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55)
던전 견문록-55화(55/319)
# 55
던전 견문록
제 56 화
메시지를 보는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윤희는 미궁의 선택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선택에 대해 결정을 내릴 의지 자체가 전무한 상황. 아마도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고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을 것이다.
“윤희.”
생각을 정리한 김진우의 착 가라앉은 음성에 윤희가 고개를 돌렸다. 초점조차 잡히지 않은 눈동자를 보며 그는 다시 한 번 그녀가 판단을 ‘보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 탁한 눈빛에는 그 어떤 자발적 의지도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판단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받아들여.”
이곳까지 오는 길에 이미 결정을 내려둔 일이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선상에서 시작한다면 필시 미궁의 등급은 고작 1등급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핵을 추출하여 자신의 미궁에 설치한다고 해서 효율이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미궁 간의 위치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에게는 해결책이 있었다.
“미궁을 받아들인다고 해.”
그 말에 윤희가 반문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석탁에 새겨져 있던 피에로 가면이 불쑥 튀어나와 그녀의 가슴께로 파고들었다.
“아아…….”
짐승의 숨소리처럼 신음도 탄성도 아닌 소리를 내뱉은 윤희의 텅 빈 눈동자가 허공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눈앞에는 미궁의 주인만이 볼 수 있는 스테이터스 창이 떠올라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김진우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의…….”
난생처음 겪는 기묘한 경험에 혼란스러울 게 분명한 그녀가 반사적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기사가 되어라.”
[지저 남작의 권능 ‘봉신의 맹세’가 발동합니다.] [축제의 왕 윤희를 지저 남작 두 번째 기사로 임명하려 합니다.] [기사는 가장 충성스럽고 용맹한 남작의 수족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충성스러웠던 것은 아닙니다. 봉신의 맹세를 하고 나서야 그들은 ‘진짜 충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이미 우서를 기사로 임명할 때 한 번 본 메시지 창이 다시 한 번 주르륵 허공에 떠올랐다.
[윤희를 두 번째 기사로 임명하시겠습니까?]김진우와 윤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의 주관자 윤희가 가신(기사)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기사 윤희는 주인과 운명을 함께하게 됩니다. 나가의 미궁이 파괴될 경우 윤희 역시 소멸될 것입니다.] [윤희가 다스리던 축제의 땅 ‘파티 홀’이 봉토가 되었습니다. 윤희는 여전히 한 미궁의 지배자이지만 섬겨야 할 주인이 생겼습니다. 파티 홀을 관장하는 핵에 축적되는 던전 에너지의 20%가 나가의 미궁에 속합니다.] [파티 홀의 동기화가 끝나지 않아 아직 두 미궁을 연결하는 포탈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김진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7층의 탐색을 통해 목적한 바를 이루기는 했지만 아직 더 확인할 것이 남아 있었다. 힘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우서와 은신 능력이 없는 윤희를 돌려보낸 김진우는 안젤라만 대동한 채 빠르게 미궁을 올라갔다.
6층 역시 크리쳐들이 미쳐 날뛰고 있기는 했지만, 이미 스텔스 능력으로 어둠 속에 녹아든 그와 안젤라는 어렵지 않게 길을 잡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이준영이 전해준 6층의 지도가 있으니 헤매는 일도 없었다.
일정이 대폭 줄 수밖에 없었다.
4층에 도달한 김진우는 스텔스 능력을 풀었다.
던전 베이비 중에는 신기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더러 있어 괜히 은신한 채 이동하다가는 크리쳐로 오인 받아 공격당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모습을 드러내고 이동한다.”
이미 오는 길에 대충 호칭부터 시작해 세세한 내용을 입을 맞춰둔 탓에 김진우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4층에는 예상대로 헤아릴 수 없는 탐색자들이 내려와 있었다. 가는 길에 마주친 탐색자의 수만 해도 거의 100여 명을 웃돌 지경이다.
“여긴 마치 지상 같군요.”
탐색자들을 처음 마주친 안젤라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몇 번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마도 지상인들이 이렇게 지저를 쏘다닌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왜죠? 제가 알기로 지상인들은 지저를 꺼린다고 들었어요. 어둠도 크리쳐도 지상인에게는 두려운 존재 아닌가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김진우는 짧게 설명해 주었다.
“때로는 두려움을 욕심이 이길 때도 있으니까.”
다운 잼이라는 보석이 지저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탐색자라는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지상에는 다운 잼보다 훨씬 가치 있고 아름다운 물건이 많다고 들었는데 왜 그렇게 다운 잼에 집착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해 보인 그녀는 오히려 지상에 흥미가 있는 듯했다.
“서로에게 없는 것이 더욱 탐나는 법이지.”
지상인은 다운 잼을, 지저인은 생명력 가득한 지상의 땅을, 그렇게 서로에게 없는 것을 갈구했기에 언더 워가 일어난 것이리라.
“그만. 지금은 잡담을 나눌 때가 아니야.”
복잡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아 김진우는 적당히 대화를 정리했다. 안젤라는 궁금한 것이 많아 보였지만, 충실하게 그의 명령에 따랐다.
“혹시 이쪽에서 뭐 못 봤습니까?”
“글쎄요. 5층에서 방금 올라온 터라… 뭐가 있습니까?”
오고 가는 길에 마주친 탐색자 중 몇몇은 대범하게도 김진우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시치미를 뚝 뗀 그에게 오히려 자신이 아는 정보를 토해내야 했지만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 찾지 못했군.”
탐색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볼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탐색자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미궁이 그렇게 쉽게 발견될 것이었다면 그간 지저를 숱하게 들락날락거리던 던전 베이비 중에 미궁의 주인 아닌 자가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4층에서 발견되었다는 미궁이 7층에서 윤희가 얻은 축제의 땅 파티 홀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주인을 찾는 미궁에게 층의 구별은 소용이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나가의 미궁을 얻었고, 윤희 역시 공간을 도약해 단숨에 미궁에 이르렀다.
선택 받은 이들에게는 싫어도 가게 되는 곳이 주인 없는 미궁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평생을 헤매도 발견하지 못할 곳이 바로 미궁이었다.
“음.”
조금씩 탐색자들과 마주치는 횟수가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휘유.”
김진우와 안젤라를 스쳐 간 탐색자들이 걸음을 멈춰 세우고 휘파람을 불었다. 사내들의 눈이 전부 안젤라를 향해 있다.
“얼굴 좀 가릴 수 없나?”
“갑갑해요.”
대놓고 즐기는 표정인 안젤라를 보며 김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도 미추(美醜)에 구애받지 않는 지저의 존재들 사이에 있다 관심을 받으니 즐거운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백금의 머릿결과 창백한 피부는 김진우가 보기에도 지독히 아름다웠다.
지금 있는 곳이 자신의 미궁이었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했겠지만 아무래도 장소가 좋지 않았다.
“왜요? 혹시 주인님은 다른 사람들이 제 얼굴을 보는 게 싫으신가요?”
생글생글 미소를 띤 안젤라가 바짝 붙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눈에 기대감이 가득한 것이 김진우가 자신을 보며 소유욕과 독점욕을 느낀 건 아닌지 기대라도 하는 눈치다.
하지만 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네 외모가 너무 튀니까 움직이기 부담스러워.”
툭 내뱉은 말에 그녀가 입을 비죽이더니 앙탈을 부렸다.
“그러니까 제 외모가 어떻게 튀는데요?”
“넌 지나치게 예쁘니까.”
무뚝뚝한 만큼 솔직한 말에 안젤라가 금세 행복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정작 김진우는 아무 생각 없이 감상을 말했을 뿐이라 그녀가 왜 그런 얼굴을 하는지 도통 이해를 하지 못했다.
“어쨌건 그거, 후드 뒤집어써. 괜히 귀찮은 벌레 꼬일까 봐 걱정되니까.”
“네에에!”
대답을 길게 뺀 그녀가 후드를 냉큼 뒤집어썼다.
“음? 근데 주인님.”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뭔가를 발견한 모양인지 그녀가 벽으로 가려진 어둠 너머를 바라보았다.
“탐색자라는 이들 그룹 중에 수백 명이 한 번에 몰려다니는 경우도 있나요?”
“혹시?
그녀의 질문에 무언가 낌새를 느끼고 김진우가 걸음을 멈췄다.
“네. 저 너머에 탐색자들의 기척이 수백 이상 몰려 있어요.”
소규모 탐사대를 선호하는 탐색자들이 한 곳에 수백이나 몰려 있다면 둘 중 하나였다.
팀 하나로는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무지막지한 괴물이 있다든가, 아니면 뭔가를 발견했다든가. 그리고 지금 그들이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그건 김진우 역시 찾고 있던 무언가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앞장서!”
김진우의 말에 안젤라가 어둠에 동화되어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
“니들이 뭔데 길을 막아!”
“협회랍시고 감투 하나 달더니 탐색자들이 전부 아래로 보이냐?”
지저에서는 드물게 제법 널찍하게 뚫린 통로에 수백 명의 탐색자가 몰려들어 난리를 쳐댔다.
“아니, 우리가 미궁을 독점하겠다는 게 아니라니까!”
수백 명의 탐색자와 대치한 사내들 역시 못해도 100여 명은 되어 보였다.
“그럼 당장 길 열어!”
“내 발로 내가 가겠다는데 언제부터 탐색자협회가 우리한테 명령하는 위치가 됐다고 이렇게 뻗대, 뻗대기를!”
사내가 진땀을 흘리며 탐색자들을 진정시킨다고 한마디 했지만 역효과였다.
“아, 돌겠네! 미친놈들아, 미궁 주인 됐다고 사람 하나 죽은 게 바로 얼마 전이야! 근데 지금 여기서 또 누가 덜컥 주인 돼봐! 그럼 어떻게 되겠어?”
본디 힘없는 자가 보물을 얻으면 피바람이 부는 법이다. 그 사실을 몇 번이나 주지시켜 주려 했지만 탐색자들은 막무가내였다.
“죽은 놈은 제 팔자소관이지! 그리고 그걸 왜 협회에서 걱정해 주는데?”
“니들이 미궁 먹을 작정 아냐? 지금 그래서 길 막은 거잖아! 아까 안으로 송종철이하고 애들 몇 들어가는 거 봤거든?”
가장 앞에서 협회의 사내들과 대치하고 있던 탐색자 하나가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뭐? 그게 진짜야?”
“이런 미친! 어디서 개수작이야!”
협회의 인물 몇이 안쪽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탐색자들은 당장에라도 길을 뚫고 달릴 기세였다.
개중에 성질 급한 몇몇이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달려드는 게 까딱 잘못했다가는 지저에 때 아닌 피바람이 불 지경이다.
[아무래도 미궁이 발견된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 난리가 났을 리가 없지.]근방에서 몸을 숨기고 은신한 채 접근한 김진우와 안젤라는 돌아가는 상황을 스윽 보고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안쪽으로 들어가 볼까요? 벌써 들어간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그러자고 온 거니까.]그렇게 말한 김진우는 조심스럽게 꽉 들어찬 사람들 틈을 헤집고 이동했다.
[서두르자. 잘못하면 들통 나겠어.]기척을 감지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몇 섞여 있는지 우려한 대로 탐색자 중 몇몇이 낌새를 느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그 눈빛이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벌써 들킨 거 같은데요.]안젤라의 말에 고개를 돌린 김진우는 푸른 눈빛을 줄줄 흘려대는 사내 하나를 발견하고는 낭패스러운 얼굴을 했다. 대충 눈치를 보니 은신한 적을 탐지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뭔가 몸을 숨기고 있어!”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니 소란스럽던 통로가 더욱 부산스러워졌다.
“뭐가 숨어 있대! 조심해!”
“크리쳐의 습격이다! 다들 전투 준비!”
사내의 외침이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져가며 통로를 발칵 뒤집었다.
“전투 준비! 미궁이고 뭐고 애들부터 추슬러! 재수 없으면 몇 놈 죽어나가는 건 일도 아니야!”
탐색자들의 앞길을 막고 있던 협회의 던전 베이비가 연달아 지시를 내리자 미리 준비되어 있던 바디 벙커와 조명이 번쩍하고 통로를 밝혔다.
“기감이 좋은 놈들 앞으로! 자신 없는 놈은 아예 뒤로 빠져!”
대열이 뒤집히고 그 안에서 몇몇 사내들이 뛰쳐나옴과 동시에 탐색자들이 아우성을 쳐댔다.
[지금이야! 달려!]처음에는 들켰다 싶어 낭패한 표정의 김진우였지만 정작 그 소란이 비좁은 통로를 비집고 들어갈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