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71)
던전 견문록-71화(71/319)
# 71
던전 견문록
제 72 화
“감히!”
변화를 마친 모리건은 새까만 어둠을 발라놓은 듯 흑갑(黑甲)을 빈틈없이 두른 여전사의 모습이다.
날카로운 부리가 툭 튀어나온 투구 아래서 새빨간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흘리고 있다.
“신성한 계약을 욕보이다니!”
노호성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게다가 변한 것은 외양뿐이 아니었다.
갑주 뒤로 펼쳐진 검은 기운이 마치 까마귀의 날개처럼 펼쳐져 넘실거리는데 그 기세가 지독스러울 정도로 불길하고 음험했다.
죽음을 형상화하면 저런 모습일까 그녀는 마치 사신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끔찍한 살기는 김진우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냥 타일러서 돌려보내기에는 글러먹었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분석해 성향을 파악해 낸 아나톨리우스의 한 수에 완벽하게 당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면 싫든 좋든 그는 아나톨리우스의 시험을 피할 수가 없다.
“망할 아나톨리우스 같으니. 이번에는 이쪽에서 제대로 한 방 먹었어.”
어쩌면 어딘가에서 축배를 들고 있을지도 모를 아나톨리우스를 떠올린 그는 이를 갈아붙였다.
“내 일찍이 그대처럼 무도한 전사를 본 적이 없노라!”
“어쩔 수 없지. 난 전사가 아니니까.”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모리건의 태도가 거슬리지 않을 리가 없다.
짜증 가득한 음성에 모리건의 눈에서 새빨간 광망이 더욱 강렬하게 터져 나왔다.
“그대가 전사가 아니라면 시험에 들 가치도 없느니!”
“그래서 그냥 돌아가게?”
끝까지 이죽거리며 건들거리는 김진우였지만, 그 눈빛과 자세만큼은 이미 임전 태세였다.
방금 전의 질문이 마냥 조롱이 아니었던 것은 그만큼 그녀의 기운이 강대한 탓이었다.
“오늘만큼은 내 친히 죽음의 전령 노릇을 하리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퍼드득 하고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풀거리며 마치 깃털처럼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검은 기운의 잔재에 김진우가 인상을 굳혔다.
화악!
눈앞에서 밤이 덮쳐오는 듯한 환각,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섬광이 떨어져 내렸다. 섬광이 닿은 땅이 그대로 터져 나가고, 예의 그 파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또다시 눈앞에 모리건의 붉은 눈동자가 따라붙었다. 실로 신출귀몰한 움직임, 실체도 없이 검은 깃털이 흩뿌려지고 사방에서 날카로운 섬광이 번뜩였다.
파드득!
온 세상이 검은 깃털로 뒤덮인 것만 같은 기분. 앞에도 뒤에도, 그리고 옆에서도 끊임없이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파드득파드득!
그렇게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자니 김진우는 어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실체도 보이지 않는 모리건의 공격을 피해내고 막아내던 손발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지고 이내 부산스러워졌다.
“진짜 애먹게 만드는군.”
과연 모리건은 빠르고 강했다. 던전 오너의 증폭 효과로 평소보다 배 이상 강해진 스스로가 애를 먹을 정도니, 밖에서 그녀를 만났다면 정말로 큰일이 날 뻔했다.
자신의 미궁에서라면 철혈의 아나톨리우스조차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그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강함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아직 모든 것을 보인 것이 아니니 그의 눈가에서 푸른 광망이 줄기줄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기생수의 특수 능력 마안(魔眼)이 발동합니다.]메시지가 채 다 떠오르기도 전에 이미 그는 느려진 시간 속에서 모리건의 실체를 찾아 짓쳐들고 있었다.
***
[전투가 끝이 났습니다.] [나가 요새의 사령관이자 지저 남작인 김진우가 모리건을 상대로 승리했습니다.] [한때 수많은 전사를 공포에 떨게 만들던 ‘전장의 까마귀 모리건’은 힘겨운 상대였습니다. 그녀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녀는 아직 진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모리건은 누구보다 자긍심 높은 전사입니다. 그녀의 입은 가치 없는 변명보다 약속의 대가를 속삭일 것입니다.] [고대 영웅 모리건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승패는 가려졌지만 승자와 패자 어느 누구도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부리 끝이 깨어져 나간 투구, 엉망진창으로 우그러지고 망가진 갑주를 한 모리건은 꼿꼿이 서 있었지만 양손에 그러쥐고 있던 거대한 장검마저 떨군 처참한 모습이었다. 어깨를 감싼 견갑이 형편없이 파괴되어 양손을 축 늘어뜨린 그녀의 손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다.
“참담하군. 하지만 승패는 지엄한 것, 그대가 그 자격을 증명했으니 내 그대에게 헌신하리라.”
김진우 역시 온전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온몸에 혈선이 새겨진 그는 무리하게 마안을 연달아 펼치느라 눈의 혈관이 전부 터져 혈안을 하고 있었다.
[전장의 까마귀 모리건이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모리건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녀가 그간 지저에 뿌려온 원한은 적지 않습니다. 만약 그녀를 받아들일 경우, 지저 백작 ‘절망의 파르테논’과 높은 확률로 적대하게 됩니다.]메시지를 본 김진우는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모리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당장 11층 백작 중 하나인 절망의 파르테논과 적대 관계가 된다는 것만 해도 꽤나 큰 문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녀의 제안을 쉽게 내치지 못한 것은 그만큼 그녀의 힘은 매력적이었다.
던전 오너의 증폭 효과, 기생수의 마안, 약점 간파 능력까지 동원하고도 그녀를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간신히 얻은 승리, 그런데 그것마저도 그녀의 힘이 온전치 않았단다.
만약 시험을 치른 곳이 나가의 요새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패배하는 것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방어전이 아니라면 나가 요새의 어느 누구도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안젤라, 도미니크.”
전투의 양상이 하도 흉험해 한참이나 물러서 있던 도미니크와 안젤라가 그의 음성에 냉큼 달려와 대답했다.
“절망의 파르테논과 철혈의 아나톨리우스를 비교하면 누가 우세하지?”
“11층 백작들의 힘은 비등비등해요. 아나톨리우스가 그중 강한 편이긴 하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녀의 말 그대로예요. 하지만 군주의 능력을 떠나 개인의 전투력으로 따지면 아나톨리우스보다 파르테논이 아주 약간 더 우세할지 모릅니다. 신출귀몰한 전략과 냉철한 통솔력으로 집단전에 능한 아나톨리우스와는 다르게 파르테논은 오직 지닌 바 본신의 힘으로만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는 평이 있어요.’
그새 심층 백작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두었는지 도미니크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결국 아나톨리우스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호적수를 나에게 떠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려고 했군.”
그녀들의 대답을 들으며 김진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나톨리우스의 시험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 교활한 백작은 이미 그가 소환석을 사용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승리한 그가 모리건을 두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흠…….”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김진우를 안젤라와 도미니크가 우려 섞인 눈으로 쳐다보았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자신들의 주인이 또 어떤 결정을 내릴지 걱정이라도 된 모양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모리건.”
모리건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긍지 높은 전사답게 패배를 인정하고 난 뒤의 행동이 더없이 담백했다. 그래서 김진우는 그녀가 더욱더 탐이 났다.
“그대를 받아들이겠다.”
[전장의 까마귀 모리건(고대 영웅)이 나가의 요새에 합류했습니다.] [고대 군주 중 가장 강력한 외눈박이군주를 섬기던 전장의 까마귀 모리건은 타고난 전사이자 지휘관입니다. 그녀의 지휘를 받는 아군은 두려움과 고통마저 잊고 광전사가 될 것입니다. 이 두려움을 모르는 군대와 용맹한 지휘관을 만난 적들은 겁에 질려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리건의 가장 큰 힘은 본신의 전투 능력이 아닙니다. 전세를 읽고 전쟁의 흐름을 잡아내는 타고난 감각과 전술 능력이야말로 그녀의 가장 큰 힘입니다.] [모리건의 능력을 일부 공유합니다.]모리건이 무릎을 꿇고 충성의 서약을 하는 동안 도미니크와 안젤라는 경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
비명과도 같은 음성이 그를 만류했지만 이미 결정난 일이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창은 이미 결정을 번복하기에는 늦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저의 소문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전장의 까마귀가 나가 요새에 합류했다는 소식에 지저 백작 ‘절망의 파르테논’이 분노합니다. 파르테논은 어떻게 해서든 그녀와의 원한을 정리하려고 할 것입니다.] [절망의 파르테논과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절망의 파르테논을 따르는 세력 일부가 나가 요새를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안개의 왕 바르바로토스와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모략과 비술의 왕 멘티로스와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과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과 적대 관계가…….]파르테논뿐만이 아니었다. 모리건이 그동안 얼마나 날뛰어댔는지 끝도 없이 그녀와 원한이 있는 이들의 이름이 허공에 떠올랐다.
“많이도 건드렸군.”
혀를 차는 김진우에게 도미니크가 다시 우려를 표했다.
‘주인님, 그녀가 보기 드문 빼어난 전사인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굳이 지금 상황에서 그녀를 받아들인다는 건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아요.’
“이미 결정한 일이다. 지금쯤이면 이를 갈아붙이며 우리 요새를 머릿속에 새겨둔 이들이 꽤나 있을 거야. 이제 와서 말을 번복한다고 그들이 없던 일로 해줄 것 같지는 않군.”
‘그걸 아시면서 왜 굳이…….’
“도미니크, 판이 굳어버린 건 11층뿐만이 아니다. 망자의 땅을 점령한 이후로 나 역시 쉽게 움직일 수 없게 된 건 마찬가지야.”
압도적인 힘을 보인 나가들 탓에 수많은 미궁의 주인들이 우호적 관계를 바라고 사절을 보내왔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명분도 없는 전쟁을 벌였다가는 위기감을 느낀 미궁의 주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최악의 경우 나가의 요새를 적대하는 동맹군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10층의 귀족들이 9층까지 기어 올라온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9층의 주인들이 순순히 그들에게 길을 열어줄까.”
‘아…….’
뒤늦게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도미니크가 신음도 탄성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들이 우리 미궁까지 도달하려면 꽤나 많은 미궁을 지나야 할 거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10층 귀족들의 이름은 몰라도 절망의 파르테논이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9층 미궁의 주인들은 어쩌면 그들의 선봉에 깃발을 내걸지도 몰라요.”
안젤라의 말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맹수로 태어나 태생의 흉포함마저 잃고 그저 가축처럼 변해 버린 10층의 귀족들이라면 모를까, 11층 백작의 이름은 그 자체로 상대를 위축시키는 힘이 있었다.
“11층 백작의 이름값이 대단하기는 해. 그 머리 빳빳한 놈들이 지레 겁을 먹고 고개를 숙일 정도면. 그런데 말이야.”
말을 멈춘 그가 느긋하게 뒷짐을 지며 말했다.
“우리 쪽에도 그 대단한 11층 백작이 있지 않은가.”
“설마…….”
안젤라가 혹시나 하는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경악하고 말았다.
“맞아. 그 설마야.”
그런 그녀에게서 몸을 돌린 그가 도미니크를 바라보며 외쳤다.
“소문을 흘려라! 나가의 요새 뒤에 철혈의 아나톨리우스가 있음을 은밀하게 퍼뜨리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