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62)
던전 견문록-62화(62/319)
# 62
던전 견문록
제 63 화
“승자의 권리로 망자의 땅과 그 미궁의 소유권을 그대 블랙 머천트에게 넘기겠다.”
“아이고, 잘 생각하셨습니다요.”
이번에도 김진우가 혹시 또 돌발행동을 할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지 암상인이 반색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김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 조건이 있다.”
“이번엔 또 뭡니까? 이번에는 약조하신 것이 있으니 전처럼 그러시면 안 됩니다요.”
암상인의 애원에 김진우가 대답했다.
“이런 불길한 것이 내 영지 근처에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블랙 머천트는 이 미궁의 핵을 회수하여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두라.”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조건인지 암상인이 미궁의 핵과 김진우를 번갈아 바라보다 말했다.
“그게 무슨… 지금 그대로 두고 복구시킨다고 해도 깨질까 말까 한 핵을 추출하란 말씀이십니까? 안 됩니다요. 혹시 추출하는 도중에 깨어지기라도 하면 대체 저보고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고.”
암상인이 절대로 안 된다며 난리를 피워댔다. 무리도 아니었다. 김진우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도 암상인의 행동이 절대로 엄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깨어지기 직전의 핵(5등급)] [한때는 망자의 땅을 관장하고 수많은 망자들과 사자들의 근간이 되었던 이 막강한 핵은 마지막 순간 한계의 한계까지 혹사당해 금이 간 상태입니다. 언제 깨어질지 모를 이 미궁의 핵을 복구하려면 많은 시간과 자금이 필요할 것입니다.] [추출을 시도할 경우 절반의 확률로 핵이 완전히 활동을 멈춥니다.]절반의 확률로 핵이 파괴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그간 미궁을 귀히 여겨온 암상인에게는 그 절반의 부담이 절망적이리라.
“그럼 어떻게 할까. 난 정말 이 망자의 땅이란 곳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
거듭된 말에 암상인이 뭐라 말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러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진우가 한참 뜸을 들이다 넌지시 말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방, 방법 말입니까? 핵을 추출해 가란 말씀만 아니라면 뭐든지 따르겠습니다.”
암상인이 죽다 살아난 얼굴로 냉큼 대답했다.
“그대와 블랙 머천트는 지저에서 미궁이 사라지는 것을 가장 걱정하고 있을 터. 내 말이 맞나?”
“맞습니다요. 저희가 아무리 보따리 들고 지저를 헤매는 천한 상인이라고 하지만 지저의 근간이 되는 미궁이 귀한 건 알고 있습죠.”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겠군.”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씨익 웃어 보이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대들은 최선을 다해 깨어진 미궁의 핵을 복구하라. 내가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르리라.”
뒤늦게 김진우의 손에 들린 반짝이는 무언가를 확인한 암상인이 경악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건……!”
“혈표의 심장이지. 그리고…….”
그가 태연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혈표의 심장을 던졌다가 받는 것을 반복했다. 암상인의 동그란 눈동자가 허공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붉은 보석을 따라 마구 흔들렸다.
“그대들이 그토록 귀히 여기는 미궁의 핵이 보관된 그릇이기도 하지.”
***
거래를 끝마친 암상인은 혹시라도 시간이 흘러 미궁의 핵이 깨어질까 봐 걱정이라도 했는지 허겁지겁 미궁을 떠났다.
“괜찮은 거래였어. 안 그래?”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김진우가 발리셔스를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자신의 눈앞에서 그동안 이룩해 온 모든 것이 자의와는 상관없이 거래되는 모습을 본 발리셔스는 완전히 삶의 의지를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발리셔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알 거 없어. 어차피 너하고는 이제 상관없는 일이니까.”
김진우는 깨진 미궁의 핵을 복구하는 대가로 4층에서 빼돌린 미궁의 핵을 제시했다. 암상인은 다소 아쉬운 눈치였지만, 그리 길게 고민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름 계산이 있겠지만, 결국 어떤 쪽이든 미궁의 핵만 온전하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처치 곤란이던 미궁의 핵을 높은 값에 넘긴 것이나 다름없으니 금상첨화였다.
고작 지저의 초입에 불과한 4층에서 발견된 미궁의 핵이다. 가치가 없을 리야 없겠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강해지는 지저 미궁의 특성상 그리 큰 애착을 두지는 않았다.
어차피 윤희가 얻은 ‘축제의 땅’에 포함된 부수입과도 같은 물건, 거기다가 주인을 언제 찾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애물단지와도 같은 미궁의 핵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참에 망자의 땅에 있던 미궁의 핵을 온전하게 얻는 대가로 처치 곤란이던 미궁의 핵을 처리한 것이다.
당장 전력화할 수 없는 4층 미궁의 핵보다 수리만 하면 5등급 상태 그대로 전력을 발휘하는 망자의 핵이 더욱 가치가 높은 건 당연했다.
거기에 더해 또다시 암상인에게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었으니 이번 거래도 그는 크게 만족했다.
“이제 우리끼리 남은 계산을 봐야지?”
생각을 정리한 김진우가 왕좌에 앉아 발리셔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발리셔스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다물었다.
“그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발리셔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김진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하나는 이대로 암상인에게 팔려 그 비루한 몸뚱이마저도 갈기갈기 찢겨 경매장에 올라가는 것.”
발리셔스 본인이 교룡왕과 혈표의 시체를 탐낸 것처럼 다른 미궁의 주인들도 몰락한 망자의 왕의 몸을 얻기 위해 높은 대가를 치를 게 분명했다.
“남은 하나는 내 기사가 되는 것.”
김진우의 제안에 발리셔스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지저 남작의 권능 ‘봉신의 맹세’가 발동합니다.] [망자의 왕 발리셔스를 지저 남작 김진우의 세 번째 기사로 임명하려 합니다.] [기사는 가장 충성스럽고 용맹한 남작의 수족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충성스럽던 것은 아닙니다. 봉신의 맹세를 하고 나서야 그들은 ‘진짜 충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그는 메시지 창과 발리셔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나는 어느 쪽이건 손해 볼 것 없으니 편한 대로 하도록.”
발리셔스가 어떤 결정을 할지 기대된다는 얼굴을 해 보인 그의 표정이 정말로 아무래도 다 상관없다는 모습이다.
발리셔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다 입술을 짓씹었다.
“고민하는 건 좋지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독촉하는 게 아니라 네 몸,”
김진우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거든.”
꽉 깨문 입술이 뭉개지고 흘러내려 잇몸이 드러나고, 피부의 거죽이 전부 벗겨져 흉물스러운 모습이 된 발리셔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나의…….”
발리셔스는 빳빳한 목을 조금씩 숙이더니 이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왕이시여!”
발리셔스가 다시 한 번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피를 토하듯 외쳤다.
그간 왕으로 누려온 존귀함과 자존심이 한데 뭉쳐 비틀어지고 어그러진 그의 음성을 들으며 김진우는 진정으로 즐겁게 웃었다.
[망자의 발리셔스가 지저 남작 김진우의 가신(기사)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기사 발리셔스는 주인과 운명을 함께하게 됩니다. 나가의 미궁이 파괴될 경우 발리셔스 역시 소멸될 것입니다.] [발리셔스가 다스리던 망자의 땅이 ‘봉토’가 되었습니다. 발리셔스는 여전히 한 미궁의 지배자이지만 섬겨야 할 주인이 생겼습니다. 망자의 땅을 관장하는 핵에 축적되는 던전 에너지의 20%가 나가의 미궁에 속합니다.] [언제든 두 미궁을 연결하는 포탈을 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탈을 열고 말고는 온전히 남작의 권한입니다.]“나의 왕이시여!”
그리하지 않으면 자신이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발리셔스는 계속해서 왕을 부르짖었다.
왕좌에서 일어난 김진우가 그런 발리셔스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잊은 게 있는데…….”
그의 나직한 음성에 발리셔스가 고개를 들었다.
“난 이 땅을 너에게 맡길 생각이 전혀 없어.”
[망자의 땅 그레이브 야드의 합당한 지배자 발리셔스는 남작의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전투 끝에 고개를 숙인 발리셔스의 음험함을 경계한 그의 주인은 망자의 땅 그레이브 야드에 온전한 지배력을 행사하기를 바랍니다.]차가운 김진우의 눈동자를 본 발리셔스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희망을 잃고 절망했다.
[그레이브 야드의 지배자 발리셔스가 섭정에 동의했습니다.] [앞으로 소환수들이 더욱 자유롭게 두 미궁을 오고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소환수를 공유합니다.]발리셔스가 푹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며 김진우가 벌떡 일어나 다시 왕좌에 앉았다.
“하하하하!”
패자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취한 승자는 왕좌를 빼앗아 그 위에서 조롱하듯 대소했고, 한때는 승자의 모든 것을 취하기를 원하던 패자는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새로운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
망자의 땅에는 블랙 머천트의 깃발이 내걸렸다. 거래를 마치고 떠난 암상인이 미궁을 복구할 인력과 함께 돌아온 것이다.
“기간은 얼마나 걸리지?”
“못해도 한 달은 걸릴 겁니다. 일단 깨진 그릇을 메우고 그 안에 다시 원천을 채워 넣어야 하니 그 과정에서 소요되는 다운 잼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요. 대가로 제시한 미궁의 핵만으로 과연 감당이 될지…….”
암상인의 엄살에 김진우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차피 아나톨리우스가 지원하기로 한 군자금이 있지 않은가. 손해 보는 것도 없으면서 징징대기는.”
지난 만남에서 김진우의 가치를 인정한 아나톨리우스는 군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조했다.
드러내 놓고 지원하기에는 다른 심층 귀족들의 견제가 껄끄러우니 블랙 머천트가 그 다리 역할을 하기로 했다.
아마도 핵의 복구가 아니라 새로운 핵을 만들어내라고 해도 충분한 자금이 블랙 머천트에게 전달됐을 터, 암상인의 엄살은 그야말로 되도 않을 소리에 불과했다.
“끄응. 그래도 이렇게 매번 끌려 다니면 제 입장이 좀 그렇습니다요.”
“그런가? 그래도 그간 도움을 받은 게 있으니 다음에는 가급적이면 그대의 체면을 세워주도록 하지.”
암상인과의 거래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느니만큼 김진우도 그 점을 이해하고 다음 거래에서는 양보를 해주기로 약속했다.
어차피 앞으로 9층의 미궁들을 차례로 격파할 것이니 그중 한 번 정도는 블랙 머천트에게 유리한 거래를 해도 큰 손해는 아니었다.
앞날을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관계를 돈독히 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그간 겪어온 블랙 머천트의 정보력과 힘만 해도 고작 9층의 신흥 강자로 이제 막 떠오른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니까.
“그럼 일간 다시 보도록 하지.”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암상인의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던 김진우는 만약을 대비해 남겨둔 나가들을 일별하고는 그레이브 야드를 나섰다.
“돌아간다!”
김진우의 호령에 나가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귀환 길에 올랐다.
***
발리셔스가 마지막에 소환한 사자의 군대는 김진우의 생각 이상으로 큰 주술이었던 모양이다.
숨을 까딱거리는 모습이 당장에라도 소멸할 것만 같은 발리셔스는 나가 사제의 치유 주문을 내내 달고 살아야 했다.
“저런 폐품을 뭐 하러 주워 오셨나 모르겠네요. 보기에도 좋지 않고 쓸 모도 없을 것 같은데요.”
발리셔스의 위태로운 모습을 본 안젤라의 혹평에 김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지금은 저런 꼴이지만 나름대로 쓸모는 있을 거야.”
당장 망자와 사자를 부리는 사령술만 해도 망자의 왕이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능력이다.
비록 전처럼 사자의 군대를 소환하기에는 상태가 영 좋지 않았지만, 수하의 능력을 일부 공유 받는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그의 상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그는 겁 많은 우서와는 다르게 음험한 존재예요.”
봉신의 맹세조차도 안젤라를 안심시키지는 못한 것일까. 그녀는 거듭 발리셔스의 음험함을 경고했다.
“지금이야 저러고 있지만 힘을 되찾으면 아마 엉뚱한 생각을 품겠죠. 방심했다가는 언제 목덜미를 물어뜯을지 몰라요.”
안젤라의 말에 김진우가 가만히 발리셔스와 곁에 붙어 선 나가 사제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만약 힘을 되찾는다면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김진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고 있다.
***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도미니크가 고개를 숙이며 하는 말에 김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순찰자들이 전멸했어. 마지막 순간 함정에 빠져서… 괜한 손해를 봤다. 안타까운 일이지.”
그나마 릭샤샤가 살아남아 다행이었다.
‘망자의 왕 발리셔스는 교룡왕 아낙스투스와 비견되는 9층의 강자 중 하나였어요. 그런 강자를 상대로 아무 피해가 없다는 건 지나친 욕심이랍니다. 탐식의 우서가 이번에는 꽤 수고해 주었네요.’
그녀의 말마따나 만약 우서가 본대를 끌어내지 않았다면 지금 입은 피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김진우가 이내 안타까운 빛을 없애고 왕좌에 앉았다.
“장거리 순찰자의 전력을 복구하고 미궁의 외곽에 군대를 수용할 공간을 만든다!”
‘군대요?’
나가들을 수용할 곳이라면 이미 둥지가 넘치도록 확장되어 있는지라 도미니크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김진우가 씨익 웃어 보였다.
“전리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