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76)
던전 견문록-76화(76/319)
# 76
던전 견문록
제 77 화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야수들의 왕 아니말렉투스는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야수들의 땅이 정복되었습니다.]전투 종료를 알려오는 메시지를 보며 김진우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전장 정리를 지시했다.
“굳이 이렇게 해야 할 이유는…….”
동맹 미궁의 주인 중 하나가 완전히 초토화된 야수의 미궁을 보며 조심스레 우려를 표해왔다.
“우습군. 배후 정리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싸울 수 있겠는가. 저들이 언제 10층 귀족들을 위해 칼을 뽑아 들지 어떻게 알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말인가.”
10층 귀족들의 침략이 이미 가시화된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 여러 미궁은 여러모로 문제의 소지가 많았다.
파르테논이 승작을 조건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게 꼭 10층의 귀족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설명이었지만 몇몇 미궁의 주인은 여전히 우려를 거두지 못했다.
보아하니 전쟁이 끝나고 김진우가 어떻게 나올지 지레 겁을 먹고 계속해서 제동을 거는 눈치였다.
“우서, 그대가 본 것을 말하라.”
그 말에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서가 냉큼 대답했다.
“10층의 군세가 진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앞서서 9층을 찾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은밀하게 9층에 숨어들어 몇몇 미궁을 방문했는데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로 미궁의 주인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 건 확실합니다.”
“들었나? 10층 귀족들의 손길은 이미 전부터 뻗어 있었다.”
우서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 동맹군의 주인들을 보며 김진우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배후에 불씨를 남겨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10층 귀족들이 9층의 몇몇 미궁을 포섭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말에 이제껏 우려를 표하던 동맹군의 주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 이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초토화가 된 미궁을 음울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미 명분에서 밀려 버린 터라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이상 제동을 걸면 노골적으로 김진우를 견제하고 적대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달래주기 위해 김진우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전쟁이 모두 끝난 후 야수의 미궁은 가장 공이 큰 이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 정도 보상은 있어야 그대들도 힘이 나겠지.”
단 한 마디였다.
그 말에 동맹군의 분위기가 변했다. 이제껏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가들의 행보에 경계하고 있던 이들마저도 그 달콤한 과실에 완전히 흥분했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가장 큰 전리품을 얻을 것이다.”
크고 작은 전투가 빈번한 9층이지만, 김진우와 나가들처럼 본격적으로 타 미궁과 전쟁을 하는 이는 흔치 않았다.
그런 와중이니 정체되어 버린 미궁의 성장을 다시 가속화시킬 수 있는 보상을 보고 눈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애먹게 만드는군.”
흥분하여 입에 침이 튀어라 떠들어대며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는 이들을 보며 김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저들에게 기회를 주실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아까도 보셨겠지만 눈에 핏대를 세우고 왕을 견제하려던 이들입니다. 힘을 손에 쥐면 어떤 마음을 먹을지 알 수 없는 자들이 바로 저들입니다.”
그래도 봉신의 맹세로 묶여 있다는 것에서 소속감을 느낀 것인지 헤카림이 나름 진심 어린 조언을 해왔다.
“이 전쟁이 끝났을 때 과연 그런 마음을 먹는 자가 있을지 지켜보아라.”
하지만 김진우의 대답은 차라리 광오하기까지 했다. 나름 하나의 미궁을 다스리는 이들이건만 그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했다.
그 모습에 오만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자신감에 차 보여 헤카림은 감탄했다.
“흐음.”
아리아네는 노골적으로 호의를 표하며 그의 얼굴을 훔쳐보느라 여념이 없다. 저 색정적인 여인은 아무래도 다른 마음을 먹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망상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비음 섞인 신음 소리를 내뱉을 이유가 없었다.
“어쨌건 그대들에게도 기회가 있을 테니 몸을 아끼지 말라. 소모된 병력이야 다시 충당할 수 있으니 그대들은 영웅급 소환수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라.”
김진우의 말에 고개를 숙여 보인 아리아네와 헤카림이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고 간신히 혼자가 됐나 싶으니 이번에는 우서가 다가왔다.
근래 들어 그 흐물흐물한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릴 정도로 온몸에 힘이 들어간 우서가 비굴하게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왕이시여, 공이라면 10층 귀족들의 진군로를 감시하고 지금도 살피고 있는 저도 나름 있는 편 아닙니까. 그냥 혹시 잊으실까 봐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서의 말에 김진우는 피식 웃었다.
차라리 우서처럼 노골적으로 손익 계산이 빠른 이가 상대하기 편했다.
굳이 봉신의 계약이 아니더라도 이득이 되는 한 절대로 등을 돌리지 않을 게 바로 우서 같은 이다.
“약속하지. 그대는 아주 큰 보상을 누리게 될 거야.”
그다지 구체적이지도 않은 말에 뭐가 그리 좋은지 우서는 온몸으로 기포를 내뿜으며 신이 나서 사라졌다.
***
“왕이시여!”
전령 노릇을 하느라 자리를 비운 퀀투스와 오르테아가가 다시 대열에 합류한 건 그 뒤로 김진우가 무려 두 개의 미궁을 추가적으로 멸망시킨 후였다.
“상황은?”
“대부분 결사 항전의 의지를 보이고 있었나이다. 그들은 동맹군의 진격에 진심으로 기꺼워하고 최선을 다해 협력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역시나 통로에 인접한 미궁의 주인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다른 곳과는 차원이 달랐던 모양이다.
하기야 10층의 군대가 넘어오면 가장 먼저 맞닥뜨릴 곳이 자신들의 미궁이니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기분이었으리라.
“대부분?”
하지만 이번에도 예외는 있었다.
“통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추방자들의 왕은 접견을 거부했습니다. 그에게는 그 어떤 말조차 전하지 못하고 듣지 못했습니다.”
“넘어갔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10층 귀족들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그 배후에는 파르테논이 있다.
파르테논이 무능한 10층의 귀족들만 믿고 일을 벌였을 리 없고, 아마도 최소한의 진격로 정도는 미리 손을 써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추방자들의 미궁은 9층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정도로 미리 이야기가 끝이 났을지도 몰랐다.
“명을 완수하지 못한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머리를 숙이고 벌을 자청하는 퀀투스에게 수고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 그는 이내 오르테아가와 퀀투스의 자리를 배정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0층의 귀족들이 무너진 통로를 다시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때부터 동맹군은 진군 속도를 올렸다.
이쯤 되니 동맹군의 주인들도 오히려 지나친 미궁을 보며 입맛을 다실 지경이 되었다. 전쟁 후에 주어질 보상에 완전히 눈이 돌아간 꼴이다.
“배후를 교란시킬지 모르니 먼저 손을 써두는 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반대를 하더니 이제는 먼저 나서서 미궁을 공격하자고 말하는 이마저 있을 지경이다.
“최소한의 진격로는 확보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요청을 묵살했다.
그도 그럴 것이, 10층의 군세가 다시 진격을 시작했으니 한시바삐 그들을 맞이할 전장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했다.
벌겋게 열이 오른 눈동자로 문을 걸어 잠근 미궁을 바라보던 동맹군의 주인들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는 긴장한 얼굴을 했다.
“이쯤이 좋겠군.”
추방자들의 미궁을 반나절 거리에 둔 채로 동맹군은 진격을 멈추었다. 그때에 맞춰 모종의 임무를 띠고 자리를 비운 릭샤샤가 돌아왔다.
“명하신 모든 일, 차질 없이 수행하고 왔나이다.”
“그래, 적들은 어떻게 하고 있던가?”
“통로는 복구했으나 주인의 위엄에 크게 혼이 난지라 섣불리 진격을 못하고 소수의 병력만 남겨둔 채 10층으로 군대를 물렸나이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혼쭐이 났으니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딱 적당히 남았군.”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일단의 병력을 이끌고 대열을 나섰다.
“우서, 내가 없는 동안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맡겨만 주십시오!”
너무 큰소리를 치니 오히려 미덥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눈치다.
“그럼 다녀오겠다.”
***
추방자들의 왕은 초조한 얼굴로 오너 룸을 서성이고 있었다. 왕이라는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볼품없는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그는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했다.
“왕이시여, 너무 심려치 마소서. 귀족들이 통로를 복구했으니 곧 이곳에 당도할 것이옵나이다.”
“그걸 누가 몰라! 시간이 문제 아닌가, 시간이!”
수하의 말에 오히려 역정을 내는 추방자들의 왕의 얼굴에 불안함이 가득했다.
“전령이 다녀갔다. 차라리 만나줄 것을 괜히 내쫓아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구나. 멍청하구나, 멍청해.”
“하지만 괜한 자리를 가졌다가는 10층 귀족들의 의심을 사고 맙니다.”
“요즘 나가의 왕이라는 작자가 그렇게 기세가 대단하다지? 내 결정이 틀린 건 아닐까?”
“그래봐야 9층의 주인들이 10층의 귀족들을 이겨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모인 군세만 해도 물경 2천에 달합니다. 그들은 귀족들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위엄이고 뭐고 없이 수하의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들으며 겨우 마음을 달랜 추방자들의 왕이 겨우 평정을 찾았다.
“근데 왜 진군을 서두르지 않는 거지? 9층의 주인들이 바로 코앞까지 왔거늘 귀족들은 좀처럼 나서질 않는구나.”
“그 정체불명의 폭발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신중하자는 것이겠지요.”
평정을 찾은 지 얼마나 됐다고 추방자들의 왕이 다시 불안한 얼굴을 했다.
“안 되겠어. 그대가 직접 가서 상황을 보고 오라. 아랫것들은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어.”
“명대로 하겠나이다.”
수하가 사라지자 추방자들의 왕이 초조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괜히 나한테 책임을 묻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제길, 도대체 이게 웬 날벼락이야.”
아무래도 진군로를 정리해 두지 못한 자신에게 불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새로운 걱정거리가 늘어난 모양이다.
“음?”
한숨을 푹푹 내쉬던 추방자들의 왕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위화감에 벌떡 일어났다. 온전히 자신의 영역이어야 할 오너 룸에 이물질이 끼어든 느낌이다.
“누구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퍼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섬뜩한 빛이 번쩍하고 그의 눈앞으로 짓쳐들었다.
***
“다행스럽게도 폭발은 그 한 번뿐이었나 봅니다.”
부관의 보고에 보레아스가 차갑게 눈을 번뜩였다. 통로를 무너뜨린 폭발 때문에 예상보다 진군이 늦어졌다. 당연하게도 그의 심기가 좋을 리 없었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리라.”
이를 갈아붙이는 기세가 너무도 사나워 부관이 어깨를 움츠렸다.
“어쨌건 미궁으로 드시지요. 파르테논님께서 미리 손을 써두신 덕분에 오늘은 편하게 쉴 수 있겠습니다.”
사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통로 탓에 다소 겁이 난 것이지만, 겁쟁이를 그 무엇보다 혐오하는 보레아스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제아무리 오래된 수하라도 몸이 성치 않을 것이다.
“마중 나온 이들이 안 보이는군.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 마침 저기 보입니다.”
미궁의 초입에 들어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 추방자들의 왕을 보며 보레아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접이 소홀하군! 그대는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인가!”
그간 받아온 스트레스를 엉뚱한 데 푸는 보레아스였지만, 추방자들의 왕은 감히 반박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9층의 군대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터라 정찰을 하느라 보레아스님의 방문을 조금 늦게 알았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소서.”
나름 성의 있는 사과에 부관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피 냄새가 납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전투가 있던 모양입니다.”
“킁킁. 과연 그렇군.”
그래도 이유가 있다 싶었는지 보레아스가 금세 화를 누그러뜨렸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쉴 곳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부디 그대의 성의가 내 마음에 차기를 바라겠노라.”
하지만 원래부터 삐딱하고 강압적인 성격이 어딜 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노골적인 으름장에 추방자들의 왕이 고개를 조아렸다.
“다른 병력 역시 전부 쉴 곳을 마련해 두었으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제야 그대가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하는군. 아주 좋아. 일당백의 용사들이니 각별히 신경을 써주게.”
원래부터가 제 병력 아끼기를 제 몸처럼 하는 보레아스였다. 지휘관들이나 챙겨줄 줄 알고 있던 추방자들의 왕이 다른 병력까지 신경을 써주자 몹시도 흡족한 눈치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음, 근데 혹시 10층에 온 적이 있나?”
걸음을 옮기던 보레아스가 길게 말을 빼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존귀한 분들이 지배하는 10층에 감히 제가 어떻게…….”
“그래? 근데 왜 나는 그대가 낯이 익지?”
보레아스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자 추방자들의 왕이 대답했다.
“혹여 경매장에서 저를 본 것은 아니신지…….”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겠군. 경매장을 즐겨 찾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가는 것도 사실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보레아스를 보며 추방자들의 왕이 후드 아래로 그를 곁눈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