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85)
던전 견문록-85화(85/319)
# 85
던전 견문록
제 86 화
떼구루루.
마치 암상인의 눈동자가 구르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흑호의 미궁 말입니까?”
잠깐 사이에 완전히 평정을 찾은 암상인이 천연덕스럽게 물어왔다. 그 감쪽같은 얼굴을 보며 김진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나가의 요새가 채 알려지기도 전,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은 아무도 모르는 미궁을 찾아왔다.
그런 그들이 흑호의 미궁에 대해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시치미를 떼는 것은 뭔가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리라.
“이 지저에 그대들이 모르는 일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군.”
“저희를 높게 평가해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그저 하찮은 상인일 뿐입니다요.”
되도 않을 겸손을 떨어대는 모습이 가소로워 김진우가 표정을 굳혔다.
“우리 피차에 피곤한 눈치 싸움은 말도록 하지.”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모습에 결국 암상인이 두 손을 들었다.
“끄응. 흑호의 미궁이라고 하셨습니까? 들어본 적이 있긴 합니다. 이번에 5층에 새롭게 탄생한 미궁이라고, 제 담당 구역이 아니라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만 건너 건너 들은 이야기는 있습니다.”
“블랙 머천트는 그들과도 거래를 할 생각인가?”
기습적으로 본론을 꺼내 드니 암상인이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게 저희 측에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지금 상황을 지켜보는 중입니다만, 서로에게 득이 될 수 있다면 굳이 피할 이유는 없지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이윤을 따라 움직이는 상인입니다요.”
“나하고 다른 게 없지 않은가?”
“남작님이야 개인이지만 아무래도 이번 흑호의 미궁과 거래를 한다면 정치적인 부분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그렇게 시치미를 떼더니 이제는 잘도 지껄여 대는 암상인이다.
“그거야 그렇지만, 어쨌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조만간 그쪽으로도 찾아가겠군.”
“일단 뭐, 제가 담당자가 아니라서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
김진우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본 암상인이 기겁을 했다. 아무래도 뭔가 또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도 하는 눈치다.
그리고 암상인의 예감은 정확했다.
“그럼 그때 나도 좀 동행하도록 하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제안에 암상인이 입을 쩍 벌렸다.
“10층에도 동행했는데 고작 5층에 동행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저번처럼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테니 거절일랑 말게.”
추호도 거절할 생각은 말라는 그 뻔뻔한 태도에 암상인이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
모리건으로 인해 나가의 요새가 감수한 위험에 대한 책임을 더는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암상인에게 동행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왕지사 받기로 한 보상금을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뒤끝을 두지 않겠다는 말장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상인은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얻어낸 양 득의양양해서 돌아갔다.
“속아주고 싶어도 이렇게 너무 표를 내면 속아줄 수가 없군.”
암상인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던 김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블랙 머천트는 귀족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상인 집단, 지저의 사나운 주인들을 상대로 그토록 오랫동안 존재해 온 블랙 머천트가 이렇게 어수룩할 리 없었다.
이쯤 되면 일부러 양보를 해주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게 더욱 이상한 일이다.
김진우 스스로가 거래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블랙 머천트가 져주는 척 그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고 있는 게 확실했다.
“문제는 대체 목적이 뭐냐는 건데…….”
그가 블랙 머천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끔찍할 정도로 미궁을 귀히 여긴다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그들의 본점이 어디 있는지도, 또 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도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런 상황이니 블랙 머천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갈 턱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서로 이득이 되는 한에서 서로를 이용하면 그만이다.
나중에 가서 그들이 야욕을 드러내더라도 챙길 수 있는 건 최대한 챙기는 게 이득, 굳이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먼 미래를 걱정해 위축될 필요는 없었다.
‘주인님.’
도미니크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보며 김진우는 끊임없이 이어지던 생각의 고리를 끊어냈다.
“아.”
‘창고 정리가 끝났습니다.’
“그래? 그럼 제일 중요한 물건들만 확인하면 되겠군.”
그렇게 말한 그는 품에서 영웅급 용병의 소환석을 꺼내 들었다.
***
[지저목 일족의 파수꾼(영웅급) 말락카이가 소환되었습니다.] [고대부터 존재해 온 지저목 일족은 이제는 지저에서 찾기 힘든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저의 존재답지 않게 온화하며 지상의 볕을 필요로 합니다. 지저의 초입 부근이 인간들에게 점령당한 지금에 와서는 그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힘을 공급 받지 못해 쇠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쇠락한 힘만으로도 그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 유능한 미궁의 수호자입니다.] [굳건하게 대지에 뿌리를 내린 파수꾼은 수 킬로미터 밖에서 전해지는 진동조차도 감지해 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뿌리와 가지는 억세고 날카로우며, 침입자를 옭아매어 분쇄하기에 충분합니다.] [지저목은 이동하는 것보다 한 자리에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는 것을 선호합니다. 어쩌면 지독스러울 정도로 느린 이동 속도 탓에 이동을 포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소환석에서 튀어나온 영웅급 용병들은 전원이 지저목의 파수꾼이었다.
오래된 고목나무처럼 쩍쩍 갈라진 표면의 이 거대한 나무들은 움직이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지독스러울 정도로 느리고 굼떴다.
“주우우우이이이인, 추우우웅서어엉으으을.”
“숨넘어가겠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도 돼.”
말락카이의 음성은 마치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듯 길고 쓸쓸한 여운이 있었다.
듣고 있자니 그 스산함에 현기증마저 날 지경이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끄응. 방어 외에는 쓸 일이 없겠군.”
‘그래도 지저목 일족이라면 한때는 당당한 지저의 강자 중 하나였어요. 이제는 그 힘도 쇠락하고 그 찬란하던 영광도 영락하고 말았지만, 아나톨리우스가 영 쓸모없는 쭉정이를 보낸 건 절대로 아니에요.’
도미니크의 말마따나 퀀투스를 비롯한 영웅급 병력으로 대략적인 힘을 파악해 본 결과 방어에 있어서는 나가 요새에 존재하는 어떤 병력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도 없이 뻗어 나오는 지저목의 가지와 뿌리는 침입자들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근데 이건 왜 먹통이야.”
암상인에게 전해 받은 열다섯 개의 소환석 중 유독 하나만 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빛깔도 다소 칙칙한 것이 아무래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아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 간혹 있답니다. 소환석 안에서 소환을 기다리다 지쳐 완전히 잠이 들어버린 이들이요. 운이 좋으면 깨어나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게 깨어나지 못하고 흔한 다운 잼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기도 한답니다.’
“결국 불량품이라는 소린가?”
기껏 전해 받은 열다섯 개의 소환석 중 불량품이 섞여 있다니 김진우는 짜증이 났다.
당장에라도 암상인이든 아나톨리우스든 불러다 놓고 따지고 싶었지만, 암상인은 이미 돌아갔고 아나톨리우스는 저 멀리 11층의 심층 자신의 미궁에 틀어박혀 있다.
‘음.’
그런데 도미니크의 반응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기이한 열망이 담긴 눈동자로 불량 소환석을 바라보는 것이 꼭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군침을 삼키는 미식가처럼 보일 지경이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거짓을 모르는 도미니크의 거짓말은 정말이지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유치했다. 그래서 그는 드물게 그녀를 다그쳤다.
“도미니크, 나는 네 주인이다. 그리고 난 네가 주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죄, 죄송해요.’
그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란 그녀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화낼 생각은 아니야. 단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싶을 뿐.”
그 말에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도미니크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깨어나지 않는 소환석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힘은 여전하답니다. 최상급 다운 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많은 에너지를 담고 있는 것은 확실해요.’
“그래서?”
도미니크가 다시 망설이다 그의 표정이 찡그려지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소환석은 지저의 존재들에게 생명의 원천이나 다름없어요. 그걸 섭취하면 능력 이상의 힘을 얻기도 해요.’
“아…….”
그제야 도미니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은 김진우가 탄성을 내뱉었다.
소환석에 그런 효능이 있는지도 금시초문이지만, 도미니크가 시녀의 한계에 서글퍼한다는 사실만큼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음…….”
김진우는 불량 소환석과 도미니크를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 받아.”
‘주, 주인님?’
어차피 소환수를 뽑기에도 글러먹었고, 이제 와서 좀생이처럼 반품을 할 수도 없었다.
던전 에너지로 변환해 사용할 다운 잼은 차고도 넘치는 상황이고, 굳이 이제 와서 이깟 불량품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도미니크는 미궁의 초창기부터 한결같이 헌신하던 존재, 불량 소환석이 아니라 멀쩡한 소환석을 요구해도 그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런 게 있으면 미리 말을 하지. 그랬다면 멀쩡한 소환석 한 개 정도는 더 챙겨줄 수 있었을 텐데.”
씨익 웃으며 하는 말에 도미니크가 왈칵 눈물을 흘렸다.
주인의 무한한 신뢰와 어쩌면 시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벅찬 모양이다.
‘주인님.’
냉큼 달려온 도미니크가 기쁨을 참지 못하고 김진우를 끌어안았다.
늘 우아함을 잊지 않던 꼬리마저 그의 허리에 감은 채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그녀의 행동에 그가 진땀을 뺐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언제 나타났는지 안젤라가 달려와 도미니크를 그의 몸에서 떼어냈다.
“감히 네깟 게 주인님을!”
“그만!”
집착이 강한 흡혈귀답게 귀화가 타오르는 눈으로 도미니크를 노려보는 안젤라의 모습이 당장에라도 사고를 칠 것 같다.
“안젤라도 원천을 다시 채울 때가 됐군.”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 끝을 살짝 베어내니 그녀가 질투에 눈이 먼 상황에서도 금세 황홀한 눈빛이 되어 손가락 끝에 매달렸다.
갓난아기가 부모의 젖을 빨 듯 맹목적으로 피를 탐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김진우가 도미니크에게 눈짓했다.
‘감사해요, 주인님.’
안젤라의 성격을 그녀도 잘 알고 있는지라 그녀는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하는 대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그게 자신의 주인을 돕는 것이라 생각한 눈치다.
“그만.”
“더, 더, 더!”
언제나 흡혈의 순간이 되면 평소의 우아함도 기품도 내팽개치고 완전히 무너져 버리곤 하던 안젤라가 이번에도 역시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이미 필요한 만큼 원천을 채워준 김진우는 단호하게 그녀를 밀어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
안젤라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미니크가 찾아왔다.
어쩌면 한 동안 자리를 비울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하도 비장해 김진우는 이유를 물었다.
‘전에 주신 소환석을 흡수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려요. 그동안은 아마 꼼짝도 하지 못할 거예요.’
“흐음.”
막상 그녀가 자리를 비운다고 생각하니 걱정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지라 김진우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도미니크가 말했다.
‘명하신 일은 전부 처리했고, 대부분의 일은 안젤라에게 인수인계했어요. 잠깐이라면 제 부재를 채워줄 수 있을 거예요.’
어지간히 몸이 달았는지 눈치를 보는 그녀의 태도가 전에 없는 모습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당장 그녀가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도미니크가 성장해서 나쁠 게 없었다.
맹목적인 헌신과 충성을 보이는 그녀니만큼 오히려 기대가 컸다.
그래서 그는 결국 허락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아?”
‘너무 길지는 않을 거예요. 어쩌면 생각보다 짧을 수도 있고요.’
그녀도 소환석을 흡수하는 건 처음인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가? 그럼 다시 만날 때를 기대하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그가 그렇게 말하니 도미니크가 바닥에 엎드려 극도의 공경을 표하고는 이내 미궁의 어딘가로 사라졌다.
***
암상인은 그리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말씀드렸다시피 5층은 제 구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른 암상인의 인솔을 따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암상인이 손짓하자, 뒤편에 서 있던 작달막한 임프 하나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