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87)
던전 견문록-87화(87/319)
# 87
던전 견문록
제 88 화
나가 마법사의 설명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일전에 버려진 미궁을 돌며 미궁 핵의 파편을 얻은 적이 있다. 그 뒤로 딱히 파편을 수집할 기회가 없어 갖고 있는 핵의 파편을 연구실에 맡겨두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 핵의 파편이 바로 멀쩡한 핵을 강화하는 주 재료였다.
“으음.”
“주인님, 뭘 그리 고민하세요?”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는 안젤라의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도미니크의 빈자리를 대신한답시고 근래 들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안젤라가 다소 초췌한 안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나가 마법사들이 생각지도 못한 걸 발견해서 말이야.”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니 안젤라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대형사고군요.”
그녀 역시 귀하디귀한 미궁의 핵이 세 개나 사라졌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는지 나가 마법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일단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어차피 기존의 핵이라고 해봐야 전부 크게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말꼬리를 길게 뺀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생각지도 못한 의견을 제시했다.
“일단 합성된 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하는 게 급선무네요.”
“그렇지. 그래야 쓸 곳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적당한 곳을 찾아 새롭게 미궁을 활성화시켜 보면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있지 않겠어요?”
안젤라의 말에 김진우가 까칠까칠한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심층의 백작들은 본 미궁을 지키는 여러 개의 위성 미궁을 갖고 있어요. 대개 수하의 귀족들이 그 역할을 하지만, 틈이 있는 곳에는 억지로 미궁을 생성시켜 길목을 막기도 해요.”
안젤라의 말은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래서 김진우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적이 침입해 온다면 본 미궁 대신 먼저 적을 맞이하는 일종의 방어선이랄까요. 게다가 평시에는 쉽사리 적의 첩자들이 미궁을 염탐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도 하고요.”
철혈의 아나톨리우스 곁에서 지낸 것이 나름 경험이 된 모양인지 그녀가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쓸모가 있었다.
“호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런 식으로 본 미궁을 방어한다고 들었어요. 전쟁이 나더라도 병력을 모을 시간을 벌 수도 있고 여러모로 이점이 있다고 하니 주인님도 그런 식으로 주변의 방비를 다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아이디어를 들었는데 꾸물거릴 이유가 없었다.
“릭샤샤를 시켜서 요새 근방에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라고 해. 일단 핵 세 개 정도만 먼저 시험적으로 설치해 보도록 하지.”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이미 9층의 지형 대부분을 파악한 그였으니 그중에서 요소라고 생각할 만한 곳들을 추려내는 것은 쉬웠다.
“흠…….”
물론 개중에는 미궁을 생성시키기에는 애매한 곳이 종종 있었으나 나가 일꾼들을 시켜 근방의 통로를 확장하도록 했다.
그렇게 하고 보니 8층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는 북쪽에 하나의 미궁, 그리고 10층의 통로가 있는 남쪽에 다시 두 개의 미궁을 설치되게 되었다.
[비활성화되어 있던 미궁의 핵이 활성 됐습니다.] [핵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미궁의 탄생까지 앞으로 720시간 남았습니다.]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전쟁도 끝난 상황인데다가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요새의 핵이 이제 업그레이드 완료를 코앞에 둔 시점이다.
그래서 김진우는 요새의 심처를 지키는 병력을 일부 배치해 두고 경과를 지켜보는 것으로 위성 미궁의 생성에 대한 작업을 일단락 지었다.
“끄응. 아예 못 쓰게 변하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합성이 꼭 좋은 쪽으로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메시지를 떠올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
지난 전쟁의 전리품으로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은 나가 요새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휘하에서 달콤한 승리의 대가를 취한 동맹군의 미궁들이나 새롭게 봉신을 자처한 미몽의 여왕, 그리고 떠돌이들의 왕 역시 공적의 포상으로 얻은 핵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활용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우서는 나가 요새를 따라 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인지 대담하게도 기존의 핵에 새롭게 얻은 핵을 추가했다. 아무래도 나가 요새의 힘이 두 개의 핵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서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으니, 각 미궁의 핵이 지닌 가능성이 천차만별인 탓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탐식의 미궁을 관장하는 핵과 그가 새롭게 얻은 핵이 그다지 질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어차피 하나의 핵으로 꾸준히 발전시켰어도 언젠가 한계에 봉착했겠지.”
“그거야 그렇지만.”
각 미궁의 핵마다 도달할 수 있는 등급의 한계가 있었다. 그걸 몸소 체험한 우서는 풀이 잔뜩 죽어 있다. 아무래도 자신의 미궁이 나가 요새처럼 발전하기를 바란 모양이다.
“그래도 지금만 해도 9층에서는 당할 미궁이 없을 거야. 두 개의 핵이라니 다른 주인들은 감히 시도도 못하는 일이 아닌가. 애초에 핵 하나를 더 구할 일도 없고.”
한계를 확인하기는 했지만 기존의 핵과 새로운 핵이 공조하여 효율이 무지막지하게 오른 것만큼은 사실이라 우서도 겨우 웃어 보일 수 있었다.
“그나저나 다른 주인들은 어떻게 썼으려나.”
우서야 나가 요새를 수시로 들락날락거리고 있으니 나름대로 모방할 구석이 있었다지만 아리아네를 비롯한 다른 미궁의 주인들은 어떤 식으로 새롭게 얻은 미궁의 핵을 사용할지 흥미가 동했다.
그들은 우서와는 달리 김진우 자신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정통적인 지저의 방식으로 핵을 활용했을 테니까.
생각이 미친 김에 그는 포탈을 열고 미몽의 여왕이 다스리는 미궁으로 향했다.
“주인이시여!”
포탈의 발생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는지 미몽의 여왕 아리아네가 냉큼 달려와 그의 발치에 납작 엎드렸다.
“과한 예의는 좋아하지 않아. 편하게 있도록.”
아리아네를 일으켜 세운 김진우가 슬쩍 그녀의 거처를 둘러보았다. 보랏빛의 기이한 연기가 꽉 들어찬 미몽의 미궁은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이었다.
당장 핵이 위치한 오너 룸만 해도 자욱한 연기에 모든 게 흐릿해 현실감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무슨 일로 제 미궁을 방문하셨나요? 부르셨다면 제가 직접 갔을 텐데.”
말은 번지르르했지만 김진우가 자신의 심처나 다름없는 오너 룸을 방문한 것을 불편해하는 눈치다.
하기야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서 핵을 파괴하고 그녀를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하니 그녀가 불편해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뿌연 연기 사이로 핵을 발견한 김진우가 슬쩍 물었다.
“새롭게 얻은 핵은 어디에 있지?”
“음…….”
미몽의 여왕은 그가 앞에선 공평하게 핵을 분배하더니 이제 와서는 흑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얼굴로 대답을 회피하는 그녀를 보며 김진우가 실소를 내뱉었다.
“불쾌하군. 그깟 미궁의 핵 따위, 원하면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 수하의 물건을 탐낼 정도로 내가 궁해 보이던가.”
웃으며 건네는 말이지만, 그 안에는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아리아네가 즉각 엎드려 사죄했다.
“내가 원해서 맺은 봉신의 맹세가 아니다. 그대가 먼저 찾아와 나에게 제안했지.”
미몽의 여왕 아리아네는 영악한 여인이다.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간교함이 그 보랏빛 눈동자에 가득했다.
그래서 김진우는 기회가 생겼을 때 그녀를 찍어 눌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녀로 인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게 뻔했다.
“원한다면 봉신의 맹세를 거두겠다. 대신 그대가 나의 곁에서 얻은 모든 대가는 그대로 돌려줘야 할 거야.”
사실상 봉신의 맹세를 물리는 것이 가능한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그는 강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말을 다른 뜻으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절대 그런 뜻은 없었나이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필요 이상으로 몸을 떠는 그녀를 보며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미몽의 여왕 아리아네와 봉신의 계약을 파기하시겠습니까?] [주인에게 버려지는 것은 지독한 불명예입니다.] [계약을 파기할 경우 미몽의 땅과 그 지배자는 꽤나 큰 타격을 입습니다.] [충성을 가볍게 여긴 대가는 가볍지 않습니다. 불명예스러운 주인을 위해 헌신할 이들은 없습니다.] [주점에 용병의 발길이 끊깁니다.] [몽마들이 주인의 통솔력에 의문을 갖습니다.] [당신 역시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지만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명성이 다소 하락할 뿐입니다.]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제약이라 김진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메시지대로라면 그녀가 이렇게 벌벌 떠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신이야 그저 명성이 조금 하락하는 수준에서 끝난다지만 그녀가 입는 피해는 그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흐음…….”
봉신의 맹세로 묶인 이들을 제약할 한 가지 방도가 더 생긴 김진우는 미몽의 여왕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중간에 다소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김진우는 큰 어려움 없이 다른 봉신들이 어떤 식으로 새롭게 얻은 미궁의 핵을 사용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정제 과정을 통해 미궁의 힘을 일부만 추출하여 자신의 미궁에 주입하는 식으로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핵이 지닌 생명력 태반이 사라지지만, 핵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다.
결국 핵에서 필요한 힘만 뽑아다 쓰는 방식으로 그렇게 힘을 추출당한 핵은 블랙 머천트에게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고 했다.
“블랙 머천트는 도무지 안 끼는 곳이 없군.”
한숨을 내쉰 그는 이내 자신을 찾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안젤라가 다급한 얼굴로 달려오고 있다.
“왜 또!”
이렇듯 수하들이 달려올 때면 늘 좋지 못한 일이 생기는지라 그가 버럭 짜증을 냈다.
멀리서 달려오던 안젤라가 그 서슬에 깜짝 놀라 주춤주춤 멈춰 서더니 보고했다.
“다른 게 아니라…….”
“다른 거 뭐?”
“도미니크가…….”
도미니크라는 이름이 나오기가 무섭게 김진우가 곧장 바닥을 박찼다.
“안내해!”
***
그것은 허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거대한 고치와도 같았다.
불투명한 은빛 커튼에 가려진 도미니크를 찾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떠보았지만 보이는 거라고는 그 번쩍이는 장막뿐이다.
“아무래도 변화가 곧 끝날 것 같아요.”
“그래?”
“네. 그녀라면 주인님이 그 순간을 지켜봐 주기를 원할 것 같아서.”
불행 중 다행인지 안젤라가 나쁜 소식을 전해온 것은 아니었다.
고치 너머에서 느껴지는 도미니크의 기운은 한 점 이상도 없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강건했다.
“나가들은 이런 식으로 변하는 건가?”
“글쎄요. 제가 나가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닌 게 확실해요.”
안젤라의 말대로다. 은빛 장막에 둘러싸인 도미니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관이었다.
“아, 이제 막 끝이 나려나 봐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았군.”
자리를 비울 때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자리를 비울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정작 시간이 그리 오래 흐르지 않았다.
“주인님이 걱정돼서 빨리 끝내려는 모양이죠.”
농담기가 잔뜩 섞인 안젤라의 말이지만, 김진우는 도미니크라면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우직하고 헌신적인 시녀는 제 일신의 영달보다는 주인에게 봉사하는 것을 더욱 선호했으니까.
“그런가.”
그렇게 그가 말하는 순간 은빛 장막이 순식간에 빛을 잃고 푸석푸석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그렇게 메마른 고치의 표면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