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67)
던전 견문록-67화(67/319)
# 67
던전 견문록
제 68 화
#27. 삭풍의 보레아스
호레이스가 보낸 이들은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 속에 몸을 가린 채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그들의 모습은 흡사 연기와도 같았다.
“남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 이거 남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희끗한 형체에 비해 또렷한 음성에는 제법 힘이 있었다.
둘인지 셋인지, 어쩌면 열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 한데 뭉친 검은 연기들이 이내 몸을 돌리고 앞장섰다.
저벅저벅.
김진우는 검은 연기의 안내를 따라 미궁 깊숙이 들어선 행렬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간 거래로 신뢰를 쌓아왔다고 해도 블랙 머천트는 한낱 외부인에 불과할 터, 아무런 통과 절차도 없이 미궁의 심처까지 허락한 호레이스 남작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온갖 조각과 장식 따위로 화려하게 치장된 미궁의 통로는 웅장한 맛은 있었지만 널찍한 통로가 방어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으레 9층의 미궁들이 미궁의 초입에 온갖 함정으로 도배를 해놓는 것에 비해 흔한 함정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음…….”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김진우는 슬쩍 자신을 돌아보며 눈짓으로 주의를 주는 암상인을 보고는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설마설마했지만 검은 연기들은 기어이 미궁의 핵이 위치한 오너 룸까지 암상인과 김진우를 안내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오너 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쩌렁쩌렁한 음성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오, 왔는가!”
마치 다 타고 난 화재 현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그러할까. 호레이스 남작은 마치 화마가 쓸고 간 뒤 남은 그을음처럼 음산하고 괴이쩍은 모습이었다.
오너 룸의 대부분을 감싼 검은 연기, 흩어지고 다시 모이기를 반복하는 그 불길한 기운 자체가 호레이스 남작이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남작님.”
“무탈하다마다! 누가 이 혼돈의 호레이스를 건드리겠는가!”
암상인의 말을 받아치는 호레이스 남작의 말이 광오했다.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허술한 미궁의 경비에 저절로 비웃음이 나왔지만 김진우는 가만히 암상인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암상인은 넉살 좋게 호레이스 남작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여기 전에 부탁하신 물품들을 가져왔습니다.”
“오오!”
김진우가 무슨 생각을 하건 간에 거래는 일사천리였다. 일꾼 중 몇이 행렬의 중간에 있는 커다란 나무 궤짝 하나를 꺼내 왕좌의 바로 아래 내려놓았다.
“흐음.”
호레이스 남작의 몸을 이룬 연기의 끝자락이 슬쩍 흔들린다 싶더니 나무 궤짝의 잠금 장치가 쩍 갈라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구해왔군. 과연 블랙 머천트야. 좋아. 아주 좋아.”
호레이스 남작은 궤짝 안에서 드러난 물건을 보며 연신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런데 그 물건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지저를 살아가는 데 하등 상관없는 사치품 일색이었다.
금으로 만든 조각품과 세공된 다운 잼이 박힌 장식품들까지 화려함에 비해 그 효용이 일절 쓸데없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호레이스 남작은 연기로 이루어진 몸을 마구 흔들어대며 호들갑을 떠는데 그 기색이 심히 만족한 눈치다.
연신 감탄을 토해내는 호레이스의 모습을 보며 김진우는 차라리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제 미궁의 앞마당에서는 도적들이 출몰하고 있는데 이런 사치품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어쩌면 발자크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번 생각이 들자 김진우는 수많은 것들이 뒤늦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미궁의 핵(8등급).]화려하게 치장된 왕좌와 온갖 귀물로 둘러싸여 금으로 도금까지 된 미궁의 핵이 고작 8등급에 불과했다.
물론 이제 겨우 6등급에 올라선 자신의 미궁을 생각하면 분명 높은 등급이긴 하지만, 심층에서 오랜 시간 귀족으로 군림해 온 존재의 미궁치고는 지나치게 등급이 낮았다.
“언제나 저희 블랙 머천트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조심히 가게.”
이렇다 저렇다 조율할 것도 없이 거래는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암상인과 용병들이 미궁을 나서는데 이번에는 처음과 달리 안내를 겸한 감시조차 붙지 않았다.
암상인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능숙하게 미궁 출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미로도 없고 함정도 없다. 그나마 게이트를 지키는 검은 연기 몇 가닥이 보이지만 그들마저도 왠지 모르게 무기력해 보였다.
“다른 귀족의 영지를 처음 본 감상이 어떠셨습니까?”
미궁의 경계를 빠져나오자마자 암상인이 물었다.
“이곳이 정말 지저의 심층이 맞나 싶을 지경이군.”
“조금 풀어진 분위기이기는 합죠.”
조금이라는 말에 김진우는 코웃음이 나왔다. 지저 초입의 버려진 미궁조차도 이 정도로 무방비하지는 않았다.
지저의 모든 미궁이 이런 곳이었다면 인류는 지저와 조약을 맺을 게 아니라 완전히 정복해 버렸을 것이다. 그 정도로 호레이스의 미궁은 허술했다.
“이곳은 심층에서도 제법 중심부에 있는 곳이라서 이 정도이고 9층과 10층을 잇는 통로 부근에 위치한 미궁들은 조금 더 삼엄한 편입니다.”
“조금으로는 안 될 것 같은데.”
김진우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답하니 암상인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호레이스 남작님뿐 아니라 대부분의 10층 미궁의 상황은 비슷비슷합니다.”
발자크가 왜 10층의 귀족들을 본분도 잊은 쓰레기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얼굴 가득 떠오른 경멸의 빛에 암상인이 호레이스를 대신해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지상인들의 습격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 서로간의 반목이 눈에 띄는 것도 아닙니다. 예전에야 그 어떤 층보다 전쟁이 빈번하고 치열하던 때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워낙에 쟁쟁한 11층 백작 분들의 위세 탓에 승작의 길이 막힌 10층 귀족 분들께서 의욕을 잃으신 지는 꽤 오래됐습니다.”
나름대로 이유라면 이유였다. 하지만 그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김진우에게는 그다지 와 닿을 정도로 절실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뒤로 두 개의 영지를 더 다녀봤지만, 호레이스의 미궁과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미지옥의 발라투스, 암연의 자낙스.
거창한 이름에 비해 두 미궁은 화려하기만 할 뿐 내실이 전혀 없었다.
개미지옥 발라투스의 미궁은 개미지옥이란 별칭이 무색할 정도로 평평하고 특색 없는, 그저 경박한 화려함으로 치장된 미궁일 뿐이었다.
암연의 자낙스가 다스리는 미궁 역시 암연이란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온갖 화려한 보석과 장식들로 번쩍거리는 괴이한 곳이었다.
두 미궁 모두 누가 더 화려하게 치장하나 경쟁이라도 하듯 온갖 장식품으로 도배가 되어 있고, 입구를 지키는 크리쳐들은 하나같이 의욕이 없어 보였다.
“이래서야 부모님이 쌓아둔 재산을 자식이 죄다 깎아먹는 꼴이군.”
10층의 귀족 중에는 제 미궁의 시설과 소환수들마저 팔아가며 기이한 경쟁에 동참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니 실로 알면 알수록 10층의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왜 아나톨리우스가 바로 위층인 10층이 아닌 9층에서 조력자를 찾은 것인지 이해가 갔다.
만약 그가 본 모습이 10층의 전반적인 귀족들의 모습이라면 아나톨리우스가 기대하는 일을 해줄 만한 이는 없다고 봐야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삭풍의 보레아스님의 미궁을 가보겠습니다.”
“그러시든지.”
이미 발자크에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와서 본 10층의 상황이 워낙에 충격적이라 김진우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며 암상인이 정색을 했다.
“아까 제가 말한 경계가 삼엄한 몇 안 되는 미궁 중 하나가 보레아스님의 미궁입니다.”
“이번에는 제발 제대로 된 미궁이었으면 좋겠군.”
그래도 같은 하급 귀족의 미궁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된 곳을 봐야 마음이 놓일 것만 같았다.
비교하기도 뭐한 아나톨리우스의 미궁을 논외로 치면 아직 제대로 귀족의 전력을 본 적이 없는 탓이다.
“삭풍의 보레아스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십니다. 이제껏 보아온 온건한 귀족 분들을 생각하면 낭패를 당하실 겁니다.”
“그 정도인가?”
“귀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도적들조차도 보레아스님의 미궁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어쩐지 자신만만하면서도 꺼림칙한 얼굴로 지껄여 대는 암상인을 보면서도 김진우는 시큰둥했다. 워낙에 호레이스와 다른 귀족들의 미궁이 충격적인 탓에 더 이상 기대 자체를 안 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암상인의 말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기생수의 감각에 무언가가 잡혔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투 중이던 일부 병력이 행렬을 발견하고 접근 중입니다.]기생수의 능력이 아니더라도 김진우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코끝을 확 파고드는 피 냄새에 절로 표정이 굳었다.
“정지!”
암상인 역시 비릿한 냄새를 맡은 것인지 일행을 정지시키고 만약의 일을 대비했다.
호위 용병들이 대열을 갖추고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드는데 저 멀리 있던 피 내음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뭐야? 그대였나?”
그야말로 바람처럼 나타난 한 떼의 무리. 그중 선두에 선 사내의 기세가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가만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장발을 거칠게 쓸어 넘긴 사내는 키가 무척 큰 호리호리한 모습이었다.
뒤편에 선 근육질 거한들에 비하면 여린 몸매지만 그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그것이 온몸에 묻어 있는 수많은 체액과 피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는 흔적만 남아 있는 상처가 온몸을 도배한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삭풍의 보레아스님을 뵙습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짜리몽땅한 몸을 냉큼 접으며 인사하는 암상인의 모습이 정중함을 넘어 차라리 비굴할 지경이다.
“예정보다 일찍 온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미리 기별을 한다는 게 아무래도 도당들이 두려워 길을 서두르다 보니 시기가 맞지 않은 모양입니다.”
“같지도 않은 소리. 나약해 빠진 도적놈들이 무서웠으면 블랙 머천트는 장사를 접었어야지. 안 그래?”
양손에 쥔 곡도를 휘둘러 피를 털어낸 사내 보레아스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일개 상인에게는 이성 없는 크리쳐 하나조차도 큰 재앙입니다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데리고 온 용병들만 해도 한심한 10층 귀족 놈들의 미궁 하나 정도는 찜 쪄 먹고도 남을 전력이건만 그대는 나를 능멸하려는 건가?”
“아닙니다요! 제가 어찌 감히!”
암상인의 모습이 평소 자신에게 보이던 엄살과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보레아스가 내뿜는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비교적 대열의 후위에 있는 그조차도 피부가 저려올 정도로 농밀한 살기. 보레아스의 위협은 그저 말뿐인 위협이 아니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몸을 떨며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암상인을 보며 김진우는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앞에서 혀를 잘못 놀린 전임자가 어떻게 됐는지 그대도 기억할 터, 앞으로 조심할 거라 믿고 더는 말하지 않도록 하지.”
태생부터가 오만하고 광폭한 존재, 10층에서 처음으로 만난 진짜 귀족은 김진우의 상상 이상으로 난폭하고 사나웠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난 번거롭게 또다시 담당자가 바뀌는 걸 원하지 않으니 우리 부디 오래 보도록 하자고.”
사나운 기세를 거두어들인 보레아스가 이번에는 껄렁껄렁하게 웃으며 건들거렸다. 그 모습조차도 위협적으로 보이는 건 첫인상이 워낙에 강렬했던 탓이리라.
“그런데 말이야.”
턱을 치켜들고 지껄여 대던 보레아스가 순간적으로 암상인의 뒤편을 가리키며 고개를 비틀었다.
“저놈은 뭔데 저리 고개가 빳빳하지?”
보레아스의 살벌한 붉은 눈동자가 김진우를 향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