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99)
던전 견문록-99화(99/319)
# 99
던전 견문록
제 100 화
조용한 지저가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경보를 알리는 짧은 기계음에 김진우는 힐끗 암상인을 바라보았다.
암상인은 5층의 담당자로 내정된 임프에게 무언가 설명해 주는 것인지 경보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애꿎은 용병들만 좁은 통로를 막고 대열을 갖추느라 법석을 떨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암상인도 쏟아지는 듯한 섬광에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하리마오 미궁의 방어 병력이 조명을 등지고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바디 벙커라 불리는 탐색자 전용 방패와 창, 그리고 탐색자들이 손에 넣지 못한 수많은 화기가 이쪽을 향해 있다.
“정지! 소속을 밝혀라! 여긴 대한민국 정부가 통제하는 구역이다! 민간 탐색자들은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다!”
아무래도 이쪽의 행렬을 보고 탐색자 팀이라고 오해한 모양인지 하리마오 미궁의 경비병들이 경고해 왔다.
“다시 말한다! 이곳은 대한민국 정부가 통제하는 구역이다! 허가 받지 않은 인원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으니 발길을 돌려라!”
다시 이어지는 경고가 이어졌다.
그사이 지저에서는 볼 수 없는 섬광에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던 암상인이 곁에 있던 임프의 등을 떠밀었다.
그것이 신호였는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임프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철컥! 철컥!
그 사소한 움직임에 인간들이 움찔거리며 무기를 내밀었다.
“더 이상의 접근은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응하겠다!”
이제는 소속이고 뭐고 물러나라는 말만을 반복하는 경비 병력의 말을 들으며 임프가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지상인들이여.”
어딘지 모르게 상황에 맞지 않는 인사말이다. 아마도 암상인과 미리 맞추어둔 멘트를 그대로 따라 읊고 있는 모양이다.
“지상인?”
지상인이라는 말에 경비 병력 안쪽에서 당황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 그들을 보며 임프가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지저의 상인들입니다. 그대들과 적대하러 온 것이 아니니 무기를 내려주십시오.”
“뭔 헛소리야?”
살벌하기 그지없는 지저에 상인을 자처하는 이가 나타났으니 이쯤 되면 개발국이 엄선한 정예 경비병이라고 한들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들 정체가…….”
그렇게 의문을 표하던 경비병 중 하나가 갑작스레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들! 사람이 아니야!”
그러고 보니 깊은 후드로 가려져 있던 호위 용병들의 흉악스러운 얼굴이 밝은 조명에 반쯤 드러나 있다. 인간과는 확연하게 다른 푸른 피부와 기다란 송곳니를 발견한 경비병들이 뒤늦게 소란을 떨어댔다.
“상황실에 보고해! 지원 병력 요청해! 적의 침입이다!”
“적 병력의 수는 대략 70에서 90!”
부산스러워지는 인간들의 대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완전히 적대적으로 변해 버렸다. 그 사실을 느낀 것인지 선두에 선 임프가 당황해 외쳤다.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대들과 거래를 하려고 온 것입니다!”
그렇게 외쳐대는 임프의 작은 몸 위로 십여 개의 빨간 점이 나타났다. 그 점을 본 김진우는 빠르게 전방의 어둠을 훑어보았다.
“음…….”
경비 병력 사이에 배치된 저격수들이 무식할 정도로 커다란 저격총을 들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들이 손가락만 까딱하면 저 작고 연약한 임프를 향해 십수 발의 대구경 총탄이 날아들 것이다.
하지만 빨간 점의 정체를 알 리 없는 임프는 제 몸에 나타난 빨간 점이 신기한지 짧은 손을 놀려대며 법석을 떨었다.
“커흠.”
뒤에 서 있던 암상인이 헛기침을 하며 신호를 주고 나서야 임프는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어갔다.
“저희는 상인입니다! 그대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단지 거래가 하고 싶을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봐야 저쪽에서 순순히 총구를 내리고 무기를 거둘 리 없었다. 적어도 인간들이 아는 지저는 그저 죽고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지상과제인 끔찍한 야만의 세계일 뿐이었다.
“위에서는 아직 말이 없어? 싸우든 물러나든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작고 앳된 모습의 임프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하리마오 미궁의 경비병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금세 전투 대형으로 늘어선 경비병들의 선두에서 바디 벙커가 단단한 바닥을 뚫고 고정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저 여러분께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을 뿐입니다!”
임프가 다시 한 번 소리를 쳤다. 어떻게 보면 수십의 칼날과 총구 앞에서 떠들어대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라 김진우가 암상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느새 호위 용병들 뒤로 몸을 숨긴 암상인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왜 지상인과의 접촉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두고 경험 많은 암상인이 직접 나서지 않고 임프를 내세웠는지를.
암상인은 간사하게도 혹시 모를 위험에 임프를 더미로 내세운 것이다.
실제로도 저격수들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지저에서도 보잘것없기로 소문난 임프의 육신 따위는 단숨에 벌집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지 암상인은 호위 용병의 커다란 덩치 뒤에 완전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김진우가 암상인의 교활함에 혀를 내두르는 사이, 하리마오 미궁의 대열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거래를 원한다고 했습니까?”
탐색자들 사이에서 나온 이는 미궁의 주인인 김진태와 지저개발국의 김주혁 차장이었다.
“그렇습니다. 흑호들의 왕과 지상인들의 대표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제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 책임자들을 보며 임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넸다.
***
임프와 하리마오 미궁의 책임자들은 양측이 대치한 한가운데서 만남을 가졌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50여 미터가량 더 물러난 탓에 거리가 벌어져 김진우는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리마오 미궁 측에서 대화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김주혁 차장이었다.
그를 호위하기 위해 다섯 명의 던전 베이비가 딱 붙어서 있었는데, 그에 반해 암상인 측은 임프 하나만을 덜렁 내놓았을 뿐이다.
“음.”
온 신경을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집중했지만, 거리가 멀어 단편적으로 ‘다운 잼’, ‘블랙 머천트’, ‘지속적인 거래’ 등등의 단어만을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대화를 듣는 것을 포기했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쉰 김진우가 표정을 달리 하고 하리마오 미궁 일행과 임프를 살펴보았다.
김주혁 차장을 호위하기 위해 나선 인물 중에는 그도 익히 아는 얼굴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준영.
언제든 칼을 뽑아 들 기세로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고 있는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하기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녀와 정찬식 일행은 지저개발국에 장기 고용된 상태였으니까.
“이크.”
잠시 넋 놓고 생각에 잠긴 사이 고개를 돌린 그녀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깜짝 놀란 그는 황급히 후드 끝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만약 이 안에 있는 누군가가 암상인 일행에 껴 있는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무심하게 스쳐 가는 시선을 보며 그는 남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음?”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갑작스레 주변의 공기가 변했음을 느낀 김진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긴장감이 팽팽했지만 결코 위협적이지는 않던 하리마오 미궁 쪽의 병력 사이에서 은근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기에 민감한 몇몇 호위 용병들이 벌써부터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자세를 낮추는 것이 보였다.
“대기한다.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마라.”
일촉즉발의 분위기, 날카롭게 솟아오른 용병들의 기세가 암상인의 한마디에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직도 하리마오 미궁 측의 기세는 살벌했지만 이쪽의 기세가 가라앉은 것만으로도 김진우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숨을 길게 내뱉던 그는 자신을 살펴보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암상인과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작님도 선택을 하셔야 할 겁니다.’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미궁에 도착하기 전의 대화가 다시금 떠올랐다.
***
“선택? 무슨 선택?”
암상인의 질문에 김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암상인이 여전히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곳에 모인 용병들과 지상인들이 전투를 벌일지도 모릅니다.”
막연하게 생각하던 최악의 경우가 암상인의 입을 빌려 현실이 되었다. 그 차가운 음성에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든 그가 암상인을 노려보았다.
“그때가 오면 자작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느릿느릿하지만 그만큼 더 또렷한 음성, 암상인이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물었다.
“저희와 함께 저 골칫덩어리들을 제거하시겠습니까?”
어쩐지 암상인은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도 아니면 동족과 함께 저희를 막으시겠습니까?”
***
결국 김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살인이 꺼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손에 피를 묻힐 각오는 이미 되어 있었다.
이미 그렇게 몇 번이나 인육을 탐하는 사냥꾼과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내는 인간들을 처리한 적이 있다.
지금도 얼마든지 자신을 위협하는 ‘적’을 그렇게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암상인의 질문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묻고 있었다.
선택의 시간이 왔을 때 지저의 편에 설 것이냐, 인간들의 편에 설 것이냐, 암상인은 바로 그것을 묻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지상인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지저를 그토록 증오했지만 이제는 지저의 일부분이 된 자신이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을 때 과연 그 여파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당장 지저에 위협이 된다면 흑호의 미궁마저 지워 버리고 말겠다는 블랙 머천트다. 어떤 방식으로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강요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어설픈 동포애로 경솔한 결정을 했다가는 그간 이룩해 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김진우의 눈이 칼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이준영을 스쳐 갔다. 그녀의 얼굴을 본 그는 마음이 더욱 무거워져 저도 모르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지금은 그저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의 시선이 빠르게 호위 용병들의 대열을 스쳐 갔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김진우를 암상인이 말간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다.
***
이야기가 끝난 것일까. 이준영이 미궁의 경비병들을 향해 달려갔다.
어쩐지 임프는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굴러대고 있고, 김주혁 차장은 심각한 얼굴로 임프와 암상인의 행렬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왠지 감이 좋지 않았다. 심각한 김주혁 차장의 표정이나 임프의 당황한 얼굴이나 일이 잘못된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와락 들었다.
이준영이 경비병의 대열에 닿자 갑자기 하리마오 미궁의 인원들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호위 용병들의 몸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뜩이나 인간들의 살기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호위 용병들의 숨결이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크륵, 크르륵.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한 그 거북스러운 으르렁거림에 김진우가 저도 모르게 암상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