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64)
던전 견문록-64화(64/319)
# 64
던전 견문록
제 65 화
발자크는 김진우의 질문에 부자연스러운 침묵을 고수했다.
“모른 척하려고 해도 그 갑옷이 너무 눈에 익어서 말이야.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닌가? 그도 아니면 나를 바보로 알았나?”
신랄한 질문에도 발자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나톨리우스가 감시라도 하라고 보내던가, 아니면 제대로 일하라고 등이라도 떠밀던가?”
김진우는 철혈의 아나톨리우스와 똑같은 발자크의 갑주를 보는 순간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잠시 발자크가 하는 행동을 지켜본 것은 그 목적을 알 수가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엉뚱한 이가 해주었다.
“발자크는 애초부터 아나톨리우스의 신임을 받지 못했어요. 이런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임기응변이 좋은 것도 아니고요.”
언제 다가왔는지 안젤라가 바짝 붙어서 말해왔다.
“그런 것치고는 하는 행동이 제법 깜찍하지 않은가? 아나톨리우스를 만나지 못했다면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군.”
김진우가 심드렁한 얼굴로 발자크의 행동을 비난했다.
“철혈의 기사단은 말 그대로 기사단이에요. 엄선한 지옥마를 타고 전장을 누비는 전귀들이죠. 그들의 이동은 신풍과도 같고 돌격은 파멸적이랍니다. 그런데 발자크는…….”
안젤라는 동문서답을 했다. 가만히 듣자니 발자크의 입지가 철혈의 기사단 내에서도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했다.
“말을 탈 수 없어요. 기동력이 없는 기사는 철혈의 기사단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발자크는 변장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한 거예요. 그는…….”
발자크에게 성큼 다가간 안젤라가 발자크의 머리통을 쑥 뽑아버렸다.
“듀라한이거든요.”
***
듀라한은 전장에서 목을 잃은 기사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존재였다.
그렇게 부활하며 생전 지니고 있던 힘보다 더욱 막강한 힘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다시는 살아 있는 존재의 등에 탈 수 없게 된 듀라한은 한번 잃은 머리통을 다시 잃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처지를 비관한 듀라한은 자신을 죽인 이를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해괴한 존재로군.”
안젤라에게 정체가 까발려진 발자크는 이제는 대놓고 제 옆구리에 커다란 투구를 끼우고 태연하게 서 있다.
목 위부터 휑하게 비어 있는 이 기묘한 기사를 보며 김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 됐건 발자크는 첩자 같은 게 아니랍니다.”
“아니. 여전히 믿을 수 없다. 아무리 말을 타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무려 영웅급에 달한 존재이다. 그런 존재를 발이 느리다는 이유로 아나톨리우스가 쉽게 내쳤을 리가 없어.”
영웅급 소환수라면 당장 자신의 수하 중에도 고작 둘뿐이다. 말을 타지 못하는 페널티가 있다고 해도 저렇게 쉽게 내칠 만큼 가치가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주인님, 철혈의 기사단은…….”
안젤라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100기 모두가 영웅급 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랍니다.”
이번에는 김진우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 하나를 통째로 영웅급 기사들로 채웠다는 말은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고작 발자크 하나 이탈했다고 해서 아나톨리우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예요. 결벽증이 있는 아나톨리우스 입장에서 보기에 발자크는 철혈의 기사단에 묻은 한 점 얼룩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요.”
첩첩산중이다. 이제 9층에서 자리를 좀 잡았다 했더니 심층 백작의 힘이 그렇게나 대단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막연하게 느껴오던 힘의 격차가 현실이 되자 김진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렇다 해도 그를 어떻게 신용하지? 안젤라가 아나톨리우스를 떠난 이후 그의 입지가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 아나톨리우스라면 필요에 따라 마음에 들지 않은 수하 하나 정도는 품어줄 수도 있을 배포가 있는 존재로 보였어. 내 말이 틀리나?”
아나톨리우스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만큼 발자크에 대한 경계심도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김진우의 말에 안젤라가 발자크의 곁에 서며 그 두툼한 견갑에 손을 얹었다.
“맞아요. 아나톨리우스는 그 정도 배포가 있는 군주죠. 하지만 최소한 그게 발자크는 아니에요. 그건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근거 없는 확신이라고 하기에는 그 태도가 너무도 단호해 김진우가 안젤라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발자크를 죽인 게 아나톨리우스이니까요.”
***
결국 안젤라의 보증으로 발자크는 나가의 요새에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중간에 결투를 한답시고 수선을 피우기는 했지만, 애초에 사령관의 타이틀에 증폭된 능력을 가진 김진우를 일개 영웅급 소환수가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갑옷이 찌그러지도록 두들겨 맞고 패배를 선언해야만 했다.
결투 이후 혹시 몰라 호법룡 한 마리를 불러내 정보가 사실인지를 확인해 본 결과, 실제로 발자크는 살아 있는 존재의 등에 탈 수 없었다.
발자크가 올라타려고 하자 호법룡이 맹렬하게 거부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기수가 아니어서 거부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적대적이고 신경질적이라 김진우도 안젤라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발자크 말고도 철혈의 기사단에서 입지가 애매한 이들이 있나?”
새삼 아나톨리우스와의 힘의 격차를 느낀 김진우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영웅급 소환수는 구하고자 마음먹는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닌 탓이다.
어쩌면 이 기회에 전력을 보강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그의 눈빛에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안젤라의 대답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철혈의 기사단은 군주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랍니다. 설령 그들의 군주가 등을 돌려도 죽는 순간까지 영광을 아나톨리우스에게 돌릴 정도로 광신적인 집단이지요. 발자크는 그저 아나톨리우스가 치른 전쟁의 전리품, 그와 같은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자신을 살해한 존재를 맹렬하게 증오하는 것이 듀라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증오를 누르고 발자크를 부릴 정도로 아나톨리우스의 힘이 거대하다는 건 김진우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11층 심층의 판도를 뒤엎으려는 아나톨리우스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발자크 역시 영원토록 증오하는 이를 섬기며 고통 받았을 테죠.”
언젠가 큰 전쟁을 치러야 할 아나톨리우스도 더 이상 자신을 증오하는 듀라한을 품고 있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발자크가 11층 심층을 떠나 9층까지 올라올 수 있었으리라.
발자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김진우는 도미니크와 안젤라를 불러다 인재를 모을 방법을 강구하라 말했다.
“일단 거듭된 승전으로 주인님의 명성이 멀리 퍼졌으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수많은 강자들이 몸을 의탁해 올 거예요.”
‘하루에도 몇 명씩 미궁의 문을 두들기는 이들이 있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쭉정이에 불과하지만 간혹 가다 제법 쓸 만한 이들도 찾아오기도 해요.’
둘은 이구동성으로 시간이 자연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 말했다.
하지만 김진우는 그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다.
공작도 아닌 백작만 해도 믿기 힘들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 판국에 느긋하게 앉아서 인재들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암상인을 통해 용병을 구해오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미 안젤라를 통해 자신의 뒤를 캐내려던 블랙 머천트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암상인과의 거래를 물질에 한정해 두는 것으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걸 가속할 방법을 찾아봐.”
‘주인님, 지금만 해도 유례가 없는 성장과 확장을 이루고 있으세요.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마세요.’
“심층의 주인들은 짧게는 백 년, 길게는 수백 년 이상 존재해 온 이들이에요. 너무 단시간에 그들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녀들의 말이 전부 옳았다. 김진우 스스로도 지금의 성장만 해도 9층 전체가 놀랄 정도로 빠른 성장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욱더 빠르게 성장하기를 바랐다.
“아니. 그런 핑계 대고 주저앉아 있다가는 평생을 기다려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어.”
다른 미궁의 주인들과는 다르게 그는 인간이다. 백 년이란 시간을 기다려 그들이 이룬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이미 그는 죽고 없을 텐데.
“릭샤샤를 데려와. 떠돌이로 살아가던 그녀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릭샤샤까지 회의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릭샤샤는 그의 기대대로 그간 지저를 떠돌며 들어온 풍문을 낱낱이 고하기 시작했다.
9층 어디에 강자가 있는지부터 시작해 어디 미궁의 누가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까지 생각보다 상세한 내용에 모두가 감탄했다.
“그간 귀가 있음에도 제대로 듣지 못했나이다. 하지만 주인께서 이 미천하고 비루한 육신에 새로운 눈과 귀를 달아주시었으니 이제야 주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게 되었나이다.”
장거리 순찰자들이 전해온 정보를 토대로 나름 정리를 한 모양이다. 그녀의 말에 김진우가 흡족한 얼굴로 공을 치하했다.
“일단 릭샤샤의 정보를 토대로 사자를 보내도록.”
‘어디부터 먼저 시작할까요?’
오너 룸의 중앙에 놓인 지도에 이곳저곳 표시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도미니크가 그중 몇 개를 골라내며 질문하는데 김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진행해. 동, 서, 남, 북 가릴 것 없이 보내. 순찰자 두 명마다 나가들을 딸려 보내도록 해.”
단호한 음성에 안젤라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지저의 존재들이 지상인을 두려워하는지 알겠군요.”
여전히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지도를 살펴보는 김진우를 보며 안젤라가 다시 말했다.
“지저의 어느 누구도 이렇게 정열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할 거예요.”
“인간은 그대들과 달리 그리 시간의 혜택을 받지 못하니까.”
“그래서 그런 걸까요. 제 눈에 주인님은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이는군요.”
어쩐지 먼 곳을 바라보듯 초점마저 사라진 눈빛, 안젤라가 세차게 고개를 털며 말을 얼버무렸다.
“부디 주인님의 불씨가 오래도록 가기를 바라고 또 바랄게요.”
***
릭샤샤를 포함한 장거리 순찰자들이 9층의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도 무려 1주일의 시간이 더 걸려서야 김진우는 그레이브 야드의 핵이 전부 복구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호오.”
이제껏 보아온 미궁의 핵과는 확연하게 다른 빛깔, 마치 검은 연기를 피워내듯 뭉글거리는 그레이브 야드의 핵을 보며 김진우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예상보다 손상의 정도가 심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암상인이 엄살을 떠는데 다운 잼이 얼마나 소요됐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주절주절 말이 많았다. 김진우는 그런 암상인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하고는 핵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망자의 땅 그레이브 야드(5등급)] [한때는 수많은 망자와 사자들의 터전이던 그레이브 야드지만, 발리셔스의 무리한 소환술 덕에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때 소실된 시설과 소환수들은 핵이 복구된 지금도 여전히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미궁을 재건하기 위해서 많은 자금이 소요될 것입니다.] [섭정의 권리로 시설물의 건설과 소환수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아무래도 섭정이던 탓인지 나가의 미궁처럼 모든 것이 세세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메시지만 해도 앞으로의 방향을 잡기에는 충분했다.
“그보다 이제 약속하신 대금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어 보인 김진우가 암상인의 말에 품을 뒤적거렸다.
“헤헤, 감사합니다.”
미궁의 핵이 담긴 혈표의 심장을 보며 암상인이 허리를 굽실댔다.
“수고했다.”
“만족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요.”
암상인이 짧은 팔을 내밀어 혈표의 심장을 받으려 하는데, 김진우가 슬쩍 손을 뒤로 당겼다. 암상인이 다시 손을 뻗어 혈표의 심장을 쥐려다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김진우는 어쩐 일인지 혈표의 심장을 꽉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