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98)
던전 견문록-98화(98/319)
# 98
던전 견문록
제 99 화
#40. 블랙 머천트의 심사
막상 발리셔스의 작업장을 찾은 김진우는 실망하고 말았다. 이미 망자 제작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라 쓸 만한 사체 중에 멀쩡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이놈 좀 보십시오. 보내주신 재료 중 쓸 만한 놈들이 워낙 많아 나름 괜찮은 놈이 나왔습니다.”
그의 속도 모르고 발리셔스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제작한 망자들을 보여주었다. 내심 한숨을 내쉰 그였지만, 그래도 발리셔스가 내놓은 망자들을 확인해 보았다.
“호오, 이건 시체를 합친 건가?”
“맞습니다. 이런 식으로라도 보완하지 않으면 망자들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요.”
원숭이와 도마뱀을 합쳐놓은 듯한 외양의 망자는 꽤나 그럴싸했다.
기다란 팔과 우악스러운 주둥이가 쓸 만해 보여 그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니 발리셔스가 연달아 망자들을 보여주었다.
“비록 생전의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겠지만, 고통을 모르고 몸이 단단한 편이니 어지간한 놈들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겁니다.”
발리셔스의 말에 슬며시 망자들의 가죽을 만져보니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생전의 질기고 억센 가죽의 탄력을 잃은 대신 돌처럼 딱딱해진 피부와 강한 내구력을 얻은 망자들은 최전방에서 적진을 헤집는 강력한 돌격병이 될 것이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300기의 망자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00기? 그것밖에 안 되나?”
물론 300기의 망자만 해도 그 수가 어마어마하지만 지난 전쟁에서 얻은 적들의 사체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허접한 놈들이라면 1000기인들 왜 못 만들겠습니까. 하지만 이 귀한 재료를 갖고 그런 불량품을 만들 수는 없지요. 그 어떤 군대보다 용맹하고 공포스러운 군대를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나가 일꾼의 몸에 들어간 뒤부터는 충성을 다하는 발리셔스인지라 김진우도 어느새 실망감을 털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사체 중에 영웅급의 사체가 있다면 적당한 놈으로 하나만 따로 빼 두도록.”
하지만 김진우는 끝까지 거울 망령이 섭취할 사체를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발리셔스의 작업장을 나선 그는 윤희의 미궁을 찾았다.
파수꾼들이 나선 탓에 6층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지만, 정작 밀려난 크리쳐들이 몰려든 7층은 아직도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금야금 근방 미궁들의 힘을 갉아먹는 윤희의 수완은 놀라웠다. 어쩌면 그녀는 저층의 혼란을 기회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7층을 나선 김진우는 우서를 비롯한 봉신들의 미궁을 찾았다.
“어이쿠! 오셨습니까!”
언제나처럼 왕좌에 앉아 흐물거리고 있던 우서가 그를 보고는 기겁했다. 제 몸뚱어리가 반이나 흘러내리도록 급하게 왕좌에서 뛰어내린 우서는 오랜만에 보는 그를 몹시 반가워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기를 우서는 그의 최측근이었다.
비록 순서에 의미를 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 첫 번째 기사라는 타이틀이 제법 대단해 보인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초기부터 나가의 요새와 함께해 온 우서의 위상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요즘 우서는 몹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 몸뚱이의 반을 왕좌에 흘려놓고도 전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까운 우서의 덩치를 보면 그간 얼마나 배부르게 지내왔는지 알고도 남았다.
“부르셨으면 제가 직접 갔을 텐데 말입니다.”
물컹거리는 양손을 비벼대며 말하는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간신배다.
***
9층의 미궁은 전체적으로 성장했다. 지난 전쟁의 전리품이 성장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동맹군으로 참전한 미궁들의 성장이 발군이었다.
전쟁 당시에 비해 비교하여 전원이 등급 업그레이드를 이루었으니 정체된 지저의 상황을 보았을 때 다른 미궁과 실로 비교가 된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미궁들이 그간 놀고 있던 것은 아니다. 10층 귀족연합군의 침공으로 위기감을 느낀 그들은 기를 쓰고 미궁을 성장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개중에 면이 두꺼운 자들은 나가의 요새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김진우는 도움을 청한 자들 중에 섭정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들을 골라 최상급 다운 잼을 지원했다.
당연하게도 군자금의 소모가 무지막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나톨리우스가 지원해 준 군자금은 진즉 소모되었고, 이제 남은 군자금은 지난 전쟁의 전리품뿐이다.
“이제 휘하의 미궁도 어느 정도는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인님의 곁에 섰을 때 어떤 이익이 생길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주인님의 눈에 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려고 할 겁니다.”
그간 알게 모르게 꾸준히 차별적인 지원을 해온지라 9층의 미궁들은 경쟁적으로 자신의 충성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이 모든 것이 도미니크의 계획이었다.
“10층의 상황은 어떻지?”
한 번 전쟁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10층은 여전히 9층이 넘볼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온갖 계략으로 옭아매어 약화시킨 상태로 싸우고도 마지막 전투에서 무지막지한 피해가 발생했다.
그런 10층의 병력이니 그들의 앞마당에서 전투를 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빤했다.
그때는 10층 귀족연합군이 그러했던 것처럼 9층의 병사들이 층간 페널티를 받아야 했으니까.
“지금까지는 정찰 활동이 쉽지 않아요. 워낙에 미지의 영역이기도 하고 장거리 순찰자들의 은신 능력도 10층에서는 절대적이지 않답니다. 하지만 보레아스님이 거의 회복되었으니 이제 얼어붙은 땅을 중심으로 정찰을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지난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워낙에 위중해 보레아스는 지금에 와서야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나가 사제들의 치유력으로도 다 채우지 못한 생명력의 소실을 이제야 채운 것이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군.”
그간 보레아스의 상태 탓에 들르지 못한 10층 유일의 봉토를 생각한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때마침 회복된 보레아스가 그를 찾아왔다.
“이제 슬슬 제 영지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귀족전의 패배로 완전한 충성을 맹세한 보레아스의 태도는 깍듯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시종일관 극도의 공경을 표하는 그를 보며 김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겠다.”
그의 말에 보레아스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충성을 맹세한 뒤로 극진한 대접을 받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자신의 영지에 있을 때만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왕처럼 군림하던 그가 주인을 섬기는 입장이 되었으니 내심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런 그가 이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수 있다니 기쁜 낯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나도 따라가도록 하지.”
하지만 그도 잠시, 김진우가 동행할 것을 선언하자 보레아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렇게 찾은 보레아스의 영지는 얼어붙은 땅이라는 이름처럼 춥고 삭막했다. 삭풍이 몰아치는 미궁에 들어선 김진우가 가볍게 감탄을 토했다.
암상인의 상행을 몰래 따라다니며 본 10층 귀족들의 미궁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보레아스의 미궁은 10층의 귀족들이 타락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전쟁에서 수많은 병력이 소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궁의 방비는 단단했으며, 각종 시설물과 핵의 등급이 9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땅의 심장.] [혹독한 지저에서도 가장 춥고 혹독한 얼어붙은 땅을 관장하는 핵입니다. 삭풍과 추위 속에서 자연스럽게 냉기를 머금은 이 핵은 마침내 스스로가 냉기의 결정체가 되었습니다.] [9등급의 핵은 당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힘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400의 서리 요정족 전사들이 당신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핵을 바라보던 김진우는 감탄을 토해내고 말았다. 그 빛도 빛이지만 크기와 느껴지는 기운이 나가의 요새 이상인 탓이다.
“엄청나군.”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 보레아스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제 영지를 소개했다.
“비록 수는 줄었지만 이들이야말로 제 영지의 정예입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정예 등급에 이른 병사들은 보레아스와 같은 곡도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그 기세가 남달랐다.
게다가 지난 전쟁에서 부관을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얼어붙은 땅에는 무려 열다섯이나 되는 영웅급 전사가 남아 있었다.
“얼어붙은 대지의 한! 통곡하는 삭풍의 전사들이 왕께 인사드립니다!”
구호라도 되는지 어쩐지 스산하게 들리는 인사말과 함께 바닥에 납작 엎드린 400의 전사를 보던 김진우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자랑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보레아스를 보던 그는 문득 장난기가 돌았다.
“억울하지 않나? 이 정도의 미궁과 정예 병력이 남았는데 나에게 굴복한 것이.”
그 말에 보레아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남은 400의 전사를 이끌고 갔다 한들 왕의 신산귀계를 당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은 귀계랄 것도 없는 잔재주에 불과했지만, 당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무서운 게 없었을 것이다.
오가는 곳마다 매복이요 보보마다 함정이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실제로 보레아스는 전투가 끝났을 때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고 했다.
“그렇군.”
생각과는 다른 보레아스의 대답에 김진우가 입맛을 다시고 명령했다.
“게이트를 건설한다! 이곳을 교두보로 삼아 10층에 진출할 것이다!”
그의 선언과도 같은 말에 보레아스와 삭풍의 전사단이 고개를 숙였다.
***
게이트에 들어가는 비용은 천문학적이었다. 새로운 미궁을 쓸 만한 미궁으로 만드는 정도의 비용이 소모되었다. 당장 게이트에 에너지를 공급할 최상급 다운 잼만 해도 무려 열 개 이상이 소모되었다.
자꾸만 비어가는 창고를 보며 김진우는 속이 쓰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비록 그 비용이 천문학적이기는 했지만 게이트는 꼭 필요했다.
10층에 올라올 때마다 9층을 가로질러 10층으로 향하는 통로를 이용하려면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하지만 게이트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9층의 모든 미궁을 봉신으로 둔 지금, 필요하다면 게이트를 통해 9층의 병력을 일시에 10층으로 쏟아낼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게이트는 포탈과는 달리 핵이 위치한 오너 룸이 아닌 임의의 장소에 설치할 수 있었으니 전략적 가치가 포탈보다 뛰어났다.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김진우는 나가의 요새와 얼어붙은 땅의 대지를 잇는 게이트가 완공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하리마오 미궁으로 향하는 암상인의 상행이 바로 오늘인 때문이다.
나가의 요새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암상인이 품에 있던 양피지를 찢었다.
일전에도 본 암상인들이 사용하는 포탈이 허공에 쩍 하니 입을 열고 행렬이 줄줄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가시지요.”
암상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진우가 포탈을 넘었다. 그리고 포탈을 넘어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통로를 가득 메운 용병들이었다.
“이게 무슨…….”
“블랙 머천트는 흑호의 미궁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척 보아도 일백이 넘어 보이는 용병을 본 김진우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암상인이 설명해 주었다.
“이들은 전부 만약을 위한 보험입니다.”
“보험치고는 과한데?”
척 보기에도 하나하나가 영웅급에 오른 용병들이라 그 전력이 일개 상단이 보유하기에는 지나쳤다.
그 무지막지한 전력에 질린 얼굴로 그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암상인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과하기는 합니다. 덕분에 다른 상행이 전부 중단되었을 정도니까요.”
말로는 블랙 머천트의 입장에서도 힘들게 모은 병력이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하나이던 것처럼 말없이 이동하는 용병들의 모습을 보니 그것도 아닌 듯싶었다.
“그리고 이 병력 중 절반 정도는 자작님을 호위하기 위한 병력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그가 눈살을 찌푸리니 암상인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지저의 귀족이 지상인들에게 살해당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니까요.”
아무래도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한 것인지 암상인과 그를 따르는 용병들의 모습이 진지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약 지저의 안위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 설 경우, 핵을 회수할 생각입니다.”
“그들을 공격하겠다는 말인가?”
생각보다 일이 커진지라 김진우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일 뿐입니다. 저희 블랙 머천트는 이유 없이 미궁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일개 상인에 불과한 존재, 그럴 명분도 이유도 없으니까요.”
도대체 뭐라고 떠들어대는 것인지 뒤에 늘어선 용병들의 모습과 암상인의 말이 전혀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작님도 선택을 하셔야 할 겁니다.”
평소보다 배는 깊고 낮은 음성에 김진우가 저도 모르게 암상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암상인의 새까만 눈동자에는 그 어떤 빛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