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53)
던전 견문록-53화(53/319)
# 53
던전 견문록
제 54 화
“남작님 행차시다! 길을 비켜라!”
“이놈들! 썩 물러나래도!”
시끄럽게 목청을 울려대는 누런 멧돼지들의 모습이 꼭 처음부터 김진우의 수하이던 것만 같아 차라리 황당할 지경이다.
“이게 인장 때문인지, 아니면 저놈들이 특이한 건지……”
하도 어이가 없어 그렇게 말하니 곁에 있던 안젤라가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네 이놈들! 사냥감이 나타났다고 해서 보냈더니 아예 붙어먹은 게냐!”
결국 참지 못한 거대한 멧돼지, 족장이 무리를 헤치고 나왔다.
다른 멧돼지들보다 두 배는 거대한 덩치에 마치 창처럼 길고 날카로운 어금니, 퉁방울만 한 네 개의 눈동자가 과연 족장다운 위엄이 있었다.
족장이 호통을 치자 두 멧돼지가 찔끔 놀라 변명하듯 입을 놀렸다.
“그게 아니라 심층의 귀한 분이 오셨다니까요!”
두 멧돼지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니 족장이 네 개의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려 김진우와 일행을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강해요. 8층의 존재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안젤라가 슬며시 경고했다.
[알고 있어.]하지만 김진우는 안젤라가 경고하기 전부터 족장 멧돼지의 힘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남작의 고유 능력인 ‘말단 귀족의 권위’가 발동되었습니다.] [지성이 있는 존재라면 그 권위를 거역할 수 없습니다. 단, 남작 본인보다 상대가 강하다면 역으로 인장을 노리고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존재에게 통하기에는 카리스마가 아직 부족합니다.] [큰엄니 멧돼지 부족의 족장이 인장의 권위에 저항합니다. 하지만 완전한 저항에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족장이 약간 위축되었습니다.]두 멧돼지를 완벽하게 굴복시킨 지저 귀족의 권위가 족장 멧돼지에게는 통하지 않은 것이다.
“귀족씩이나 되는 분께서 여긴 어쩐 일이오? 심층의 귀족들이 제 땅을 벗어났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소만.”
호통을 칠 때와는 다르게 다소 주눅이 든 음성이긴 하지만 족장 멧돼지는 확실하게 의사 표현을 했다.
“지나는 길이지. 7층으로 향하는 길인데, 그대 말처럼 난 8층은 처음이라서 그대의 수하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족장 멧돼지는 그 말을 듣고 커다란 머리통을 기우뚱거리며 의아해했다.
“귀족 분께서 위로 올라갈 일이 있소? 7층이라고 해서 별것 없을 텐데.”
“그건 개인적인 볼일이라 이야기해 줄 수가 없군.”
김진우는 당당했다. 상대의 수가 많기는 하지만, 지금의 일행이라면 멧돼지 무리를 돌파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흠…….”
족장 멧돼지는 김진우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혹시 8층이 어떤 상황인지 아시오?”
“알 턱이 있나. 분명 말했을 텐데. 8층은 처음이라고.”
“그렇구만. 안됐지만 발길을 돌려야 할 거요.”
“막을 텐가?”
김진우가 새파란 광망을 흘리며 으르렁거렸다. 족장 멧돼지가 그 서슬에 한 발자국 물러나며 코를 푸르릉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거, 성격도 급하시오. 내가 막는다는 게 아니라 8층의 상황이 좀 그렇소.”
뭔가 사정이 있는 듯해 이유를 물으니 곁에 있던 두 멧돼지가 슬쩍 대답했다.
“8층은 지금 전쟁 중입니다. 아마 족장께서는 괜히 귀하신 분께서 전쟁에 휘말리는 건 아닌지 걱정하시는 듯합니다.”
“전쟁?”
두 멧돼지의 말에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들으신 그대로요. 지금 8층 상황이 워낙에 번잡해서 귀하신 분께서 가는 길이 그다지 편하진 않을 것이오.”
이건 또 생각도 못한 상황이라 그가 낭패스러운 얼굴을 하니 족장 멧돼지가 코를 벌름대다 물었다.
“급한 일이시오?”
“급하다면 급하고 아니라면 아닌데, 다시 걸음을 돌리고 싶지는 않군.”
그의 말에 족장 멧돼지가 네 개의 눈동자를 가늘게 뜨더니 김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8층을 통과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오.”
“용건만 간단히 말하지. 뭔가 제안할 게 있다면 지금 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족장 멧돼지가 냉큼 한 가지 제안을 했다.
“8층을 가장 빠르게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드릴 테니 날 좀 도와주시오.”
“내 볼일은 8층에 있지 않아. 이곳에 오래 머무르기엔 상황이 좀 그렇군.”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좋소. 7층에서의 일이 끝나면 들르시오. 부탁은 그때 말하리다.”
“그쪽이 더 번거로울 거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만약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거절해도 좋소.”
족장 멧돼지의 말에 김진우는 잠시 일행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손해 보는 제안은 아니군. 근데 그렇게 해서 그대가 얻는 게 뭐가 될지 모르겠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존귀한 분께서는 나중에 들르기나 하시오.”
어차피 남의 사정을 일일이 헤아려 걱정해 줄 사이도, 또 상황도 아닌지라 김진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좋소, 거래 성립이오.”
***
“으윽.”
김진우가 허리를 두들기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8층과 7층을 잇는 통로가 있다.
“그럼 약속을 지켰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곳까지 안내 아닌 안내를 한 영웅급 멧돼지의 말에 김진우는 수고했다며 손을 휘저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인 멧돼지가 시끄럽게 목청을 울려댔다.
“가자, 게으른 돼지들아!”
지저의 먼지란 먼지는 전부 뒤집어쓴 것처럼 잿빛으로 변한 멧돼지들이 바닥에 누워 혀를 빼물고 숨을 몰아쉬다 우두머리 멧돼지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잠깐 사이에 기력을 찾은 것인지 멧돼지들이 뀌익거리며 울어대다 이내 저 멀리 사라졌다.
“멧돼지답다고 할까요. 정말 무식한 방법이었어요.”
사라진 멧돼지들을 바라보며 안젤라가 드물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끄응.”
그녀의 말에 100퍼센트 공감한다는 듯한 얼굴로 김진우가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한창 전쟁 중인 8층을 통과할 방법이 있다기에 뭔가 묘수라도 있는가 싶었는데 김진우 일행을 태운 한 떼의 멧돼지들은 8층을 그대로 가로질러 미친 듯이 달려댔다.
얼마나 무식하게 달려대는지 한창 피 튀기는 전투를 벌이던 크리쳐 무리마저도 기가 질려 길을 내어줄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선불 맞은 멧돼지라는 말의 진가를 보여준 것이다.
“멧돼지란 놈들이 그다지 좋은 탈것은 아닌 것 같군.”
“말도 마십시오. 어찌나 몸을 떨어대는지 아까운 제 몸을 반절은 잃은 것 같습니다.”
김진우의 푸념에 우서가 그렇게 말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 점액질로 이루어진 몸이 처음 길을 나섰을 때에 비해 절반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 있다.
“덕분에 빨리 오기는 했으니 그나마 위안을 삼아야겠군.”
며칠이나 계속되던 광란의 질주를 떠올린 일행이 몸서리를 치는 것을 바라보던 그가 우서에게 통로 너머의 상황을 살피라 명령했다.
“조용합니다.”
“8층에 올라오기 전에도 그렇게 말했지.”
“이번에는 조금 더 멀리 보내서 살폈습니다. 확실합니다.”
이번만큼은 믿어달라는 우서의 말에 김진우는 조심스럽게 7층에 올라섰다.
통로를 지날 때면 느껴지던 유난스러운 어둠과 부유감이 이내 사라지고 그는 마침내 7층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을 때, 김진우와 일행은 끝없이 몰려드는 크리쳐와 전투를 치러야 했다.
[전투 중에는 스텔스 능력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전투 중에는 스텔스 능력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당장 몸을 숨기려고 해도 전투가 끝이 나지를 않으니 스텔스 능력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
“헙!”
“키에에엑!”
눈이 시뻘겋게 변해 달려드는 크리쳐의 머리통을 그대로 무릎으로 찍어버린 김진우는 짧게 눈을 굴려 전황을 살펴보았다.
우서는 물리 공격에는 면역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이리저리 크리쳐들을 몰아세우며 잘 싸우고 있었고, 안젤라와 윤희 역시 기대 이상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으아아, 이놈들 완전 미친 것 같은데요?”
우서의 방정맞은 음성에 김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7층의 크리쳐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흉포한 놈들의 모습에 위화감이 절로 들었다.
“끝!”
하지만 일행의 면면이 워낙에 대단하다 보니 그 흉포한 놈들마저도 금세 피떡이 되어 바닥에 눕고 말았다.
“위층은 원래 다 이렇습니까?”
7층에 처음 들어설 때보다 훨씬 더 작아진 몸을 한 우서가 철퍼덕 바닥에 눌어붙으며 말하는데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리가. 매일 이렇게 박 터지게 싸워대면 남아나는 미궁이 없겠지.”
주변에 널린 크리쳐의 시체를 보며 김진우가 말했다.
벌써 몇 번째 전투인지 모른다. 7층에 올라선 첫날을 제외하고는 전투의 연속이었다. 살아 있는 존재의 기척을 미리 알아차려 경고를 해주는 안젤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피할 수는 없었다. 7층에 존재하는 크리쳐들이 하나같이 미쳐 날뛴 탓이다.
“진짜 무슨 일이죠? 지금까지만 보면 7층이 차라리 심층보다 더 끔찍한 곳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에요.”
오랜만의 휴식에 안젤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사실 짚이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땅 밑 세상에 만약 대대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면 그건 4층의 미궁을 찾겠다고 지저에 들어선 수천 명의 탐색자 때문일 것이다.
탐색자들이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전 층에 걸쳐 난리가 벌어졌을 리가 없었다.
뒤늦게 8층이 전쟁에 휩싸인 이유를 묻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흔히 있는 세력 다툼이라고 생각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음?”
생각을 정리한 김진우가 스텔스 능력을 활성화시키려다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윤희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곁에서 크리쳐들과 공방을 주고받던 윤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에 안젤라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이 근방에 살아 있는 존재는 많지만 윤희의 기척은 없어요.”
“다시 찾아봐. 없을 리가 없잖아.”
안젤라가 이번에는 제법 공을 들여 주변을 탐색했다. 하지만 여전히 윤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없어요. 정말. 이 근방에는 정말 없다고요.”
그녀의 말에 김진우가 인상을 썼다.
“안젤라, 정말 이 근처에서 윤희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네, 없어요. 정말로 없어요.”
“저 역시 확인해 보았지만 그 그림자도 찾지 못했습니다.”
언제 풀어둔 것인지 꾸물거리며 다가오는 점액질 덩어리를 주워 붙이며 우서가 안젤라의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
“그럼 대체…….”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가 말을 하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7층의 지도가 갱신되었습니다.] [7층 지도의 가려졌던 영역의 일부가 공개되었습니다.]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본 그는 시야 한 귀퉁이에 반투명하게 펼쳐진 지도를 보며 끝내 신음을 내뱉었다.
일행이 지나온 길, 그 일직선의 경로와는 한참 떨어진 지도의 일부분, 원래대로라면 까맣게 남아 있을 7층 지도의 일부가 밝혀진 탓이다.
마치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온통 까만 지도의 한가운데 돋아난 지도의 영역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이리저리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한 가지 가설을 세운 김진우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딱 하나,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경우가 있었다.
지저의 초입을 헤매던 자신이 엉뚱하게도 9층까지 단번에 이동되었던 그날, 지금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날 그는 나가의 미궁을 얻었다.
“음…….”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백 선생은 처음 주인 없는 미궁이 7층에 있을 거라 말했다. 뒤늦게 4층에서 미궁이 발견된 탓에 그 정보는 잘못된 정보라 판단했다.
그런데 만약 처음부터 정보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미궁이 처음부터 4층이 아닌 7층에 있던 것이라면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윤희가 미궁에 이끌려 사라졌다는 건 너무나 공교로운 일이었다.
윤희가 미궁에 이끌렸다는 건 도대체 얼마나 수많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하필이면 자신을 포함한 두 던전 베이비가 모두 미궁에 이끌렸다는 건 말이 되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꾸만 생각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설마?”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지도는 계속해서 갱신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지도는 더 이상 변하지 않았다.
김진우가 허공에 떠오른 반투명한 지도를 바라보다 불쑥 손을 내밀었다. 마치 허공을 더듬듯 이리저리 손을 휘두르던 그는 양손으로 허공에 하나의 선을 연결해 보였다.
그렇게 연결한 선이 아직 채 밝혀지지 않은 지도, 검게 표시된 미지의 영역을 넘어 이제 막 움직임을 멈춰 선 무언가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그 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멈췄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안젤라와 우서를 불러 말했다.
“윤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