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65)
던전 견문록-65화(65/319)
# 65
던전 견문록
제 66 화
#26. 10층의 귀족들
짧은 팔과 다리를 휘적거리던 암상인이 이내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혹시 또 뭐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암상인의 반응에 김진우가 씨익 웃어 보이더니 이내 혈표의 심장을 툭 떨어뜨렸다.
“어이쿠! 이 귀한 걸!”
혹시라도 귀물이 깨어질까 깜짝 놀란 암상인이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며 혈표의 심장을 받아 들었다. 그런 암상인에게 그가 말했다.
“이제 와서 거래 조건을 바꿀 생각은 없어. 다만.”
“다만?”
암상인은 그의 마음이 변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먼저 혈표의 심장부터 품에 넣었다.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이번에는 또 어떤 요구를 할지 암상인의 얼굴이 벌써부터 울상이 되었다.
“들어주지 않아도 돼. 이건 말 그대로 부탁이니까.”
말이야 부탁이라지만 암상인이 그의 부탁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끄응, 말씀하십시오.”
“그럼 그렇게 말하니 부담 없이 이야기하도록 하지.”
처음의 어리숙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김진우가 이제는 능글맞은 얼굴로 자신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게 얄미운지 암상인의 눈빛이 복잡했다.
“그대가 담당하는 이들 중에 혹시 심층의 귀족이 있나?”
“거래하는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시는 건지…….”
이제는 대체 무슨 말을 할지 감도 오지 않는지 암상인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만 데굴데굴 굴려댔다.
“그럼 그대가 그들의 미궁을 방문하는 다음 일정이 언제지?”
“대체 그건 왜 궁금하십니까?”
“왜긴 왜야.”
김진우가 암상인을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나도 한번 따라가 보려는 거지.”
***
암상인은 지금 확답을 줄 수 없다며 돌아가 버렸다. 아마도 스스로 결정하기에는 사안이 큰 탓이라 상관에게 물어보려는 모양이다.
어쩌면 거절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김진우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아나톨리우스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미궁에 방문한 적이 있지 않은가. 나중에 가서 거절한다고 해도 그날의 일을 트집 잡아 생떼라도 부릴 작정이다.
“후우.”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운 잼 몇 개를 망자의 제단에 던져 넣었다.
생긴 건 달라도 다운 잼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는 그레이브 야드 역시 마찬가지라 이내 다운 잼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일꾼 소환.”
[유부의 노역자를 소환하시겠습니까? 하나를 소환하는 데 1/2 던전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몇이나 소환하시겠습니까?]“삼십.”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단에서 검은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르더니 이내 악령과도 같은 생김새를 한 유부의 노역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묘지부터 건설해. 던전 에너지가 떨어질 때까지 확장하고 업그레이드한다.”
나가의 둥지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묘지의 건설과 지속적인 확장을 명령한 김진우가 이내 포탈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
암상인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어떻게 됐지?”
인사도 생략한 김진우의 질문에 암상인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일단 가능은 할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지라 몇 가지 약조해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용병인 척하고 잘 숨어 있도록 하지. 아나톨리우스처럼 어설프게 걸리는 일은 없을 거야. 이래 봬도 기척을 숨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거든.”
“그거 말고도 몇 가지 있습니다.”
암상인이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설명했다.
첫째, 상행에 절대 관여치 말 것.
둘째, 귀족의 미궁에 들어서면 절대 입을 열지 말 것.
셋째, 상행 중에 보고 들은 것은 절대로 다른 이에게 발설하지 말 것.
넷째, 돌발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것.
다섯째, 상행 중에 일어난 사고에 블랙 머천트에게 일절 책임을 묻지 않을 것.
대략적인 조건이라는 게 전부 예상한 것들이라 김진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정이 잡히면 다시 기별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한 암상인이 총총거리며 미궁 밖으로 사라졌다.
“흠,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크게 위험한 일이야 없겠지. 존재감을 숨기는 건 일도 아니고.”
불쑥 모습을 드러낸 안젤라의 말에 김진우가 시큰둥하게 대답하더니 이내 정색했다.
“백작은 몰라도 다른 귀족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지.”
당장 9층을 정리하고 나면 10층이 목표인지라 어느 정도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이들을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층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은 자신과 릭샤샤 정도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자신의 눈으로 직접 다른 귀족들의 힘을 보고 오는 것이 조금 더 마음이 놓였다.
“그나저나 발자크는 뭐 하고 있지?”
“호법룡을 잡고 씨름하고 있어요. 아직 미련이 남아 있나 봐요.”
철혈의 기사단 기사들이 타는 지옥마 같은 경우에는 발자크를 보고 주저앉아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호법룡은 제법 굳세게 버티는 맛이 있어 아무래도 발자크가 도전 정신이 살아난 모양이다.
“애꿎은 호법룡만 고생이군. 어차피 발리셔스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을.”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나가 용기사들과 얼굴도 익힐 겸 하는 것 같으니.”
안젤라의 말에 김진우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리셔스를 찾았다.
“일은 잘돼가?”
사방 10여 미터 정도 되는 공간에 멍하니 앉아 있던 발리셔스는 그를 보고 느릿느릿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척 보기에도 억지로 하는 인사인지라 피식 웃은 그는 이내 일의 진척도를 물었다.
발리셔스는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공터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누더기 하나를 가리켰다.
“흠……,”
딱 보기에도 흉물스럽고 마구 기우고 때운 몸뚱이가 원형을 알 수가 없어 김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재료가 부족해 거기서 멈췄습니다.”
아무래도 재료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레이브 야드에 다녀오도록 해주십시오. 한 번만 다녀오면 원하시는 건 뭐든 만들어드리겠나이다.”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발리셔스의 청에도 김진우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하다못해 제가 만들던 키메라라도 돌려주십시오. 그놈을 분해해서라도 임무를 완수해 보이겠습니다.”
“글쎄. 그걸 분해할지 이걸 분해할지 나는 잘 모르겠는걸.”
발리셔스가 나가의 미궁에 터를 잡은 지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재료를 빼돌리다 걸린 것만 수차례다.
그렇게 빼돌린 재료로 무얼 하려고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빤한 일, 김진우가 차갑게 경고했다.
“허튼 생각 했다간 그레이브 야드의 핵부터 파괴되겠지.”
미궁의 핵이 파괴된다는 건 주인 역시 무사할 수 없다는 소리다. 어찌 보면 발리셔스를 상대로 그레이브 야드를 인질로 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발리셔스의 창백한 낯빛이 더욱더 창백해지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최대한 빨리 만들어줘. 재료의 수급은 그다음에 생각해 보도록 하지.”
마치 악당이라도 된 듯한 상황이라 기분이 묘했지만 김진우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교룡왕과 혈표의 사체로 키메라를 만들고 호시탐탐 때를 노리던 발리셔스다. 턱 끝에 칼을 들이대려던 상대를 편하게 대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 그리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니 사제를 보내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는 김진우의 모습이 마치 몸이 튼튼해야 부려먹기 편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 보일 지경이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체념한 발리셔스의 말에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호야.”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호야를 부르니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인지 호야가 나타나 냉큼 애교를 부려댔다.
“더욱더 감시 철저히 해. 만약 수상한 행동을 한다 싶으면 나한테 바로 보고하고.”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며 말하니 호야가 갸르릉거리다 이내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발자크의 집념은 대단했다. 오죽하면 그 억세고 강인한 호법룡이 거품을 물 정도였다.
하지만 성질이 집요한 건 호법룡도 매한가지인지라 힘이 다 빠진 호법룡은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끝까지 발자크를 거부했다.
“멀쩡한 짐승 그만 괴롭히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 건 어떻겠나?”
“오셨습니까.”
씩씩거리며 호법룡을 노려보던 발자크가 김진우를 발견하고는 몸을 숙였다.
그런데 그 몸을 숙인다는 것이 옆구리에 머리를 낀 채로 허리만 숙이는 기괴한 모양새라 영 보기 불편했다.
“그래도 허약한 지옥마보다는 근성이 있어 보였는데 역시 안 되나 봅니다.”
발자크가 푸념을 섞어 말하니 지켜보고 있던 묘인족 여인이 냉큼 다가와 호법룡을 이끌고 사라졌다. 발자크가 다시 호법룡을 괴롭힐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눈치다.
“그대에게 적당한 탈것을 만들고 있으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게. 괜히 다른 이들 일거리만 늘리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이제는 정말 포기한 모양인지 발자크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보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물어보십시오.”
다소 투박한 대답에 김진우가 망설이지 않고 그간 미뤄두둔 질문을 했다.
“9층까지 올라오는 길에 본 게 있다면 전부 말해주겠나?”
“이를테면…….”
“11층에서 올라왔으니 당연히 10층을 통과했겠지.”
뒤늦게 김진우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를 깨달은 발자크가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10층은 한마디로 쓰레기장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발자크가 조롱하듯 말했다.
“타고난 태생이 고귀하니 투쟁하는 법을 모르고, 주변에 있는 것들이 전부 똑같으니 온 사방에 나태함이 만연합니다.”
“자세히 설명해 봐.”
김진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타성에 젖은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제 미궁조차 돌보지를 않습니다. 전쟁을 대비한 방어 시설 대신 화려한 장식품이 온 미궁의 벽을 감싸고 있고 크리쳐들은 그 이빨과 손톱을 쓸 기회조차 없어 제 스스로 손톱과 이빨을 깎아내고 있었습니다.”
10층에 단단히 질렸는지 발자크의 말투는 신랄했다.
“전투에 능한 전사들보다 한낱 이야기꾼들이 더욱 우대받는 10층은 지저의 수치입니다. 그들은 패전의 역사조차 잊고 지상인들의 물건에 빠져 제 본분을 잊었습니다. 제게 일백의 나가를 주신다면 당장에라도 그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봐.”
“일백, 아니, 칠십의 나가만 있어도…….”
“아니, 그전에.”
김진우의 반응에 발자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단순 무식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그 잠깐 사이에 발자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죄다 까먹은 눈치였다.
“10층의 귀족들이 뭐에 빠졌다고?”
그런 발자크를 보며 김진우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