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77)
던전 견문록-77화(77/319)
# 77
던전 견문록
제 78 화
보레아스는 비몽사몽 흐릿한 정신으로 간신히 눈을 떴다. 그렇게 눈을 뜨고도 여전히 꿈을 꾸듯 몽롱한 정신,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았다.
“음…….”
10층을 벗어난 여파일까.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머리와 힘이 없는 육신에 보레아스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도 없는가?”
지독스러운 갈증에 그렇게 소리를 쳐보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린 그가 몸을 일으키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라도 숨을 고르니 멍하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기분이다.
“기분이 영 별로군.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든지 해야지.”
껄끄러운 목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한 보레아스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그제야 미궁이 기이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어떤 전장에서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불안감에 그는 소리 높여 부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퍼드득퍼드득!
대답 대신 저 멀리서 희미하게 날짐승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끄르륵…….”
그 사이에 끼어든 억눌린 신음 소리.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이제야 알아차린 것인지, 코끝을 찔러오는 비릿한 혈향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온 미궁에 내려앉은 죽음의 기운, 등골을 타고 차가운 손이 스쳐 가듯 한기가 돋았다.
“제길…….”
이제는 완연하게 형체를 드러낸 불길함의 정체에 보레아스가 손닿는 곳을 더듬으며 애병을 찾았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것이라고는 그저 차갑게 식은 돌의 한기뿐, 잠이 들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바로 곁에 두었던 두 자루 곡도가 보이지 않았다.
“플로토스! 적습이다!”
아쉬운 대로 양손에서 손톱을 길게 뺀 그가 기운을 잔뜩 실어 외쳤다. 그 사납고 날 선 포효에 깊게 잠들어 있던 미궁이 뒤늦게 깨어났다.
“크아아악!”
“누구냐!”
“적의 습격이다!”
침묵만이 가득하던 미궁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관이 달려왔다.
“보레아스님,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적의 습격이… 끄르륵.”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부관이 피거품을 물며 주저앉았다. 목을 부여잡은 손가락 사이로 왈칵 피가 흘러내렸다.
“네 이놈!”
그렇게 주저앉은 부관의 뒤로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름 신경 써서 잠자리를 봐줬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봐?”
후드 아래로 드러난 창백한 얼굴에 한줄기 삐딱한 선이 그려졌다. 추방자들의 왕, 아니, 김진우는 화가 난 보레아스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
“날 속였구나!”
어찌나 화가 나는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보레아스를 보며 김진우가 비아냥거렸다.
“너무 잘 속아줘서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더군.”
습격은 대성공이었다. 첫 습격의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큰 것인지 10층의 병사들은 추방자들의 미궁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긴장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사지에 들어선 그들을 미몽의 여왕 아리아네가 반겨주었다.
그녀의 인도로 10층의 병사들은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꿈에 빠져들었고, 대다수의 병사들은 그게 생전에 마지막으로 꾼 꿈이 되었다.
“비열한 놈! 양쪽에 줄은 댄 것이었구나!”
보레아스가 이를 갈며 외치는 소리에 김진우가 순간적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꼴을 보아하니 보레아스는 아직도 자신이 추방자들의 왕이라고 굳게 믿는 눈치다.
“진짜 싸움밖에 모르는 멍청이였군. 아직도 내가 추방자들의 왕으로 보이나?”
“너, 설마…….”
당황한 보레아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진우를 바라보다 경악했다.
“네, 네놈이 바로 나가들의 왕!”
“어렵다, 어려워. 그거 하나 맞히는 게 그렇게 힘들어?”
계속되는 조롱에 보레아스가 격분해서 달려들었다.
퍼드득!
그런 그의 앞을 모리건이 막아섰다.
“전장의 까마귀!”
힘을 잔뜩 실은 손톱을 막아낸 여전사를 보며 보레아스가 외쳤다.
“차라리 잘됐구나! 네놈들 목만 베어내면 내 일도 끝이 날 터! 저 죽을 자리도 모르고 찾아온 네놈들의 멍청함을 원망해라!”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목표만 처리하고 내뺄 생각인지 보레아스의 기세가 한층 난폭해졌다.
푸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보레아스가 일으킨 칼바람 소리가 온 사방을 휘저어댔다.
그야말로 박빙. 보레아스가 현재 층을 벗어난 페널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의 선전이다.
하지만 보레아스는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그에 비해 모리건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였으니 누가 보아도 보레아스가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사의 긍지도 없는 놈! 나가들은 한낱 협잡꾼을 왕으로 섬기고 있었구나!”
연이은 기습, 그리고 애병마저 잃은 채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에 분통이 터지는지 보레아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맞을지도.”
틀린 소리는 아니었지만 황당한 건 모리건도 보레아스의 말에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이기면 장땡 아닌가.”
김진우가 쓰게 웃고는 팔짱을 꼈다.
“왕이시여! 적들을 한곳에 몰아두었나이다!”
저편에서 나타난 퀀투스의 보고에 김진우가 보레아스를 힐끗 쳐다보고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크게 말했다.
“그럼 슬슬 끝을 내볼까!”
그렇게 말하고는 그가 자리를 비웠다.
“네 이놈! 어딜 가느냐!”
보레아스가 성이 잔뜩 나 외쳤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
미몽의 여왕 아리아네 덕분에 손쉽게 적들의 목을 딸 수 있었지만 아직도 적의 군세는 만만치 않았다.
물경 2천에 달하는 대병력이었으니 밤을 새워 수를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아직도 1천 이상이 남아 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반나절 거리에서 놀고 있는 병력이 무려 700이다. 그들을 이끌고 와서 한 번에 처리했으면 편했을 것을 왜 이렇게 일을 어렵게 처리하는가?”
어느새 합류한 오르테아가의 질문에 퀀투스마저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내왔다. 그런 그들을 보며 김진우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렇게 욕심을 냈다면 진즉 적들이 태세를 정비하고 반격을 시작했을 거야. 아리아네가 펼친 미몽의 마법은 그 정도로 강력하지 않아.”
“그렇다면 처음의 그 폭발을 썼다면 어떨까.”
“그걸로는 무리다. 발목을 잡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때 쓴 폭발로는 적들의 강인한 육체에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 못해.”
이미 폭탄의 위력이 10층 병사들의 맷집에 미치지 못한 것을 체험한지라 김진우는 폭탄의 재사용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저쪽도 오합지졸이지만 우리 쪽도 오합지졸이지. 병력의 질 면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불리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절대 이길 수 없어.”
김진우는 난전이 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았다.
9층의 동맹군은 수에서도 병력의 질에서도 적들을 압도할 수 없었다.
지금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저리 혼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지만, 제대로 대열을 정비해서 맞붙는다면 9층의 동맹군 측이 필패였다.
그래서 이렇게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수를 쓰는 것이다.
“이제 슬슬 보레아스가 풀려날 때가 됐어. 아리아네에게 전해라. 적당히 공격하는 시늉만 하다 병력을 물리라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온몸에 상처를 입은 보레아스가 적의 무리에 합류하는 것이 보였다.
“굿 타이밍.”
짧은 혼잣말에 모리건이 나타나 불만 어린 얼굴을 했다. 그녀 딴에는 다 잡은 적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난 모양이다.
“너무 그런 얼굴 하지 말도록. 그래도 우두머리가 있어야 적들이 흩어져 날뛰어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사실상 9층의 미궁들은 잘게 쪼개진 10층의 군대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각 부대마다 최소한 영웅급 소환수의 수만 열, 거기에 더해 타락했지만 타고난 힘은 쇠퇴하지 않은 귀족들까지 더하면 일개 미궁의 주인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그래서 김진우는 저들이 흩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역할을 보레아스라면 충분히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과연 예상대로 보레아스는 병력을 수습해 빠르게 미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왕좌왕 날뛰어대다 죽기 살기로 달려들 기미가 보이던 병력들이 보레아스의 지휘를 따라 퇴각을 시작했다.
“어차피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만약 김진우의 목적이 단순히 10층의 군세를 9층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세가 꺾인 10층의 귀족들이 온전하게 병력을 수습해 자신의 미궁에 틀어박히는 건 사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10층 역시 언젠가는 정복해야 할 곳,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는 것이 유리했다.
***
“영웅급 소환수 열하나의 목을 베었고, 그 아래로는 사백스물셋의 목을 베었어요.”
“역시 귀족들을 전과에 포함시키기를 바랐다면 욕심이었나.”
“몽마들의 힘이 미치지 못했어요. 개중에 약해 보이는 놈을 건드려 보았으나 열다섯의 몽마만 희생되었을 뿐이랍니다.”
아리아네의 보고에 김진우가 쓰게 웃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귀족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 전투를 겪은 그들의 잠들어 있던 투쟁심이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층 더 독해졌다.
“전 병력에 전해. 지금부터 추격전에 들어간다.”
“지금 적들이 퇴각하는 방향을 보면 바로 10층으로 내려갈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추격할 시간이 있을까요.”
아리아네가 회의적인 얼굴로 말했지만, 김진우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미 손을 써두었다. 저들이 돌아갈 곳은 없어.”
***
보레아스는 이를 갈아붙였다.
“10층에서 다시 정비해서 놈들을 쓸어버린다!”
거듭된 기습으로 사기가 꺾인 병사들이 그의 말에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병사들을 보며 보레아스의 부관이 말했다.
“생각보다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하급 병사를 제외하고는 고작 열하나가 당했을 뿐입니다.”
김진우의 기습에 목숨을 잃은 플로투스를 대신해 부관의 자리를 꿰찬 말라가가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니 더욱더 재정비를 할 필요가 있다. 10층에서 정예만 추슬러 제대로 붙어볼 참이야.”
삭풍의 보레아스, 바람처럼 적들을 유린하는 그가 오히려 대군을 이끄느라 발목이 묶여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해 보지도 못했다.
그게 못내 화가 나 보레아스는 이를 갈았다.
“전장의 까마귀, 아니, 나가의 왕만큼은 내가 반드시 목을 따고 말리라.”
섬뜩하게 눈을 빛내며 그가 그렇게 말하니 부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를 했다.
“꼭 그리 될 것입니다.”
그렇게 분노를 토해내며 퇴각하기를 한참, 어느새 9층과 10층을 잇는 통로 부근에 도착한 귀족연합군은 다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이런 망할!”
언제 손을 써둔 것인지 지나온 통로가 무너져 있다.
“다른 길은?”
“우회하면 하루도 채 가지 않아 다시 통로가 연결됩니다.”
부관의 말에 방향을 가늠하던 보레아스가 까득 하고 이를 갈고는 명령했다.
“우회한다!”
그의 말에 야습과 전투로 지친 병사들이 다시 비칠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옥의 시작이었다.
가는 곳마다 습격이 있었다. 일반적인 습격이었다면 척후가 발견해 내지 못했을 리 없지만, 하필이면 그 적이라는 놈들이 전부 살지도 죽지도 않은 망자들이었다.
생기가 존재하지 않는 그들은 기척마저 죽인 채 땅 밑에 숨어 있다가 대열을 습격했다.
물론 수가 많지 않은 그들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자잘한 피해가 생겼다.
게다가 더욱 끔찍한 것은 그렇게 병사들을 습격한 적의 정체가 지난 폭발에 휘말려 죽은 아군의 시체들이라는 점이다.
“우회한다!”
그렇게 피해를 감수하며 나아가 봐야 결국 길은 막혀 있었다.
전쟁 전부터 준비해 온 지도가 무색하게 무너져 버린 통로들이 매번 길을 막아서니 보레아스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제는 복수고 뭐고 한시라도 빨리 9층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계속된 적습에 설상가상으로 예의 그 폭발이 대열을 한 번 더 덮쳤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간신히 추스른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타고나기를 맹수로 태어났지만 나태한 주인 아래서 무뎌진 그들의 이빨과 발톱이 다시 예기를 잃고 무뎌지기 시작했다.
“명령에 거부하는 이들은 무조건 참수한다!”
소란을 일으키는 아군의 목을 직접 베어낸 보레아스가 사납게 외치니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귀족들이 항의했다.
아무리 타락한 이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단체로 몰려와 난리를 피워대니 보레아스도 그들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 전투로 한때의 폭력성을 살려냈는지 귀족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대야말로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대의 지휘를 따랐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은 병사의 수만 1천에 가깝다! 그대가 무슨 낯짝으로 우리에게 명령을 하는가!”
급기야는 성질 급한 남작 하나가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좋지 않았다. 병사들이 분열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적들은 보레아스가 상황을 만회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적습이다!”
다섯 갈래로 갈라진 교차로, 길게 이어진 귀족연합군을 향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대병력이 들이닥쳤다.
***
“피해는?”
“사백 이상의 병력이 소실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적을 해치웠으니 저희가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곳은 적의 앞마당이다. 적의 병력은 계속해서 충원되고 자신들은 소모된 병력이 망자가 되어 달려드니 피로도가 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쫓기고 내몰리다 보니 이제는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라 보레아스는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전 병력에게 일러라! 이제부터는 닥치는 대로 적의 미궁을 공격한다! 마땅한 미궁이 있다면 그곳에서 태세를 정비하고 반격을 시도한다!”
“알겠습니다!”
“전령을 보내라! 파르테논님께 지금의 상황을 낱낱이 고하라!”
“그렇게 하면 보레아스님께 패전의 책임이…….”
저 냉혹하고 난폭한 파르테논이 패장을 용서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레아스는 거침이 없었다.
“파르테논님께 전하라! 나 보레아스,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나 나가들의 왕만큼은 반드시 죽여야겠노라고!”
사실상 상대와 함께 죽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발언, 부관이 아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전투 준비! 척후가 두 시간 거리의 미궁을 발견했다!”
척후의 보고에 병사들이 독기를 품은 눈으로 어둠 너머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들의 앞에 동맹군을 배척하던 몇몇 미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