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93)
던전 견문록-93화(93/319)
# 93
던전 견문록
제 94 화
“너 인마, 먼저 가봐.”
“아, 왜 또? 김주혁 차장이 지상에서 개인 활동 하지 말라고 하는 거 못 들었어?”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말 잘 들었다고.”
“못 가! 나 보내놓고 무슨 또 쓸데없는 소리 하려고!”
둘이서 실랑이를 떠는 모습이 가관이다. 애초에 김진우 본인의 의지는 생각지도 않는 행동이라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따, 새끼. 말 드럽게 많네. 내가 애냐? 잡소리 말고 먼저 가!”
“아! 대체 왜!”
김진태가 못 가겠다고 버티며 소리를 지르니 이준영이 버럭 고함을 쳤다.
“새끼야, 누나 연애 좀 해보려고 한다, 왜!”
“아…….”
그 뜬금없는 말에 김진태가 그대로 얼어버렸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이준영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어. 나 가볼게. 너무 늦지 마.”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김진태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를 휙 쳐다보더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제삼자마저 사라지자 김진우와 이준영 사이에는 더욱더 어색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음, 진우 씨.”
“아, 오해 안 할게요. 뭐, 따로 할 말이 있던 거죠?”
적당히 그가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그렇게 이야기하니 도리어 이준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그건 맞는데요.”
뭔가 폭탄선언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에 김진우가 다시 입을 열려는데 그녀가 한 발 빨랐다.
“뭐, 아까 한 말도 없는 말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이준영이 성큼 다가왔다. 눈조차 피하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당당한 눈빛에 김진우는 괜스레 침을 꼴깍 삼켰다.
“뭐, 부담 줄 생각은 없어요. 지저에서 나고 자란 주제에 이제 와서 여자친구니 남자친구니 떠들어댈 생각도 없고, 그냥 제 마음이 어떻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하기야 그간 그녀가 보여준 호의는 그저 목숨 빚을 졌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쳤다.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신세를 갚았음에도 그녀는 뭐라도 하나 더 얹어주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으니까.
“왜 나를…….”
“뭐 다른 거 있겠어요?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들개처럼 물어뜯는 것밖에 없는 년이 진짜 늑대 같은 남자를 만나서 반한 거죠.”
지저에서는 약하면 죄요, 강하면 그 자체로 선이었다. 아무리 지상에 녹아들어 살고 있다고 해도 지저에서 자라오며 몸에 배어버린 성격을 어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목숨 빚까지 지고 말았으니 어쩌면 그녀가 그런 마음을 품은 게 크게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대답은 해줄 필요 없어요. 어설프게 다른 평범한 사람들 흉내 낼 생각도 없고 단지 진우 씨가 외로울 때 나를 떠올려 줬으면 해요.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난 언제든 진우 씨가 부르면 달려올 용의가 있으니까요.”
대범하다기보다는 지저에서 나고 자라온 탓에 험하게 굴러먹었다는 편견 속에서 시달려 온 여인의 깊은 자괴감이 묻어나는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 어디에도 애정을 구걸하는 비굴함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당당하기까지 한 그 얼굴을 보며 김진우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준영 씨한테 먼저 연락할게요.”
“그거면 됐어요.”
활짝 웃어 보인 그녀가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우리 어색해지는 건 아니죠?”
끝까지 활기 찬 목소리로 그녀가 이내 화제를 전환했다.
“그리고 이건 아까 하려던 말인데, 빠르면 이번 주, 늦어도 다음 주면 본격적으로 개발국이 활동을 시작할 거예요. 숨겨둔 미궁을 일부 팀에게 공개하고 탐색자들을 저층으로 실어 나를 모양이에요.”
“방비가 끝난 모양이군요.”
그간 미궁을 탈취당할까 봐 노심초사하던 지저개발국이니만큼 불온한 움직임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비록 제한적이나마 공개를 할 리가 없었다.
“준비도 끝이 났고 이미 다른 나라에선 포탈을 통한 지저 진입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으니 시대의 흐름을 따른 거겠죠. 솔직히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대한민국 지저가 얼마나 넓다고. 어차피 걸릴 거 차라리 이쪽에서 주도하겠다는 생각 아닐까요.”
거기까지 말한 이준영이 슬쩍 그를 바라보며 푸념을 했다.
“어차피 밝혀질 사실이고 벌써 여기저기서 정보도 샜는데 진태 자식이 유난스러워서.”
숨기는 것 없이 정보를 전해주는 그녀였지만, 김진태가 하리마오 미궁의 주인이라는 사실만큼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동료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니만큼 선의에서라도 말하기에는 뭐한 모양이다.
“그리고 하리마오 근방에 일정 에어리어를 두고 탐색자들의 캠프를 만들 생각이라니까 그것도 적극 이용해 봐요. 어차피 우리 같은 탐색자들은 지저에 있는 시간이 다 돈 아니겠어요? 그러니 초입에서 헤맬 거 없이 포탈에 들어가는 돈 아끼지 마요.”
이준영의 말에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단은 지저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이 먼저라 파주에 위치한 지저 게이트를 통해 지저로 들어섰다.
***
5층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부쩍 많아진 인기척에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많다 많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와서 확인하고 나니 온 사방에 가득한 탐색자들의 기척에 이곳이 지저인지 게이트의 휴게소인지까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곳까지는 스텔스 능력을 활성화시킨 채 내려왔지만, 5층부터는 은신 감지 능력이 있는 탐색자들이 있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새삼 그 정도의 공격에 위험한 수준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소란을 피하기 위해 그는 은신을 풀고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탐색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장 조금만 이동해도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탐색자들의 기척이 널려 있었다.
그는 그중에서도 비교적 수가 적은 탐색자 무리를 찾아 이동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접근했다.
다른 때였다면 대번에 칼을 뽑아 들고 경계를 했을 탐색자들이지만, 5층에 워낙에 많은 탐색자들이 있으니 그저 눈길을 한 번 주고는 그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열다섯 남짓한 탐색자 무리, 던전 베이비가 개중 넷이고 열한 명이 창잡이와 벙커로 이루어진 일반 탐색자였다.
김진우는 그들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신경이 거슬리지 않는 정도에서 그들을 좇았다.
“뭐야, 신경 쓰이게?”
“냅둬. 일행 놓쳤나 보지.”
“혹시 사냥꾼 아냐?”
“미쳤냐? 지금 5층에 탐색자가 몇인데 사냥꾼 나부랭이가 돌아다녀?”
이따금씩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탐색자가 다른 무리에 끼어 이동하는 일은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들 중 하나가 사냥꾼으로 돌변하여 탐색자 무리를 습격하는 일 역시 크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5층은 그야말로 가는 곳마다 탐색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이라 사냥꾼이 활동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탐색자 무리들도 이따금씩 그에게 경계의 시선을 줄 뿐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닌 말로 하고 많은 탐색자 중에서 그리 특출 나지도 않은 자신들을 노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 진짜 서쪽도 주성이네 패거리가 싹 다 뒤지고도 공쳤다는데 이쪽도 마찬가지네.”
“차라리 다운 잼이나 채집하는 게 낫지. 이거 시간만 낭비하는 거 아니야?”
“인마, 그래도 한 번 찾으면 인생 대박이다. 미궁의 주인 그거 겁나 유니크한 타이틀 아니냐?”
“그거야 찾았을 경우고.”
그렇게 탐색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으며 한참을 따라다니다 그는 다른 탐색자 무리를 발견하고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찬수네 애들이 뭘 좀 발견한 거 같던데?”
“그 새끼 또 분명 허풍 치는 거야. 그 새끼 말 듣고 갔다가 엿 먹은 애들이 몇인 줄 알아? 그 허언증 새끼, 진짜 언제 한번 날 잡아서 푸닥거리를 해야지.”
“그 새끼가 레벨 6인데 네가 무슨 수로. 다른 애들이 괜히 그 양치기 놈 그대로 두는 거 아니다.”
이번 탐색자 무리도 별다른 정보는 없는 듯했다. 그렇게 수많은 탐색자 무리를 따라다니며 김진우는 지저의 분위기를 살폈다.
“야, 텄다. 5층은 없어. 그렇게 이 잡듯이 뒤졌는데 안 나온 거면 없는 거야. 차라리 6층으로 가자. 가서 크리쳐 하나라도 잡는 게 이득이지, 이게 뭔 똥개 훈련이야.”
이건 짜증이 가득 떠오른 어느 탐색자 무리의 대화이고,
“음, 사람 더 모아서 차라리 한 층 더 내려가 볼까요?”
“아서라. 그쪽은 진짜 피 튀긴단다. 5층에서 밀려 내려간 크리쳐들까지 진짜 전쟁통이라니까 우리 같은 애들은 내려가면 바로 휩쓸려서 순삭이다, 순삭.”
이건 6층으로 향하는 통로를 바로 코앞에 둔 어느 탐색자 무리의 대화였다.
대충 5층의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비교적 레벨이 높은 던전 베이비들과 탐색자들은 죄다 6층으로 내려간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어찌나 크리쳐들을 잡아댔는지 김진우는 5층을 헤매는 동안 흔한 크리쳐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과연 오코누토시의 말대로 크리쳐들이 집단으로 이동할 만했다.
이 정도로 던전 베이비들과 탐색자들이 몰려 있으면 아무리 사나운 지저의 크리쳐라고 해도 함부로 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리어 사냥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리고 그런 상황은 6층으로 내려가니 더욱더 심각했다.
6층은 분위가 한층 더 살벌했다. 온 사방에 피 냄새가 가득하고 걷는 길목마다 전투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보이는 곳마다 비스트와 크리쳐의 사체가 널려 있었다.
“신나서 날뛰어댔군.”
크리쳐들의 사체를 본 김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했다.
이빨과 발톱이 죄다 뽑힌 크리쳐의 사체는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었다. 다운 잼을 추출당해 머리통이 박살난 사체를 보며 김진우가 몸을 일으켰다.
저벅저벅.
그렇게 탐색자들에 의해 완전히 분해된 크리쳐나 비스트들의 사체가 곳곳에 널려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끈적끈적한 크리쳐들의 체액이 발밑에 들러붙었다.
예전과 달리 크리쳐에게 당할 정도로 일신의 무력이 변변치 않은 것은 아니나, 지저를 헤맬 때의 그 불쾌함만큼은 여전했다.
그래서 김진우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번에는 꽤나 큰 크리쳐의 사체가 보였다.
비록 온몸이 난도질당하고 이빨과 발톱을 뜯기고 가죽마저 벗겨져 생전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지만, 그 거대한 사체만 해도 강력함을 짐작할 수 있는 무지막지한 놈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크리쳐 주변에는 탐색자의 혈흔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을 살펴보고 벽을 훑어보아도 탐색자가 흘린 피 자국이나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이 정도 되는 크리쳐를 잡는 데 부상자 하나 발생하지 않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바닥에 남겨진 탐색자들의 족적이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이래서야 군대 규모의 탐색자들이 있다고 해도 믿어질 지경이라 그는 무의식중에 크리쳐의 흔적이 아닌 탐색자들의 흔적을 좇았다.
그렇게 한참을 탐색자들을 좇던 김진우는 마침내 6층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탐색자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인 밀어 올려!”
“서쪽 통로에서 보조 좀 맞춰달랍니다!”
“개소리 말라고 해! 기세 잡았을 때 몰아붙여야지 우물쭈물하다가는 이쪽이 당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한 탐색자의 말에 보고를 한 사내가 울상이 되어 사정했다.
“지금 이쪽에서 너무 돌출되면 다른 라인이 무너집니다! 크리쳐들이 다른 통로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요!”
“똑같은 전력으로 나눴는데 다들 왜 지랄인데! 까는 소리 말고 밑천 다 보이라고 해!”
“다 죽는다니까요!”
“아오, 진짜 애물단지 새끼들! 알았으니까 그만 좀 징징대!”
사내의 사정이 통했는지 탐색자가 이내 손을 들어 통로를 가득 메운 거대 크리쳐들에 대한 공세를 늦추라 지시했다.
“아, 왜 또? 조금만 더 하면 잡았는데!”
“미친놈아, 저기 발 빼려고 눈치 보는 놈들 안 보이냐? 다른 라인에서 자기 쪽으로 크리쳐 넘어온다고 적당히 달리란다.”
그렇게 말한 탐색자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멀찌감치 서 있는 김진우를 보고 손짓했다.
“넌 또 어디 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