미궁의 핵을 드러내 보이기에는 꺼림칙한 모양이다. 황급히 몸을 부풀리며 핵을 가리는 우서를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가려봐야 4등급이지.”
그것도 아주 질이 낮은 핵인지 나가의 미궁이 4등급이었을 무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핵의 모습이다.
“흠. 이게 전부?”
“그렇습니다.”
우서에게 일러 병력을 모아 대략적인 전력을 비교해 본 김진우는 다시 한 번 탐식의 미궁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남들 다 있는 영웅급 소환수 하나 없이 온통 점액질 덩어리로 이루어진 탐식의 군대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9층의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은 것인지, 이래서야 미궁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가장 인접한 미궁이 어디지?”
“망치와 모루의 왕이 다스리는 미궁과 망자의 왕이 다스리는 미궁이 있습니다.”
우서의 말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번뜩이며 김진우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