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83)
던전 견문록-83화(83/319)
# 83
던전 견문록
제 84 화
윤희의 입술이 달싹거릴 때마다 허공에서 빛 한 줌이 일렁이다 이내 푹 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입술을 오물거리며 주문처럼 무언가를 되뇌었다.
“윤희!”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잔뜩 화가 난 얼굴의 김진우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를 보고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와중에도 허공에 빛이 번쩍거리더니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뭐 하는 짓이야!”
이제껏 같은 처지라는 점을 감안해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던 김진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변명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간 네 처지를 감안해 한 번도 다그친 적이 없지만 이제 좀 알아야겠다. 지금 뭘 하려던 건지, 또 네가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에 없이 싸늘한 음성에 윤희가 작은 새처럼 몸을 떨었다. 평소라면 이 사소한 몸짓만으로도 그는 포기하고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정신이 돌아온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벙어리 흉내는 그만 내고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보도록.”
차가운 물이 뚝뚝 흘러내릴 듯한 음성,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 다시 푹 고개를 거꾸러뜨렸다.
“대체 말도 없이 포탈을 열려고 한 이유가 뭐지?”
팔짱을 낀 김진우는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는 끈질기게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돼.”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제껏 열리지 않던 윤희의 입을 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음성은 귀를 기울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가져다 댔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했지?”
“나는…….”
벙어리처럼 지내온 세월이 긴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탁했고, 발음은 취객의 혀 꼬부라진 술주정처럼 어눌했다.
“이곳에 있으면…….”
게다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기어들어 가는 음성은 정말이지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 독촉한다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안 돼.”
잠시 더 그녀가 입을 열어 설명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그 간단한 한마디를 한 것만으로도 온몸의 기력을 소진한 것인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왜, 네가 여기 있으면 안 돼?”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그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 대신 떠오른 것은 예의 그 메시지,
[윤희가 파티 홀로 통하는 포탈 개방을 재차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남작의 허락이 없이 포탈은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포탈의 연결을 허락하시겠습니까?]김진우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허락하지.”
그 순간 벌컥 하고 허공에 문이 열렸다. 윤희는 기다렸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간의 문을 넘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따라 김진우가 포탈을 넘었다.
“아아…….”
파티 홀까지 자신을 따라온 김진우를 보며 그녀가 억눌린 신음을 내뱉는데, 그 모습이 꼭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걱정을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내심을 알 수 없는 표정을 보며 김진우가 말했다.
“네가 내 미궁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포탈을 열도록 허락해 줬다. 그러니 이제 말해줘. 대체 무슨 일이지?”
봉신의 맹세에 섭정의 계약까지 맺은 그녀는 이미 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듯 나가의 요새를 빠져나가려던 이유를 그녀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어려운 질문인가? 그럼 쉬운 것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아무리 말문이 트였다고 해도 그녀가 정상적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당장 김진우 본인만 해도 지상에 올라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되도록 차분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곳이 어디지?”
“내 미궁…….”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음성이지만 대답을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좋아. 아주 좋아. 네 이름은?”
“윤희.”
“네가 있던 곳은?”
“깊은 땅속.”
“미궁의 이름.”
“…….”
이미 알고 있던 것에서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 보니 그녀의 발음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기억이 나지 않나, 아니면 대답하기 싫은 건가?”
“으으…….”
“좋아, 그건 넘어가고, 날 만나기 전에는 뭘 하고 있었지?”
그녀가 다시 히스테리를 보이려는 기미가 보여 김진우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이상했다.
지저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던전 베이비들은 토굴꾼의 일을 했다. 미궁의 통로를 열고, 전쟁이 일어나면 적의 미궁까지 새로운 땅굴을 파거나 적 진영 측의 토굴꾼이 파놓은 땅굴을 메우는 게 던전 베이비들이 지상에 오르기 전까지 하던 일이다.
그런데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거부했다.
“하던 일.”
어지간하면 그도 다른 질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과거가 지금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억눌린 신음을 내뱉는 그녀에게 몇 번이고 같은 톤으로 같은 질문을 했다.
“하던 일.”
“끄윽.”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숨조차 내쉬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윤희, 이곳은 네 미궁이다. 어느 누구도 너를 해치지 못해. 그건 나라도 마찬가지다.”
김진우가 차분한 음성으로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건네 봐도 그녀의 낯빛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파랗게 질려갔다.
“윤희!”
[지저 귀족의 고유 능력 하급 귀족의 위엄이 발동되었습니다.] [상대가 온 힘을 다해 위압 효과에 저항합니다.] [놀랍게도 상대가 하급 귀족의 위엄에 저항하는 데 절반쯤 성공했습니다. 제한적인 위압 효과가 발생했습니다. 상대는 당신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것입니다.] [제한적인 위압 효과에 상대방이 몹시 혼란스러워합니다.]그대로 두었다가는 질식이라도 할 것만 같은 모습에 김진우는 귀족의 능력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그녀를 진정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는 오히려 조금 전보다 한층 더 격렬하게 몸을 떨며 겁에 질리고 말았다.
[상대가 위압 효과를 떨쳐냅니다.] [무리한 저항을 시도한 상대는 순간적으로 사고가 마비되고 맙니다.]“제기랄!”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모습. 그가 황급히 달려가 그녀의 등을 툭 쳐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기생수가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기생수의 특수 능력 마안이 발동되었습니다.]이제껏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그를 끝끝내 살아남게 해준 기생수의 감지 능력. 그래서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어둠이 확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마치 밤을 옮겨 놓은 듯 지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암청색의 어둠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있던 자리를 집어삼켜 버렸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온몸이 임전 태세를 갖추고 눈은 날카롭게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어둠이 웅크린 그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희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어느새 핏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처럼 변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변한 건 눈동자만이 아니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뻐끔거리는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다.
그 섬뜩한 눈동자와 송곳니를 보는 순간 김진우는 그녀가 지저를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혼혈?”
윤희 그녀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었다.
***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마안의 효과가 사라지고 그 잠깐 사이에 허공에 머물러 있던 어둠이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윤희 역시 섬뜩한 혈안이 아닌 흐리멍덩한 흑안을 한 채로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뒤늦게 깨닫고 입을 쩍 벌렸다가 이내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무리하게 위압 효과를 떨쳐낸 부작용 같았다.
“윤희야, 윤희야.”
김진우는 윤희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불쌍한 윤희야.”
김진우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
기절한 윤희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김진우는 살며시 그녀를 안아 들었다.
방금 전에 있던 불시의 습격 탓에 그녀를 안아 드는 게 꺼림칙했지만, 그는 애써 그런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은 그가 자초한 사고, 어설픈 위압 효과로 인해 생긴 발작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그는 기생수의 경고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전투 시작 메시지도 보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그를 습격할 생각이었다면 기생수의 메시지와 함께 전투 메시지가 떠올랐을 것이다.
‘주인님!’
“주인님!”
포탈 너머에서 이편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것인지 안젤라와 도미니크가 달려와 호들갑을 떨어댔다.
“아아, 안젤라. 윤희를 부탁해.”
대충 그녀들의 호들갑에 장단을 맞춰준 그는 피로한 얼굴로 윤희를 떠넘기듯 건네주었다. 안젤라가 못마땅한 얼굴로 윤희를 우악스럽게 들어 올리더니 이내 쿵쿵거리며 저 너머로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군. 윤희가 왜 지저에 남았는지를 이제 겨우 알았을 뿐이다.”
그는 아직도 왜 윤희가 나가의 요새에 자신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쉴 테니 급한 일이 아니면 부르지 말도록.”
피로감이 짙게 묻은 그의 얼굴에 도미니크가 입을 오물거리다 이내 다물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그를 혼자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
윤희가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전처럼 그녀가 포탈 개방을 시도했다는 메시지가 뜬 탓이다.
그는 이번에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포탈의 개방을 허락했다. 정신을 잃은 그녀를 파티 홀에 홀로 남겨둘 수 없어 데리고 왔을 뿐, 그녀를 굳이 나가의 요새에 억류할 생각은 없었다.
“포탈.”
그녀를 따라 포탈을 열고 파티 홀로 넘어간 김진우는 자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윤희를 보며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뭐가 그렇게 두렵길래 도망치듯 요새를 빠져나가려는 거지? 이곳과 요새가 다른 점이 대체 뭐지? 안전한 것으로 치면 이곳보다 요새가 더 안전하지 않은가?”
비교적 차분한 그녀의 안색을 본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아니라…….”
그녀는 전과는 달리 부쩍 얌전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큰 사고를 칠 뻔했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 쓰이는 눈치다.
“말해. 오늘은 그냥 넘어갈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그는 태연하게 파티 홀의 왕좌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대신 구차한 질문은 하지 않겠어. 내가 알고 싶은 건 네가 나를 만나기 전에 무얼 했으며, 또 경매장에 흘러들어 가게 된 경위, 그리고 왜 네가 나가의 요새를 그렇게 꺼리는지 이 세 개만 알면 되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내비치는 말에 윤희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입을 열고도 한참이나 말을 이어가지 못하던 그녀가 마침내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의 어머니는 11층 백작의 아내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에 김진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11층 ‘악몽의 군주’ 디나리온의 딸이자…….”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이 된 그가 애써 머릿속을 정리하려는데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계승 경쟁에 밀려난 패배자.”
완전히 체념한 그녀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그 여파는 절대 작지 않았다. 가까스로 비명을 참고 있던 안젤라가 신음을 내뱉었고, 도미니크가 창백하게 질렸다.
“패배의 대가로 모든 것을 잃고 빼앗긴 채 짐승처럼 경매장에 팔려나가 어딘가의 귀족에게 학대당하다 지저인으로 죽는 게 내 운명이었을 테지.”
그녀가 처음으로 김진우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당신이 나의 운명을 다시 바꿨어.”
그렇게 말하는 윤희의 눈빛이 전에 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의 운명조차 바꾸었지.”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한참 만에 평정을 찾은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그녀가 대답 대신 성큼성큼 다가와 몸을 숙였다.
“읏.”
갑작스레 발등에 키스를 하는 그녀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란 그가 저도 모르게 발을 빼는데 그녀가 고개를 들고는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대는 나의 주인, 내가 잃어버린 계승권 역시 그대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