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72)
던전 견문록-72화(72/319)
# 72
던전 견문록
제 73 화
#31. 주도권 싸움
“이거 제대로 한 방 먹었군.”
철로 만들어진 왕좌, 마치 산세 험준한 봉우리처럼 삐죽삐죽 날카롭게 끝이 솟구친 거대한 의자에 앉은 아나톨리우스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너무 힘을 실어준 건 아닌가 싶습니다. 벌써부터 이리 오만방자하니 한 번 쯤은 제제를 하는 것이…….”
좌우로 도열해 있는 철기사 중 하나가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아나톨리우스는 오히려 기꺼운 얼굴이다. 무표정한 철면이었지만 입꼬리에 매달린 미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왜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말 잘 듣는 패라면 넘치도록 많습니다. 근본도 없는 신흥 남작, 하물며 9층의 존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헤스테아.”
거듭 말해오는 철기사 철벽의 헤스테아를 보며 아나톨리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9층이 아니라면 어디에 대안이 있지? 말해보아라. 10층의 남작과 자작들은 완전히 망가졌다. 블랙 머천트의 농간에 그들은 사치와 향락에 물들어 타락했지. 그런 그들이 11층을 향해 칼끝을 돌릴 수 있어 보이는가.”
“삭풍의 보레아스라면…….”
“아니. 보레아스로는 무리다. 보레아스가 10층에서 드물게 그 용맹성을 지킨 존재라고는 하나 그는 이미 백작들에게 패한 기억이 있어. 한 번 꼬리를 만 개는 맞서는 것보다는 굴복하는 것을 선택할 테지. 장담컨대 보레아스는 10층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아나톨리우스는 자신 앞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단 한 마디를 지지 않던 지저인을 떠올리고 말했다.
“오직 그만이 가능하다. 층의 제약에서도 자유롭고 현 체제에 물들지 않은 그만이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그 경솔한 자가 대계에 초를 치지 않았습니까. 벌써 전면에 나서기에는 파르테논과 다른 백작들의 힘이 만만치 않습니다.”
“헤스테아.”
헤스테아는 나직한 아나톨리우스의 음성에 입을 다물었다.
조언도 좋고 충언도 좋다. 아나톨리우스는 수하의 말에 기분이 상해 해코지를 하는 옹졸한 군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을 해올 때면 조심해야 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철혈의 군주 아나톨리우스였다.
“그대는 걱정이 너무 많아. 그래서 그대를 곁에 두는 것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그 신중함이 결단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대는 조금 더 담대해질 필요가 있어.”
“노력하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헤스테아를 보며 아나톨리우스가 말을 이어갔다.
“완전히 굳어버린 11층의 판도를 뒤엎으려면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다. 나는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왕좌에서 일어난 아나톨리우스가 좌우로 도열한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파르테논의 움직임을 주시하라! 혹시라도 파르테논의 잡졸들이 영지를 벗어나면 바로 위력 시위에 들어간다!”
“파르테논은 광오한 자입니다. 사소한 도발에도 어쩌면 분개하여 떨치고 일어설지도 모릅니다.”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 만약 파르테논이 도발을 받아들인다면 준비해 둔 병력을 일거에 출진시킨다! 하지만 다른 백작들이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한 파르테논은 나와의 상잔을 바라지 않을 테지! 그러니 걱정 말고 제대로 압박하라!”
그렇게 외친 아나톨리우스의 시선이 11층을 넘어 9층을 향해 있다.
“그대의 결정이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얕은 수가 아니길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아나톨리우스의 철면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철혈의 이름값을 실감하게 되리라.”
***
“왜? 내가 몸값을 너무 비싸게 부른 건가?”
김진우의 말에 암상인이 울상을 했다.
“몸값이 문제가 아닙니다요. 남작님께서 그렇게 아나톨리우스님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게 문제입죠. 남작님과 아나톨리우스님의 거래는 어디까지나 밀약이 아니었습니까.”
나가들의 뒤에 철혈의 아나톨리우스가 있다는 소문이 9층 전체에 퍼져 나갔다.
다른 미궁의 주인들은 그제야 전승의 위업과 빠른 성장의 비결을 찾았다는 반응이었다.
무려 11층의 강대한 백작이 뒤에 있으니 9층의 어느 누가 나가의 요새에 견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실상은 전혀 달랐지만 김진우는 굳이 그런 소문까지 막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건 간에 아나톨리우스의 이름을 팔 수 있는 데까지는 팔아먹을 작정인 탓이다.
“웃기는군. 그대가 지금 나를 추궁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그 입 다물지. 그대가 쓸 만하다고 전해준 소환석 안에는 사실 심층 귀족들의 원한을 잔뜩 끌어안은 골칫덩이가 들어 있었어. 그대 역시 그 내용물을 몰랐다고 하나 책임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야.”
암상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저의 소문이 블랙 머천트만 피해갔을 리가 없으니 자신이 건네준 소환석으로 인해 생긴 일들을 마냥 모른 척할 수도 없던 탓이다.
실제로도 모리건을 얻은 대가로 김진우는 11층 백작 절망의 파르테논을 필두로 한 수많은 귀족과 적대하게 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블랙 머천트가 등을 떠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요. 저희 블랙 머천트에서 그 건에 대한 보상을 따로 준비하고 있으니…….”
“기대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 보상과는 별개로 부탁 하나만 하지.”
절대로 선선히 넘어가는 법이 없는 김진우의 태도에 이제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암상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나톨리우스가 약조한 반년 뒤의 대가를 지금 받고 싶군.”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제안은 암상인의 상상을 초월한 모양이다.
“아나톨리우스님이 과연 그렇게까지 해주실지는…….”
“그대라면 알고 있을 텐데?”
김진우의 질문에 암상인이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짐짓 모르는 척을 했다. 그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10층의 귀족 중 몇몇이 군세를 모으고 있다. 아마도 파르테논이 기르던 개들 중 하나겠지.”
“그걸 어떻게…….”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그들의 창끝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지.”
김진우의 말에 암상인이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죽고 싶지는 않으니 아나톨리우스님께 그 말을 전할 자신은 없습니다요. 그분이 남작님께 관대하다고 해서 저에게까지 관대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위에 한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아나톨리우스 대신 블랙 머천트 쪽에서 자금을 출자하여 선금을 당겨주기라도 할 생각인 모양이다.
방법이야 어찌 됐건 간에 군자금만 만들면 그만이라 김진우도 더는 암상인을 다그치지 않았다.
“근데 진짜 어떻게 아셨습니까요?”
“뭘 말인가?”
암상인의 질문을 알아들었으면서도 김진우는 시치미를 뚝 뗐다.
“10층 말입니다요. 그쪽 사정을 대체 어떻게 아셨는지…….”
“그냥 들리는 풍문으로 알았지.”
성의 없는 대답, 척 보아도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에 암상인이 궁금해 미치겠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미 얻을 것은 다 얻었으니 그는 암상인과 더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끄응. 그럼 일간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요.”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탐색의 눈빛을 보내온 암상인이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나가들의 요새를 떠났다.
암상인이 떠나고 남은 자리, 김진우는 포탈을 열었다. 허공중에 쩍 하고 벌어진 공간의 틈, 그 너머로 우서와 탐식의 땅이 보인다.
“오셨습니까요.”
우서의 몸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형체가 선명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진우가 아나톨리우스에게 받은 군자금의 일부를 지원 받은 탐식의 미궁이 한 등급 상승하여 드디어 5등급에 이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궁의 온당한 지배자이자 주인인 우서의 힘이 대폭 강화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그는 강해진 만큼 김진우에게 더욱 깍듯이, 그리고 공손하게 대했다.
자신이 누구에게 붙어 있어야 이득이 되는지 계산을 완전히 마친 것이다.
“그래, 별다른 일은 없나?”
“아, 몇몇 귀족들이 군대를 출정시켰습니다만, 행군하는 도중에 도적들에게 박살나서 지금은 지리멸렬해 도주 중입니다. 이거야 원, 진짜 심층의 고귀한 분들이 하는 짓 같지 않아서 당혹스러울 지경입니다.”
혀를 차며 대답하는 우서의 뒤편으로 크고 작은 점액질 덩어리가 넓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벽에 들러붙은 투명한 점액질은 희끄무레하게나마 무언가를 끊임없이 비추고 있었다.
***
우서는 그 뿌연 영상에 가느다란 점액질의 끈을 연결한 채로 10층의 상황을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김진우가 9층에 앉아서도 10층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끄응. 그래도 조금 더 넓은 지역에 퍼뜨렸다면 더 많은 것을 알았을 텐데 조금 아쉽습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나도 블랙 머천트의 상행에 꼽사리를 낀 거나 마찬가지니까.”
탐식의 덩어리들이 언제 10층까지 기어 내려갔나 했더니 아무래도 블랙 머천트의 상행에 동행한 김진우가 그때 퍼뜨린 모양이다.
하기야 암상인을 따라 10층의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으니 그들 모르게 탐식의 덩어리를 흘리고 다닐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다.
“근데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몇몇 귀족들이 추태를 보이기는 했지만 모든 귀족이 다 저렇지는 않을 텐데.”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 내가 10층을 전부 돈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본 미궁 중에 제대로 된 곳은 딱 한 곳이었어.”
삭풍의 보레아스가 지배하는 얼어붙은 땅, 그곳만이 유일하게 10층에서 경계해야 할 만한 미궁이었다.
“어쨌건 당분간은 다른 것보다 10층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힘쓰도록.”
당부를 남겨놓고 몸을 돌리려는데 우서가 그를 불렀다.
“왜?”
“그게… 탐식의 덩어리들이 빨아들이는 에너지가 너무 많아서…….”
비굴하게 웃어 보이는 우서의 모습, 단박에 무엇을 요구하는지 파악한 김진우가 피식 웃어 보이고는 품에서 중급 다운 잼 하나를 꺼내 던져 주었다.
“아이쿠! 이 우서, 몸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10층만 보고 있겠습니다요.”
기포를 부글거리며 대답하는 우서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준 그는 이내 다시 포탈을 넘었다.
***
10층의 귀족들이 9층을 향해 진군 중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김진우의 지시를 받은 나가 장거리 순찰자들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퍼진 소문은 적당히 조작되어 나가들에게 유리한 정보로 날조되었다.
그 과정에서 10층 귀족들의 창끝이 정확하게 누굴 향한 것인지, 또 10층의 상황이 어떤지 철저하게 가려졌다.
9층의 주인들이 보기에는 영락없이 다른 층이 9층을 노리고 침략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9층에 태풍을 몰고 온 김진우는 정작 9층에 있지 않았다.
[축제의 땅 파티 홀의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미궁의 등급이 4등급에서 5등급으로 격상됩니다. 잠겨 있던 시설들이 새롭게 활성화되었습니다.] [미궁의 활성화로 대부분의 크리쳐와 비스트들이 미궁의 존재를 인식합니다.]환한 빛과 함께 변화를 시작한 파티 홀의 핵, 그리고 그에 맞춰 윤희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