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80)
던전 견문록-80화(80/319)
# 80
던전 견문록
제 81 화
“왜 하필 고 레벨입니까?”
“이제까지 미궁의 주인이 된 이들 중에 8층 미만에서 태어난 이는 없었으니까.”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맞춘 기분이다. 자신과 윤희가 미궁의 선택을 받은 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김진우는 백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건 확실하지 않은 정보니까 참고만 하게. 레벨이 높을수록 미궁의 주인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야기가 있네. 실제로 다른 나라에서 미궁의 주인이 된 것은 거의 최고 레벨에 가까운 이들이거든.”
“지난번에 살해당한 4층 미궁의 주인은 그다지 레벨이 높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정보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확률 문제지 절대적인 답이라고 하지는 않았어.”
딴지를 걸기는 했지만, 김진우 역시 백 선생의 추측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근데 만약 제가 미궁의 주인이 된다면 백 선생에게 남는 게 뭡니까?”
백 선생은 냉정한 인물이다. 한때는 그를 옭아매기 위해 가족을 빌미로 협박까지 한 백 선생이 이제 와서 남 좋은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아마도 미궁의 주인이 된 자신에게 바라는 무언가가 있을 터.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뭐,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어차피 지금이야 자네가 미궁의 주인이 될지 아닐지도 모르지 않나.”
“흐음…….”
그다지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백 선생을 뒤로하고 김진우는 감정소를 나섰다.
“꼭 한번 찾아가 보게. 혹시라도 미궁의 주인이 된다면 인생 피는 거야!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어쩐지 시큰둥한 그의 태도를 눈치 챈 것인지 백 선생이 뒤에서 소리쳤다. 하지만 정작 김진우는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이미 저층에서는 가장 깊다고 할 수 있는 9층에 자신의 미궁이 있다.
미궁의 등급과 핵의 질까지 무엇 하나 꿇리는 게 없고, 무려 다섯 개의 미궁을 봉토로 받아들여 휘하에 둔 상태이다.
그중에서도 세 개의 봉토는 섭정으로 사실상 직할 미궁이나 다름없다.
거기에 더해 보레아스가 깨어나면 심층에 속하는 10층마저도 그의 영지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자신이 뭐가 아쉬워 고작 5층의 미궁에 관심을 둔다는 말인가. 대개 지저 깊은 곳에 있는 곳일수록 핵의 질이 우수하니 5층의 미궁이라고 해봐야 별 볼일 없는 미궁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미궁을 마음대로 생성할 수도 있었다.
무려 아홉 개나 되는 활성화되지 않은 미궁의 핵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데 굳이 정부와 함께 일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드르륵.
[지저개발국 김주혁 차장]그래서 김진우는 몇 번이나 걸려온 지저개발국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랬더니 애가 닳았는지 지저개발국에서 직접 사람이 왔다.
“연락이 되지를 않아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집까지 찾아온 김주혁 차장은 전에 없이 간절한 얼굴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김진우 씨, 지금 대한민국이 김진우 씨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거창하게 대한민국을 들먹이는 김주혁 차장의 말에도 김진우는 시큰둥한 얼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저에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온 그에게는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 따위 전혀 와 닿지도 않고 감흥도 없었다.
“만약 협조를 해주신다면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드립니다. 그 안에는 평생 다 쓰기 힘들 만큼의 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짜증을 발견한 것일까. 김주혁 차장이 설득 방법을 바꿨다. 아마도 창고를 개조한 그의 집을 보며 사정이 좋지 않다고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다.
실제로는 지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상황 탓에 집은 아무래도 좋은 그였지만, 생활이 넉넉하지 않다고 오해를 한 듯했다.
하기야 5년이 넘게 지저에 발길을 끊었다가 다시 지저를 찾은 이유가 여동생 현지의 예단비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는 그였으니 오해할 만도 했다.
그는 굳이 그런 오해를 정정해 주지 않았다.
“원한다면 당장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급 주택을 김진우 씨 명의로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단지 테스트 하나만 받아보면 됩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죠.”
이미 백 선생을 통해 대략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김진우였지만, 상대는 전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하기야 백 선생의 비정상적인 정보력을 통해 들은 것이니 지저개발국의 입장에서는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민했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다가 정보를 얻을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거절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은 그다지 길게 걸리지 않았다.
“거절하겠습니다.”
“아직 이야기도 다 듣지 않으셨…….”
“제가 근래 배운 게 있는데, 세상에 절대로 공짜는 없다는 겁니다.”
단호한 거절. 그는 정부와 엮이는 것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거라 판단했다.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금전적인 것뿐이다.
그리고 돈이라면 이번 10층과의 전쟁을 통해 얻은 다운 잼 중 일부만 환전해도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쓸 정도로 벌어들일 수 있다.
또한 미궁의 주인이라는 자리 역시 그에게는 그다지 메리트가 없었다. 9층의 패자로 군림한 나가들의 요새가 있는 한 그깟 미궁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다.
“그래서 거절하겠습니다. 왠지 김주혁 차장님이 제시한 것들이 꼭 미끼 같이 느껴지거든요.”
돌리는 법 없는 그의 솔직한 표현에 김주혁 차장도 어지간히 당황한 눈치다.
“아,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지저를 멀리하는 김진우 씨의 성정은 이미 유명하니 포기해야겠지요. 김진우 씨 입장에서는 저희 개발국의 일에 그다지 관여하고 싶지 않은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김주혁 차장은 표정을 수습하고는 금세 수긍했다.
어차피 던전 베이비라면 김진우가 아니어도 널리고 널렸다. 최고 레벨이라는 타이틀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건 강한 탐색자가 아닌 미궁의 주인 역할을 해줄 일종의 바지사장이었다.
“아, 근데 말입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집을 나서려던 김주혁 차장은 혹시라도 그의 생각이 변한 건 아닌지 기대하는 얼굴이다.
“그 하리마오라는 미궁 말입니다.”
갑작스레 꺼내 든 하리마오라는 말에 김주혁 차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리마오라는 이름 자체야 이미 민간에 공개된 것이니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왠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5층으로 통한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만…….”
“저도 한번 이용해 볼 수 있을까요?”
***
김주혁 차장은 돌아갔다.
“흐음. 하리마오라……. 어떤 미궁이지?”
일단 확답은 받지 못했지만, 이미 하리마오를 통해 저층으로 바로 들어선 탐색자 팀이 있다고 하니 어렵지 않게 그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김주혁 차장은 곧 긍정의 대답을 해주었다.
대신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 레벨의 탐색자라고 해도 단독 행동은 불가하니 지정된 탐색자 팀과 동행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결국 감시자를 붙이겠다는 말과 다름없었지만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리마오라는 미궁을 둘러보는 게 목적이니 감시가 붙든 미행이 붙든 상관없었다.
“오랜만이에요, 진우 씨.”
그런데 그 감시의 역할로 온 것이 하필이면 안면이 있는 던전 베이비들이었다.
“준영 씨?”
태극기가 새겨진 강화복을 입은 이준영이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
“그럼 그때 저에게 제안한 큰 건이라는 게 이거였어요?”
“네. 보안 때문에 말 못했어요. 미안해요. 같이 행동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간 누린 혜택이 적지 않은지 이준영은 진심으로 아쉬운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김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근데 개발국에서 모종의 제안을 했는데 진우 씨가 거절했다고 들었는데…….”
이준영이 은근히 화제를 전환했다.
“다시 생각해 봐요. 어쩌면 진우 씨 인생이 변할 수도 있어요.”
그녀는 조금이라도 정보를 주고 싶은 것인지 자꾸만 말을 하다 말았다. 그러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그녀가 차를 세웠다.
“아…….”
“신기하죠? 이게 포탈이라 부르는 놈이래요. 이걸 통해서 단번에 5층까지 들어가는 거죠.”
온갖 방범 설비로 도배가 된 안가의 안쪽에는 입을 쩍 벌린 공간의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처음 봤을 때는 기절할 뻔했다니까요.”
“그러네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김진우 역시 자신의 미궁으로 향하는 포탈을 처음 넘었을 때 기절할 것처럼 놀란 적이 있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예상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상황에 어설프게 놀란 척 연기를 해 보였을 뿐이다.
“일단 이 문을 넘으면 바로 지저예요. 위험한 건 아니지만 잠깐 동안 속이 뒤집히고 멀미가 날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말아요.”
손을 붙잡고 자신을 이끄는 이준영의 설명에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시선은 포탈 너머로 보이는 하리마오의 오너 룸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죠.”
어쩐지 자랑이라도 하듯 신이 나 보이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김진우는 포탈을 넘었다.
“우욱!”
“괜찮아요. 금방 가라앉을 거예요. 자꾸 다니다 보면 익숙해지는데 진우 씨는 처음이라서 조금 심할 거예요.”
이준영이 등을 두들겨 주는 손길에 몸을 맡기고 그는 은밀하게 오너 룸을 살펴보았다.
온갖 현대적인 장비로 도배된 오너 룸은 마치 오퍼레이터 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각종 카메라와 전자 장비가 배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김진우의 방문에 맞춰 화면을 전부 꺼둔 것으로 보이지만, 평시에는 어떤 식으로 미궁을 방어하고 운영하는지 보여주는 광경이다.
아쉽게도 오너 룸의 반을 가른 차단 벽 탓에 미궁의 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외 시설을 보며 전반적인 미궁의 등급을 단박에 추측할 수 있었다.
최대 4등급, 최저가 3등급이다. 하기야 다운 잼이야 넘치도록 보유하고 있겠지만 미궁의 업그레이드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정도면 미궁을 발견한 직후부터 쉴 새 없이 미궁을 업그레이드해 왔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근데 저 너머에는 뭐가 있어요?”
“음. 일단 보안 때문에 자세히 설명은 못 드리지만, 굉장히 중요한 게 있다는 건 말씀드릴 수 있어요.”
“중요한 거라면…….”
“그게…….”
거듭 질문을 피하는 게 성격에 맞지 않은 모양인지 이준영이 괴로운 얼굴을 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때 은근슬쩍 끼어드는 음성이 있었다. 김진우에게도 익숙한 음성, 바로 정찬식이었다.
“네, 이렇게 또 보게 되네요.”
하기야 애초부터 이준영과 한 팀으로 움직이던 그이니 지금 이 자리에 그가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보다 놀랐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발국에서 더 이상 하리마오의 방문 허가는 없을 거라고 했거든요.”
“누가 뭐라고 해도 진우 씨는 대한민국 최고 레벨의 던전 베이비니까요.”
이준영이 제 일도 아닌데 자랑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자 정찬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보면 진우 씨가 네 남자친구라도 되는 줄 알겠다?”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
어째 이야기가 묘하게 흘러가는 감이 있어 김진우가 헛기침을 했다. 뒤늦게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정찬식과 이준영이 무안해했다.
“그보다 조금 둘러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네. 대신 미궁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지저개발국은 미궁의 위치가 공개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을 생각인 듯했다.
어지간히 경험이 많은 탐색자라면 미궁 밖의 지형과 크리쳐들을 확인하고 위치를 추정할 수 있으니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 상대가 김진우라는 것이 문제일 뿐.
[길잡이 능력에 의해 5층의 지도가 갱신되었습니다.]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와 지도를 본 그는 하리마오 미궁이 제법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준영이 기존에 건네준 지도로 인해 갱신된 영역과 적당히 겹치는 것을 보니 하리마오 미궁은 5층에서도 버려진 미궁이 가장 많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음.”
이내 사라지는 메시지와 지도의 잔상을 보며 그가 딴청을 피웠다.
“가시죠. 일단 이 카드를 받으시고요.”
그러고 보니 오너 룸의 입구가 두꺼운 철문과 각종 전자 장비로 보강되어 있었다.
이래서야 이곳이 미궁인지 어딘가의 비밀 연구소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가시죠.”
이준영의 안내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던 김진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진우 씨?”
그런 그의 시선에 차단벽 너머에서 튀어나온 한 사내가 보였다.
“아, 저번에 같이 움직일 때 봤죠? 우리 팀 막내요.”
“아, 오랜만입니다.”
김진우가 씨익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어쩐지 사내보다 조금 더 위쪽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