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70)
던전 견문록-70화(70/319)
# 70
던전 견문록
제 71 화
#30. 전장의 까마귀
“음, 이건?”
암상인이 건넨 물건을 확인한 김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재질을 알 수 없는 가죽에 제법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 지도가 금세 눈앞에 허상처럼 떠올랐다.
[9층 전역의 지도를 얻었습니다. 길잡이 능력에 의해 기존의 지도가 갱신되었습니다.] [더 이상 9층에 미지의 영역은 없습니다.] [단 지도 상에 미 표기된 숨겨진 미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지도가 갱신되었다는 알람과 함께 까맣게 가려져 있던 지도의 영역이 환하게 밝혀졌다.
암상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눈동자로 지도를 훑어본 김진우가 내심 인상을 찌푸렸다.
11층에 앉아서도 9층의 상황을 훤히 내려다보는 아나톨리우스의 정보력에 새삼 경계심이 든 탓이다.
그만큼 아나톨리우스가 전해준 지도는 세밀하고 정밀했다.
“물건과 함께 말씀도 있으셨습죠.”
그가 그렇게 놀라고 있거나 말거나 암상인은 계속해서 지껄여 댔다.
“기간을 미리 정해둔 것은 아니나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안에 결과를 보여주었으면 한다고 하셨습니다.”
뒤늦게 허공에 떠오른 지도를 흩어버린 김진우가 암상인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안하무인이로군. 이제는 나를 수하 다루듯 하려는 건가.”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나톨리우스님은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부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오만한 아나톨리우스가 잘도 부탁이란 말을 썼겠군.”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을 보며 암상인이 황급히 다음 말을 주워섬겼다.
“정말입니다요. 그 증거로 아나톨리우스님은 남작님께서 반년 내로 성과를 낼 경우 추가적인 지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와의 밀약이 끝난 뒤로 한 개의 미궁을 더 복속시켰다. 이 이상 성의를 보이라는 건 욕심이 아닌가. 설마 그 반년 동안 내가 9층 전체를 발아래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실제로는 세 개나 되는 봉토를 지닌 김진우였지만 짐짓 엄살을 피웠다. 그도 그럴 것이, 밝혀지지 않은 봉토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는 발리셔스와의 전투에서 입증되었다.
굳이 여기서 암상인에게 자신의 전력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10층으로 향하는 진격로를 확보하는 정도의 성의만 보여도 만족한다고 하셨습니다.”
“흐음.”
김진우는 암상인의 말에 생각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사실은 9층 전체를 복속시킬 계획을 진즉부터 세워둔 그였지만, 가급적이면 많은 것을 얻어내고 생색을 낼 생각이다.
“대가는?”
마치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도 되는 듯 그가 넌지시 이야기하니 암상인이 옳다구나 하고 달려들어 신나게 보상에 대해 떠들어댔다.
“아직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영웅급 용병 열다섯 기와 최상급 다운 잼 열 개를 약조하셨고, 거기에 더해 만약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따로 말하라 하셨습죠.”
생각보다 큰 보상에 이번만큼은 김진우도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휴, 꽤나 화끈하게 썼군.”
“그리고 선수금 조로 이것도 미리 맡기셨습니다.”
그 작은 품에 뭐가 그리 많이 들어가는지 암상인은 이번에도 품을 뒤져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보석을 꺼냈다.
“그게 뭐지?”
“고대 전쟁 영웅의 소환석입니다.”
***
암상인이 돌아가고 난 뒤 김진우는 가만히 손에 쥔 붉은색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암적색의 빛을 발하는 보석은 불규칙적인 각을 지닌 꽤나 기이한 물건이었다.
빛을 받을 때마다 안쪽에서 어른거리는 검은 얼룩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 안에는 강력한 영웅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강력한 힘만큼이나 콧대가 세니 어쩌면 소환된 후에 제멋대로 행동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최악의 경우 남작님이 거꾸로 소환수에게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걸 잘도 전해줬군.’
‘일단 굴복시키기만 하면 큰 힘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아나톨리우스님은 믿는다고 하셨습니다.’
암상인의 말을 떠올린 김진우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소환석을 전해준 아나톨리우스의 심중을 헤아린 탓이다.
어쩌면 이 또한 아나톨리우스의 시험이리라.
“주인님, 그건…….”
근래 들어 윤희의 곁에 붙어 있던 안젤라가 웬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나톨리우스가 보낸 시험지지.”
안젤라는 소환석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꺼림칙한 얼굴로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물었다. 김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정작 소환석을 전해준 암상인도 소환석이 어떤 영웅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대답을 들은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럼 사용하지 마세요. 차라리 던전 에너지로 환산해서 사용하는 게 나을 거예요.”
전에 없이 그녀의 심각한 태도에 김진우가 눈짓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쓸 만한 소환석은 이미 전부 다 풀렸어요. 그리고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소환석은 전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들이에요. 소환자를 살해한 전적이 있다거나 성격이 괴팍하다거나, 그도 아니면 악연이 중첩되어 감당이 힘들거나.”
그렇게 말한 그녀가 다시 한 번 간곡히 소환석의 사용에 대해 재고를 요청했다.
“결국은 처치 곤란의 폐품을 맡기고 생색을 낸 거였군.”
김진우가 그렇게 말하는데 어쩐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주인님!”
“폐품이라도 재활용하면 나름대로 쓸모가 있는 법이지. 때로는 버린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날도 오는 거고. 안 그래?”
어쩐지 찬물이 뚝뚝 떨어지는 음성이 섬뜩하기만 해 안젤라가 저도 입을 다물었다.
“병력을 모아라!”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김진우가 씨익 웃었다.
“환영회다.”
***
너른 광장, 때 아닌 회오리바람과 섬광이 마치 폭풍처럼 사방을 할퀴어댔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빛이 번쩍거리더니 이내 검은 그림자 하나를 토해놓고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소환석을 통해 고대의 영웅이 소환되었습니다.] [지저가 오직 하나의 층에 불과할 당시 가장 강대하던 열 군주 중 외눈박이군주를 위해 봉사하던 전장의 까마귀 모리건이 깨어났습니다.]메시지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까마귀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새빨간 부리를 이리저리 털었다.
‘그대가 나의 소환자인가?’
머릿속에 울려대는 음성이 전장에 울려 퍼지는 비명처럼 날카롭고 높아 섬뜩했다.
‘그대는 너무나 작고 약해 보이는구나.’
[고대의 영웅 모리건이 자격을 시험합니다.] [모리건을 온전히 제압해야만 그 강대한 힘을 부릴 수 있습니다. 만약 제압에 실패한다면 그녀는 절대로 온순히 소환석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까마귀가 수 미터는 될 법한 날개를 활짝 펼쳤다. 어느새 빳빳하게 일어난 깃털이 마치 날카로운 단검과도 같았다.
‘그대의 자격을 증명하라.’
그 찢어지는 음성에 김진우가 냉소를 지어 보였다.
“자격?”
그가 오른쪽 손을 들어 올리고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자격을 시험하는 건 그대가 아니지.”
그의 손이 툭 내려가는 순간 뒤편에서 퀀투스와 오르테아가, 그리고 발자크가 튀어나왔다.
까마귀는 갑작스레 난입한 그들을 보며 당황한 기색이다.
‘신성한 시험을 욕보이지 말라!’
“신성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까마귀의 호통에 코웃음을 친 김진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압하도록.”
“왕의 뜻대로!”
발자크가 사령마를 타고 뛰쳐나가고 뒤를 이어 오르테아가와 퀀투스가 까마귀를 향해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사령관의 고유 능력 ‘전장의 지배’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아군의 집단 전투 능력이 상승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작은 혼잣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따르려 할 것입니다.] [아군들의 진형이 한층 더 단단해지고 탄력적으로 변모합니다.] [전장의 지배 효과로 아군의 전투 능력이 증폭되었습니다.] [미궁 내에서의 전투입니다. 핵의 영역이 닿는 곳에 위치한 모든 아군의 전투력이 증폭되었습니다.] [나가 주술사가 전장에 나서는 아군에게 가호를 내렸습니다. 신체 능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세 가지 증폭 효과의 중첩으로 아군의 능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습니다.]말이 끝나는 순간 이미 발자크의 무식할 정도로 거대한 도끼가 까마귀를 향해 짓쳐들고 있다.
“그대야말로 가치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차갑게 웃어 보인 김진우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
과연 안젤라가 우려를 표한 대로 모리건은 강력했다. 무려 셋이나 되는 영웅급 소환수를 상대로도 모리건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 거대한 날개를 한 번 떨칠 때마다 단검과도 같은 깃털이 수십 개씩 튀어나와 온 사방을 휘저어댔다.
그럴 때면 평소 맷집에 자신있어하던 오르테아가마저도 분분히 물러날 정도로 기세가 사나웠다.
“애먹는군.”
무려 세 가지 증폭 효과로 능력이 말 그대로 뻥튀기된 수하들이 고전하는 모습을 보며 김진우는 감탄도 신음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대는 전사라고 불릴 자격도 없노라!’
“언제부터 내가 전사였다고.”
모리건의 호통에 한쪽 귀를 후벼 파는 시늉을 해 보인 그가 곁에 있던 안젤라에게 물었다.
“근데 저 정도라면 아나톨리우스가 감당 못할 정도의 애물단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요. 아나톨리우스 본인의 힘은 물론이거니와 철혈의 기사단의 상위 기사 몇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도 의문이네요.”
“다른 하자가 있는 건가?”
일신의 능력 자체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지저 백작이나 되어서 곤란을 겪을 정도의 힘은 아닌지라 김진우와 안젤라가 머리를 싸맸다.
“크아아악!”
그 순간에도 퀀투스를 비롯한 이들과 까마귀의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주인님, 혹시 저 까마귀의 정체를 알고 계신가요?”
“외눈박이군주를 위해 봉사한 전장의 까마귀 모리건이라던데.”
그 말에 안젤라가 무언가 잡힐 듯 말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도미니크가 불쑥 끼어들었다.
‘맙소사! 주인님!’
완전히 질려 버린 그녀의 음성에 김진우가 고개를 돌리니 창백한 낯빛을 한 도미니크가 있다.
‘당장 그녀를 돌려보내야 해요!’
“왜?”
‘아나톨리우스가 저 까마귀를 주인님께 넘긴 건 본신의 능력에 하자가 있어서가 아니에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반복하는 도미니크를 향해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뒤늦게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황급히 설명했다.
‘모리건이라면 그 자체로 재앙과 다름없는 존재, 모리건은 이제껏 수많은 귀족을 살해해 온 화근 덩어리예요! 모리건에게 원한이 있는 이들 중에는 11층 심층의 백작 절망의 파르테논 역시 포함돼요!’
뒤늦게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김진우가 이를 갈아붙였다.
“아나톨리우스 이 새끼, 같잖은 수를 썼군.”
김진우의 눈앞에 저 불길한 까마귀를 노리고 달려들 수많은 이들의 원한에 찬 얼굴이 선하게 그려졌다.
아마도 아나톨리우스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저 오만한 까마귀의 소환석을 보내왔을지도 모른다.
간악한 백작의 계략대로라면 모리건이 짊어진 인과의 사슬에 얽매이는 것은 자신이 될 터, 그 뒤로는 싫든 좋든 간에 강제적으로 일면식도 없는 심층의 귀족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직 상대하기 버거울 11층의 백작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서둘러 돌려보내지 않으면 발 없는 말이 그들의 귀에 먼저 닿을…….’
도미니크의 말이 채 끝나기고 전에 갑작스레 모리건이 울부짖었다.
까아아아악!
심령을 뒤흔드는 그 끔찍한 소음에 도미니크가 풀썩 바닥에 주저앉고, 대기하고 있던 나가들이 왈칵 피를 토했다.
한창 전투 중이던 발자크와 오르테아가, 퀀투스도 충격을 받은 얼굴로 일제히 물러서는데 까마귀의 거대한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