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10)
10.
나는 남들과 조금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대본을 집어삼켜 대사를 완벽히 암기(暗記)하고, 대본에 기재된 모든 배역을 완벽히 소화(消化)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능력이 생겼다.
분석(分析).
대본을 분석하여 대본의 ‘완성도’를 측정하는 능력이다.
내가 처음, 이 능력을 발견했을 때.
… 이게 뭐지?
너무나 황당했지만, 처음 대본이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만큼 놀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책이 내게 말을 거는데 이 정도 쯤이야, 라며 대범하게 마음을 먹고 어떤 능력인지 알아보는데 집중했다.
– 영화 미개봉작 [면목동 예술가들> [67/100]
– 영화 미개봉작 [여인의 외침> [58/100]
– 영화 미개봉작 [버스 드라이버> [62/100]
마치, 100점 만점에 점수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다운로드의 로딩 중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후자는 아닌 것이.
[67/100] [58/100] [62/100]숫자는 고정되어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완성도’ 라고 하였다.
“… 이거 혹시.”
혹시나 싶은 마음에, 책장 한 구석에 꽂혀있는 다른 영화 대본들을 꺼내들었다.
– 영화 [그 교도소의 기적> [92/100]
– 영화 [변호사> [96/100]
– 영화 [맛있는 연애, 짭짤한 썸> [45/100]
다른 영화 대본들에도 이와 똑같은 숫자가 표기되어있었다.
“시나리오의 완성도?”
1000만 영화라는 타이틀을 찍으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순위 최상단에 위치한 두 작품의 시나리오 점수는 90점 이상으로 높았고, 손익분기점인 150만도 넘지 못했던 송문교의 스크린 데뷔작인 [맛있는 연재, 짭짤한 썸>은 고작 45점 이었다.
즉, 시나리오의 완성도만으로 어느 정도 흥행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셈이다.
물론, 대본이 좋다고 반드시 흥행한다는 공식은 없다. 대본 만큼 중요한 것이, 캐스팅보드와 연출의 실력, 그리고 개봉 시기라는 ‘운’도 맞아떨어져야 한다.
‘완성도 = 흥행’이 아니라 단순히 시나리오가 가진 힘에 대한 수치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앞으로 쌓아갈 필모그래피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뢰작’은 거를 수 있는 힘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또 한 가지. 조금 ‘특별한’ 것이 있었는데.
[67/100] (+10) [58/100] (+8) [62/100] (+15)괄호 안에 기재되어 있는 숫자.
내가 해당 작품을 진행하면 올라갈 수 있는 일종의 가능성이자, 이 대본이 나를 만나 발전할 수 있는 맥시멈의 여지인 셈이다.
“… 이거, 장난 아니네.”
거기다 대본의 어떤 점이 부족한지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들어오니, 배우가 아니라 평론가를 해도 될 정도.
나는 문득, 이 능력의 한계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청춘 열차>의 대본을 잡아보았다.
하지만 영화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숫자가 나오지 않았다.
[완결되지 않은 대본에는 효력이 없습니다.]‘사전제작’ 드라마의 경우에야 ‘16부’라는 전체 완성대본을 가지고 촬영에 들어가지만, 일반적으로는 시청자 반응을 모니터하며 라이브로 대본이 쓰여 진다.
즉, 대본의 미래가 불투명한 [청춘 열차>의 대본에 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드라마에선 대부분 꽝이네.”
… 하지만 이게 어디야.
이 능력이 주는 위대함은 벌써부터 드러났다.
나는 볼 것도 없이 박찬익 팀장에게 받은 대본 세 권을 침대 위로 던져버렸으니까.
67점, 58점, 62점.
저런 작품은 굳이 안 해도 되잖아.
작품은 많다.
당장 올해 상반기에 들어가는 작품만 해도, 회사 사무실 테이블에 ‘탑’처럼 쌓여있지 않은가.
천천히 기다리면 온다.
우선 [청춘 열차>에 집중하고, 흥행 가능성이 보이는 작품이 나타날 때, 놓치지 않으면 된다.
급하지는 않게, 하지만 여유도 부리지 않고 차분히 기다리면 된다.
나는 얼굴에 찬 물을 끼얹어 술기운을 몰아낸 뒤, 전화기를 들었다.
“형”
얼마 남지 않은 휴가를 즐길 생각이다.
*
문성이 형은 내 전화를 받자마자 곧 바로 천호동에서 도곡동까지 달려와 주었다.
사장님이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되냐는 내 질문에는.
“내가 사장이니까.” 라며, 어깨를 으쓱인다.
뭐, 어쨌든.
마땅히 연락하고 지낼 친구도 없는 내 입장에서, 휴가를 적적하지 않게 채워주는 고마운 형이다.
오디션 합격. 대본 수정. 그리고 오전에 있었던 리딩과, 회식에서의 일을 말해주었다.
문성이 형은 회사를 나간 이후로, 가장 큰 미소를 지어보였다.
“크하하! 송문교 그 새끼, 표정을 나도 봤어야 하는데.”
“뭐, 혼자 보기 아깝긴 했지.”
“큭큭큭, 그래. 우리 재희 이제 좀 풀리려나 보다. 하긴! 우리 때 회사에 있던 애들 중에서 너 만큼 열심히 하던 애가 누가 있었냐. 이제 보상 받을 때도 됐지.”
L&K는 업계에서 ‘배우 전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있는 기획사다. 아이돌도 키우지만, 확실히 배우 라인이 강세를 보였고- 회사 이름값을 믿고 나처럼 무명시절을 보낸 연기자지망생들도 여럿 있었다.
물론, 대부분 실패를 맛보고 각자 삶을 찾아 회사를 떠났지만.
나는 소주잔을 깊게 털어 넣었다.
“크으, 좋네.”
일종의 ‘살아남았다.’ 라는 희열이 느껴지는 맛이다.
목구멍을 넘기는 소주가, 달달하게 느껴지는 것이 얼마만인가.
회식에서 마신 술기운에 기분 좋은 취기가 스며든다.
자정이 훌쩍 넘은 야심한 시각. 김이 모락모락 나던 어묵탕은 미지근해졌고, 그 만큼 많은 소주병이 비워졌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 보다 또렷하다.
“어쨌든, 기죽지 말고 잘해 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병을 들어 문성이 형 잔을 채워주었다.
꼴꼴꼴꼴.
그리고 지나가듯 물었다.
“형은 복귀 생각 없어?”
내 질문에 문성이 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시작도 제대로 못해봤는데 복귀는 무슨.”
“연기 다시 하고 싶지 않냐고.”
“… 하고는 싶지. 근데, 또 그 지옥 같던 시절을 생각하면 조금 참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은 있기 마련이다.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 현실적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하는 문제가 남아있기에 대부분 참고 살아서 이를 모를 뿐.
그렇기에 포기한 사람을 낙오자라고 비난할 수도, 내가 뭐라고 감히 위로할 수도 없다.
그냥 이렇게 술 한 잔 곁에서 주고받으면 그 뿐이다.
“그런데 확실한 건. 왜 그런 말 있잖아? 배우가 무대를 떠나면, 귀신이 되어서도 무대로 돌아온다는 말. 예전에는 그 말을 이해 못했는데, 지금은 이해된다.”
하지만 나중에.
1, 2년 뒤에 내가 누군가를 챙길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만 있다면, 내가 도와주고 싶다.
“TV 돌리다 무심결에 드라마만 나와도 옛날 생각난다니까. 그러다 괜히 부러워져서 리모컨을 던져버리지. 끌끌”
하지만 굳이 도와주겠다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사람 인생이 걸린 일이고, 내가 평생 책임져줄 것도 아니니 멋대로 지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대신, 도와달라고 요청한다면 모르는 척 뿌리치지는 말자.
“다음번에 만날 때는 형. 내가 진짜 근사하게 쏠게.”
“오올, 기대되는데? 그 때는 룸이라도 잡아야 하는 거 아니냐? 너 얼굴 팔리면 안 되니까.”
“풉. 그 정도는 아니네요.”
술 때문에 기분이 매우 감상적으로 변한다.
아, 도대체 얼마나 마신거야.
*
눈을 뜨자마자 본가(本家)가 있는 사당동 내 ‘방’ 천장이 보였다. 다행히 집에는 잘 들어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천장이 핑글핑글 돈다.
“아… 머리야.”
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얼핏 떠오르는 숫자만 소주 다섯 병이다. 마지막 잔을 털어 넣은 뒤의 기억은 마치, 뿌연 스모그라도 뿌린 듯 희미하고, 파노라마처럼 짤막하다.
“… 미쳤네.”
몇 달 만에 오는 집에 이런 꼴로 들어오다니.
“일어났어?”
그 때 문을 열고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가까운 서울에 살면서도 명절에나 한 번 얼굴을 뵙는 어머니다.
이유는 내가 의도적으로 집에 오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연기는 할 만 하니?’
이러한 질문은, 스물여덟의 나이에 취직도 안하고 돈도 못 벌고 있는 아들에게는 꽤나 곤혹스러운 질문이니까.
“저…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요?”
“아주 늦게 들어오셨습니다. 아드님. 문성이가 그러는데, 자기 아니었음 너 길바닥에서 입 돌아갔을 거란다.”
아, 나 뭐하는 거냐.
“어서 나와. 콩나물국 끓여뒀으니까.”
“…. 네.”
집은 여전했다. 변한 것 하나 없는, 평범한 가정집.
빚으로 쌓아올린 작은 빌라 건물이지만, 집안 곳곳에 알뜰살뜰함이 묻어있고 따뜻한 온기가 있다.
하지만 묘하게 불편했던 기억도 함께 공존한다.
식탁에서 가족들과 함께 밥 먹는 것에 대한 불편함.
평소 같았으면, 질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함께 식탁에 마주 앉는 것조차 피하고 싶었을 테지만.
나는 오늘 만큼은 덤덤하게 자리에 앉았다. 떳떳하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많이 받니?”
몇 달 만에 보는 아들이 난데없이 새벽에 술에 잔뜩 취해 들이닥쳤으니, 새벽 내내 속이 얼마나 까맣게 변하셨을까 싶었다.
“아니요. 요즘 좋아요.”
나는 죄송스러운 마음을 숨기며, 콩나물국을 한 입 떠먹었다.
후룩.
아, 조금 살 것 같다.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고운 미모를 자랑했다. 내가 이만큼 생길 수 있던 것도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가의 주름은 어느새 깊어졌고, 이렇게 가끔 얼굴을 마주하니, 확실히 나이를 드신다는 것이 점점 실감이 난다.
“…..”
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망설였다.
이런 쪽으로는, 확실히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어색하다.
“맛있니?”
“… 네.”
내 대답에 어머니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술이 떡이 된 놈도 내 아들놈이라고 반갑긴 하더구나. 꼭두새벽부터 콩나물국도 끓여놓았으니, 엄마 노릇은 다한 거 같은데.”
어머니가 장난스럽게 웃으셨다.
그리고 그 웃음을 보자 묘하게 용기가 솟구쳤다.
“앞으로 아들 얼굴 자주 보게 되실 거예요.”
“… 응?”
“12월 18일, 밤 10시. SBC 미니시리즈 [청춘열차>”
“… 그게 뭐니?”
아, 나 지금 뭐하는 거야.
두서없이 프로그램 정보만 주절주절 흘려버렸다.
“… 흠흠. 오디션에… 붙었어요. 비중도 크고, 이번에는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 응?”
어머니는, 아침드라마에 이미지 단역으로 아주 짤막하게 지나간 내 모습을 보며, TV에 나왔다며 소녀같이 좋아하시는 분이다.
어머니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은 TV에 짤막하게 스치듯 지나간 내 단역 캡처 사진이고, 그 사진은 지난 1년 간 바뀐 적이 없다.
“그, 그게 정말이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 내 성공을 바라마지 않는 분이다.
“네. 이제 프로필 사진 바꾸셔도 되요.”
어머니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웃어야할지, 놀라야할지, 울어야 할지, 당최 모르겠다는 듯 허둥지둥 귀여운 반응이셨다.
“… 정말?”
꼭두새벽에 들어온 술에 취한 못난 아들놈이, 뜻밖의 희소식을 물고 들어왔다.
“네.”
“얏호!”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이제껏 이 날을 위해서 오디션에 떨어졌나 싶을 정도로 얼떨떨한 감정을 느꼈다.
몰려드는 뿌듯함, 한 없이 커진 자신감, 그리고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알 수 없는 도파민들.
당최 느껴본 적 없는 감정들이 한데 모여 소용돌이 쳤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연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기다려 왔다는 순간이라는 것.
아, 이거야.
[ 책 먹는 배우님 – 10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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