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86)
던전 견문록-86화(86/319)
# 86
던전 견문록
제 87 화
#37. 복권
후드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영락없이 암상인과 판박이였지만, 미세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리고 낯이 익기도 했다. 묘하게 불안한 기색이 떠오른 임프의 얼굴을 보며 김진우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너 이 자식!”
암상인의 손짓에 달려온 임프는 그가 멋도 모르던 시절 미궁에 숨어들어 여동생 현지의 결혼자금을 훔쳐 달아난 그 임프였다.
“이 친구가 짐승처럼 지저를 떠돌던 시절에 남작님께 신세를 진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때 돈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여동생 현지가 부족한 예단을 갖고 시집을 가야 했다. 물론 그 이후로 배 이상의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오라비 된 입장에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 일이다.
“신세라…….”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을 것처럼 화를 내던 김진우가 암상인의 말에 금세 차가운 얼굴을 해 보였다.
“신세라면 신세지. 덕분에 아주 곤란한 일을 겪었거든.”
“뭐, 묵은 빚이야 앞으로 청산하면 될 테니 너무 노여워 마시지요.”
암상인이 그렇게 말하며 짧은 손으로 임프의 등을 툭 쳤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임프가 더듬거리며 사과를 해왔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임프의 모습 그 어디에서도 예전에 본 짐승처럼 악악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완전히 변해 버린 임프의 모습이 신기해 김진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이나 그 동글동글한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임프가 결국 그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결정은 난 건가?”
하지만 김진우는 임프에게 그리 오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난 빚이야 어찌 됐건 간에 이제 겨우 돈 몇 천만 원에 연연할 상황도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은 블랙 머천트와 인간들의 첫 거래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임프 따위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일단 방문하는 쪽으로 결정은 났습니다만,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지상의 단체와 접촉하는 건 처음인지라 여러모로 말이 많은 모양입니다.”
암상인은 이제는 꺼리는 기색도 없이 술술 내부적인 이야기해 주었다.
“어디까지 오픈할 것인지 고민되는 모양이군.”
하기야 블랙 머천트가 고민하는 것도 당연했다.
김진우는 지저의 일을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입장이었다.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귀에 미궁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갔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는 오히려 제 스스로 미궁의 존재를 숨겨야 할 판국이다.
실제로 미궁의 주인이던 던전 베이비 하나가 살해당하기까지 한 마당이라 정부의 비호조차 없는 그는 더욱더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하리마오 미궁은 어떨까. 그들도 과연 그처럼 입을 다물 것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들은 김진우처럼 일개 개인이 운영하는 미궁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외압을 막아낼 후원자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나가의 요새 대하듯 했다가는 지저의 이런저런 사정이 금세 지상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고작 10년, 쉽사리 거래를 텄다가는 다시 또 전쟁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하물며 전과는 달리 지상인들이 지저의 가치를 더욱 높게 여기는 지금에 와서는 작은 꼬투리도 주어서는 안 됐다.
“일단 결정이야 높은 분들이 하시는 거고 저야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상인이 물건을 잘 팔아야지 정치에 관심 뒀다가는 제 명에 못 죽습니다요.”
“약았군.”
“주제를 아는 것입죠. 그러는 남작님이야말로 같은 지상인 아닙니까? 근데 지금 보면 다른 주인들보다 더욱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암상인의 말에 김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일 이후로 지저나 지상이나 많은 게 바뀔 테니까.”
***
하리마오 미궁을 방문할 상단은 아직 제대로 일정조차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 바람에 김진우는 중간에 시간이 어정쩡하게 비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지상을 찾았다.
“아, 그러지 말고 한번 테스트를 받아보라니까! 혹시 알아, 자네가 미궁의 주인이 될 수 있을지?”
“관심 없습니다. 괜한 일에 휘말려들어 골치 썩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정보나 얻을 겸 감정소를 찾은 그를 백 선생이 들들 볶았다.
“그러지 말고, 대체 뭐가 문젠가. 남들은 되고 싶어도 못 되는 게 미궁의 주인인데.”
“그러니까 그 되고 싶은 사람들한테 하라고 하십시오. 난 관심이 요만큼도 없으니까.”
평소라면 금방 포기했을 백 선생이 어쩐 일인지 집요하게 그를 설득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저번에는 그냥저냥 신경 안 쓰는 것 같더니.”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해서 물었더니 백 선생이 혀를 찼다.
“그게 지저개발국에서 테스트한 던전 베이비들이 전부 부적합 판정을 받았어.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심층의 던전 베이비가 무척 귀하지. 수도 얼마 안 되는데 그마저도 줄줄이 물을 먹었으니 이제 남은 사람이 정말 없네.”
“그거야 뭐 지저개발국 사정 아닙니까? 백 선생이 왜 그렇게 애를 태웁니까?”
“아, 답답한 사람일세, 정말. 돈이 잔뜩 든 금고가 바로 코앞에 있고, 그 금고의 열쇠를 쥔 작자가 눈앞에 있는데 내가 속이 안 타겠나?”
꼴을 보아하니 그를 앞세워 지저개발국의 행사에 발이라도 얹으려는 눈치다.
괜히 남의 욕심에 휘말릴 생각은 없는지라 김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 안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꾸 그러시면 저 이제 불편해서 여기도 못 옵니다.”
나름대로 강수라면 강수였다. 백 선생도 대한민국 최고 레벨의 탐색자와 인연이 끊기는 것은 싫었는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요즘 뭐 다른 건 없습니까?”
“일이라고 해봐야 미궁 말고는 있겠는가. 나머지는 똑같지. 땅 밑에 들어가고 다시 또 나오고. 늘 똑같지. 사냥꾼들이 요즘 다시 시끄럽다는 걸 빼면 별다른 건 없어.”
그렇게 말한 백 선생이 혀를 차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네는 집에 TV랑 인터넷 없어? 신문도 안 봐? 내가 무슨 벼룩시장이야? 왜 자꾸 나한테 그런 걸 물어?”
아무래도 거듭된 거절에 빈정상했는지 백 선생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결국 김진우는 별다른 소득도 없이 감정소를 나서야 했다.
[김진우 씨,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보십시오. 테스트 한 번, 딱 한 번만 받아보면 인생이 달라집니다!]지저개발국의 김주혁 차장 역시 몇 번이나 전화해 그를 들들 볶아댔다. 덕분에 지상에 머무르기 불편해진 그는 휴대폰을 끄고 다시 지저로 향했다.
“휴우.”
한숨을 내쉰 김진우는 왕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라면 기다리고 있다 반겨주었을 도미니크가 없으니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기분이다.
괜히 머쓱해진 그가 오랜만에 미궁을 돌았다.
“왕이시여!”
퀀투스는 여전히 기운이 넘쳤다.
“아, 근데 오르테아가는?”
“끄응. 요즘 게이트 쪽으로는 잘 오지 않습니다.”
불패의 크라스토가 미궁을 찾은 뒤로 부쩍 겁이 많아진 오르테아가는 미궁의 심처에 처박혀 좀처럼 나오지를 않았다.
“싸움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놈이 이제는 집도 안 지키려고 하는군.”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찬 그가 오르테아가를 찾아 나섰다.
“음?”
오르테아가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던 김진우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기묘한 파동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런 그의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상급 나가 마법사들이 미궁의 핵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냈습니다.]***
[상급 나가 마법사들은 그들의 주인이 전해준 미궁의 핵에 미친 듯이 몰두했습니다. 좀처럼 구하기 힘든 귀한 재료에 그들은 능력 이상의 집중력과 창의력을 발휘했습니다.] [그 과정에 지저의 신비가 개입했습니다.] [극도로 희박한 확률을 깨고 상급 나가 마법사들이 ‘미궁의 핵’에 숨겨진 비밀을 엿보는 데 성공했습니다.]연구실에 도착한 김진우는 잔뜩 흥분해 양손을 치켜들고 혀를 날름거리는 나가 마법사들을 볼 수 있었다.
[미궁의 핵은 그 자체로 귀하디귀한 지저의 보물이지만, 오히려 그 귀한 가치 탓에 많은 가능성이 묻혀 있었습니다. 미궁 귀한 줄 모르는 대담한 누군가에 의해 연구의 재료로 던져진 미궁의 핵이 그렇게 감추고 있던 가능성 한 자락을 내비쳤습니다.]도대체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눈에 연구실 중앙에 놓인 미궁의 핵들이 보였다.
그런데 분명 다 똑같은 최상급 다운 잼에 옮겨두었던 핵 중 하나가 유독 번쩍거리고 있다.
[상급 나가 마법사들이 미궁의 핵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추방자의 심장과 늪의 심장이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두 개의 핵이 합쳐져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그러고 보니 아홉 개가 있어야 할 핵이 달랑 여덟 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궁의 핵이 또다시 합성에 성공했습니다.]그리고 그가 지켜보는 사이에 또다시 두 개의 핵이 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합성된 미궁의 핵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핵을 활성화시키기 전까지는 합성된 핵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전보다 더욱 뛰어난 핵으로 거듭났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아예 쓸모없는 무언가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메시지를 확인한 그가 뒤늦게 나가 마법사들을 제지했다.
“그만!”
흥분한 나가 마법사들이 신이 나서 마구 핵을 다루다 그의 목소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
“끄응.”
그 잠깐 사이에 무려 아홉 개에 달하던 미궁의 핵이 고작 여섯 개밖에 남았다. 세 쌍의 핵이 합성된 것이다.
그렇게 합성이 된 미궁의 핵이 담긴 다운 잼을 바라보던 김진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연구를 하라고 주었더니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크지만 무려 세 개나 되는 미궁의 핵을 날려먹은 나가 마법사들을 보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이게 대체…….”
두 개의 핵을 합쳤으니 어쩌면 교룡의 심장과 나가의 심장을 합친 현재 미궁의 핵처럼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메시지는 확률적으로 오히려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골치가 아파왔다.
[합성에 성공한 미궁의 핵이 담겨 있는 다운 잼.] [상급 나가 마법사들이 연구 끝에 이룬 성과입니다. 어떤 변화를 일으켰을지 핵을 활성화시켜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그렇게 효용을 알 수 없는 애매한 미궁의 핵이 무려 세 개나 생기고 말았다.
진행 중인 업그레이드가 끝이 나면 바로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미궁의 핵인지라 그 속이 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쉬이이…….”
자신들이 이룬 성과에 잔뜩 들떠 있던 나가 마법사들이 낮게 바람 소리를 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야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무려 세 개나 되는 미궁의 핵이 사라졌다. 그 말은 세 개의 미궁이 지저에서 사라졌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누굴 탓하겠어. 다 내 잘못인 것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는 주인의 얼굴을 본 나가 마법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리저리 꼬리를 비틀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자니 김진우는 차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결과가 어쨌건 간에 그들이 미궁의 발전을 위해 벌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참사’라고 해도 좋을 큰 사고가 생기고 말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다.
이제 와서 그들을 탓해봐야 앞으로의 연구 효율만 나빠질 뿐이다.
“잘했어. 아마 너희들이 최초일 거야. 미궁의 핵에 담겨진 비밀을 풀어낸 것은.”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뚝딱 세 개의 미궁을 말아먹은 것도.
차마 하지 못한 말을 꾹 삼키고 나가 마법사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니 뒤늦게 나가 마법사들이 혀를 쉭쉭거리며 그에게 무언가를 설명했다.
“뭐?”
도미니크처럼 머릿속으로 제 말을 전하는 능력도 재주도 없는 나가 마법사들이지만, 김진우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놀라고 말았다.
“합성 말고 강화도 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