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90)
던전 견문록-90화(90/319)
# 90
던전 견문록
제 91 화
#38. 어부지리
“11층에서 온 자일로스라고 합… 끄악!”
말을 하는 도중에 다시 한 번 모리건에게 걷어차인 작고 땅딸막한 사내가 비명을 질러댔다.
“알아듣게 똑바로.”
여기에 오기 전까지 어지간히 시달린 것인지 그녀의 말 한마디에 바짝 얼어버린 사내는 피가 흘러내리는 머리를 어루만질 생각도 못했다.
“11층에서 나가의 왕을 살피라는 명을 받고…….”
“다시!”
모리건이 다시 손찌검을 하자 자일로스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뒤늦게 조목조목 자신을 소개했다.
“11층 파르테논 백작님의 명을 받고 나가의 요새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파르테논이라면 절망의 군주이자 모리건의 일로 10층의 귀족들을 충동질해 전쟁까지 벌인 작자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암상인을 통해 모리건을 보내오는 조건으로 화평을 제의하기도 했다.
“파르테논 백작이 왜 이 먼 9층까지 염탐꾼을 보냈지?”
사실 파르테논의 생각이라고 해봐야 빤했다.
모리건에 대한 원한은 포기하기 싫고, 제 나름대로 양보까지 해가며 화평을 제의했더니 9층의 남작 나부랭이가 대답조차 없으니 돌아가는 사정이 궁금했을 것이다.
“저도 명령만 받았지 정확한 사정은… 히익!”
모리건은 뭐가 또 못마땅한지 발을 들어 올렸다가 그의 제지에 못이기는 척 물러났다.
“그럼 아는 대로 말해봐. 정확하게 무슨 명령을 받았지?”
“그냥 지켜보고만 있으라고… 그 외에 특별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김진우가 자일로스의 흉물스럽게 뜯겨져 나간 두 귀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곁에 있던 모리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큰 귀 염탐꾼이라 불리는 족속입니다. 일신의 능력이야 별 볼일 없지만 귀가 밝아 남의 이야기를 엿듣거나 몸을 숨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혹시 몰라서 귀부터 잘라냈습니다.”
과연 전장의 까마귀다운 단호한 손속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과 관련된 파르테논의 수하라는 말에 손을 과하게 썼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족속이기도 하지요. 지금도 보십시오. 저 눈알 굴러가는 꼴을.”
그렇게 말한 모리건이 우악스럽게 자일로스를 두들겨 팼다. 이번에는 김진우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 역시 자일로스라는 염탐꾼이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끄악!”
결국 한참이나 구타가 이어지고, 자일로스가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다가 결국 사실을 실토했다.
“요, 요새의 허실을 파악해 오라고… 히익! 그 병력의 수와 힘을 견주어보고 오라 했습니다요!”
이빨이 몽창 부러지고 나서야 사실을 토로한 자일로스는 결국 모진 손찌검에 기절하고 말았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습니다. 절망의 파르테논이 그렇게 쉽게 포기할 작자가 아니거든요.”
“결국 그때 보낸 초대장도 함정이었겠군. 고대 영웅의 소환석을 미끼로 쓰다니, 나름대로 공을 들였다고 해야 하나.”
파르테논의 회유에 넘어가 초대장을 사용했다가는 큰일 날 뻔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애초부터 파르테논은 회유에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리건은 저 때문에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뻔뻔했다. 꺼리는 기색도 없이 물어오는 꼴이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하다.
“어차피 11층에서 직접 밀고 올라오지는 못할 겁니다. 두 눈 시퍼렇게 뜬 철혈의 아나톨리우스도 아나톨리우스지만 두 층이나 올라왔다가는 제 아무리 심층의 정예라고 해도 무사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해봐야 전처럼 10층의 귀족들을 충동질하는 정도겠지.”
물론 크게 한번 뜨거운 맛을 본 귀족들이 다시 파르테논의 충동질에 넘어갈까 의문이지만,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를 돌려보내지 않은 순간 이미 파르테논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주인님께서 지난 전쟁에서 제대로 놈에게 망신을 줬으니 지금쯤은 저보다 주인님에게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모리건은 강 건너 불구경을 넘어 이제는 즐기는 듯한 표정이다. 그게 얄미워 그가 눈을 부라리니 그녀가 딴청을 피워대는데 그 모습이 더욱 더 밉살맞았다.
“잘도 지껄이는군. 따지고 보면 그대라는 애물단지를 만난 탓 아닌가.”
“뭐, 그래도 나름대로 주인님께서도 이득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전 아직도 전성기의 힘을 찾은 게 아니랍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쉰 김진우였지만, 그녀의 말에 반박은 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미궁의 주인들 이상으로 강한 그녀가 명실상부한 나가의 요새 최고 전력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정도로 이를 드러내는데 가만히 있기에도 찝찝하군.”
파르테논과는 어차피 회복 불가능한 관계인지라 김진우는 차라리 올 것이 왔다는 얼굴을 했다.
“아나톨리우스를 만나봐야겠어.”
***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안젤라는 어렵지 않게 아나톨리우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소식이 전해지기 무섭게 아나톨리우스가 9층을 찾았다.
“건방지군. 9층의 남작 따위가 나를 오라 가라 하다니.”
냉큼 달려온 주제에 아나톨리우스는 한껏 기분 나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나톨리우스를 향해 김진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파르테논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해 내가 꽤 고생을 했는데 말이야.”
“대가라면 이미 충분히 치르지 않았는가. 아니면 아직도 부족하다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 좀 이상해서 말이야. 파르테논이라는 놈이 멀쩡한 수하 놈을 죽이면서까지 모리건을 제거하려고 했다는 게…….”
당시에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파르테논은 멀쩡한 수족을 잘라내면서까지 전쟁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만약 성공했다고 해도 남는 게 없었을 것이다. 10층의 귀족들은 곁에 두기에는 이미 썩어버렸으니까. 굳이 멀쩡한 11층의 수하를 버리고 취할 만한 패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희생시킨 부하가 작위까지 있는 당당한 귀족이었으니 모리건에 대한 원한 하나를 갚기 위한 대가치고는 지나쳤다.
“그래서?”
철혈의 아나톨리우스는 그의 말에 무표정하게 반문해 왔다. 어지간한 이라면 그 철면에 질려 버리고 말았겠지만, 김진우는 오히려 눈을 빛내며 그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대가 한 짓인가?”
앞뒤 다 잘라낸 그의 말에 아나톨리우스가 한참을 그를 바라보다 이내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부정도 긍정도 않는 상대였지만 대답은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름값 한번 거하게 받는군.”
그게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판 대가였는지, 그도 아니면 정적의 수족을 잘라내고 미적거리는 나가들의 등을 떠밀기 위한 수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그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건가?”
“그럴 리가 있나. 말없이 일을 벌였더니 그대가 꽤 화가 난 것 같아서 이번에는 미리 말을 해주려고 했지.”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김진우의 말에 아나톨리우스가 눈을 빛냈다.
“파르테논을 흔들 생각이다.”
“어떻게?”
아나톨리우스의 질문에 그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건 알 거 없고, 어쩌면 파르테논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나를 죽이겠다고 미궁을 나설지도 모르겠군.”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
“싫어도 조만간 알게 될 거야.”
대화의 주도권이 김진우에게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나톨리우스가 못마땅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런 철혈의 기사를 보며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냥 기회가 온다면 잡으라고.”
***
아나톨리우스가 돌아가고 난 직후 김진우는 지저를 나섰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그는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나가의 요새 어느 누구도 그게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뭡니까?”
모리건의 질문에 김진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선물이다.”
***
그렇게 아나톨리우스가 방문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암상인이 찾아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일꾼도 버려둔 채 용병만 대동하고 달려온 암상인은 보자마자 대뜸 외쳤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암상인의 노발대발하는 태도에도 김진우는 태연했다.
“내가 뭘?”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본 암상인이 짧은 팔로 가슴을 두들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전해드린 그 초대장 말입니다.”
“아아, 그 초대장?”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의뭉을 떨어대는 모습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뻔뻔했다.
“초대는 받았는데, 집주인이 손님을 털어먹을 생각만 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무서워서 갈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손짓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성질 더러운 집주인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그래서 내가 가는 대신 선물만 보냈지.”
암상인이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11층이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김진우는 암상인의 못마땅한 눈길에도 당당했다. 그는 오히려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어서 말하라며 은근히 암상인을 보챘다.
“파르테논님이 남작님을 죽여 버리겠다고 지저에 공언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김진우를 보며 암상인이 경고하듯 말했다.
“선물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네?”
“마음에 들 리가 있겠습니까! 남작님께서 보내신 그 정체불명의 ‘선물’ 덕분에 미궁의 5분지 1이 무너졌답니다. 그 바람에 파르테논님이 화가 나서 수하들을 출병시켰답니다.”
파르테논이 길길이 날뛰어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건방진 9층의 남작을 유인하기 위해 초대장을 보냈더니 오라는 놈은 오지 않고 애먼 폭탄이 넘어왔다.
그 바람에 미궁의 일부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으니 화가 나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지상까지 가서 비싼 값을 치르고 폭탄을 구해온 보람이 있었다며 김진우가 낄낄대며 웃었다.
“걱정도 안 되십니까, 무려 11층 백작의 정예 병력이 남작님을 잡기 위해 뛰쳐나왔다는데?”
암상인이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말해보았지만 그는 전혀 걱정이 없어 보였다.
“걱정할 게 있나. 어차피 그 병력, 9층까지 오지도 못할 텐데.”
김진우가 생각 없이 벌인 일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암상인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하는 얼굴을 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암상인을 보며 그가 계속해서 키득거렸다.
“내가 본 아나톨리우스는 줘도 못 먹는 병신이 아니었거든.”
도대체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라 암상인이 의문을 표하자 그가 여전히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
“기다려 봐. 며칠 지나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의문을 풀지 못하고 떠나간 암상인이 다시 며칠이 지나 나가의 요새를 찾았다.
“미리 두 분이 입을 맞춘 겁니까?”
“뭘 말이야?”
“아나톨리우스님의 철혈의 기사단이 미궁을 나선 파르테논님의 절망의 사제단을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습니다.”
아나톨리우스에게 철혈의 기사단이 있다면, 파르테논에게는 ‘절망의 사제단’이 있었다. 가는 곳마다 죽음과 절망을 포교하는 이 강력한 사제들이야말로 파르테논이 자랑하는 최강의 전력이다.
“그래서 파르테논은 어떻게 하고 있어?”
암상인의 말에 김진우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미궁이 채 복구되기도 전에 입은 타격인데다가 아나톨리우스님이 작정하고 달려든 탓에 피해가 꽤나 큽니다. 어쩌면 이번에는 저번과는 달리 진짜 전쟁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짜 전쟁?”
이건 또 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저 저번처럼 국지전 수준에서 일이 마무리되겠지 싶었는데 암상인은 전에 없이 심각한 얼굴이다.
“네. 다른 백작 분께서 끼어드는 바람에 일이 커졌습니다.”
“다른 백작이라면?”
“악몽의 디나리온, 그분이 이번 전쟁에 끼어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